공산당의 6·25전쟁 당시 기독교 성직자 학살·납치 진상
[발굴특종]
새로 밝혀진 공산당의 6·25전쟁 당시 기독교 성직자 학살·납치 진상
피살·납북된 목사·신부 등 358명 명단 발굴
목사·신부·장로·수녀 170여 명 학살당해, 교황 사절·구세군 사령관 등 외국인도 희생
鄭 晉 錫
1939년 경남 거창 출생. 중앙大 영문과 졸업. 서울大 대학원 신문학과 석사. 런던大 정치경제대학 박사. 한국기자협회 편집실장. 관훈클럽 사무국장. 일본 천리大 교환교수. 재단법인 LG상남언론재단 이사. 서재필 기념회 이사. 「대한매일신보와 배설」, 「한국 언론사」, 「인물 한국 언론사」, 「역사와 언론인」, 「언론과 한국 현대사」 등 펴냄.
鄭晉錫 한국외국어大 교수
「400명의 牧者 희생」
6·25 전쟁 중 북한군과 공산당에 피살당한 기독교 교직자는 이름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사람만 174명이 확인되었고, 납북당한 교직자도 184명으로 피살과 납북 피해자는 모두 358명에 이른다. 정부와 적십자사가 조사한 자료는 북한군이 서울에 진주한 직후부터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을 학살하거나 조직적으로 北으로 끌고 갔는지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이는 정부가 전쟁이 끝나기 전에 조사·작성한 「피살자명부」, 「피납치자명부」, 대한적십자사가 1956년에 희생자 가족들로부터 자진 등록을 받은 명부에 개신교의 「목사」, 「장로」, 천주교의 「신부」 등으로 교직이 명확히 밝혀진 기독교인들과 기독교의 여러 조사자료를 종합한 수이다. 그러나 피살 또는 납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교직자도 적지 않을 것이고, 직업에 「종교인」으로 표시되지 않은 일반신도를 포함하면 그 수는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1952년 6월25일자 「한국기독교신문」은 400명의 牧者(목자)가 희생되었다고 보도하였으며, 이와는 별도로 북한에서만 장로교 교역자 240명, 감리교 46명이 순교 또는 행방불명된 것으로 알려졌다(「기독교연감」 1957판, 대한기독교서회).
납북자와 피살자에 관한 공식 자료는 5 종류가 있다. 정부가 조사한 피살자 또는 납북자 가운데 직업이 기독교인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은 사람도 많기 때문에 정확한 수를 파악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기독교 연구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피살 또는 납치당한 개신교 교역자는 장로교 177명, 감리교 44명, 성결교 11명, 성공회 6명 등이었다(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신개정판,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3). 가톨릭에서는 남북한을 합쳐 한국인 52명(교구장 1, 신부 40, 수녀 7, 신학생 4)의 희생자가 있었고 외국인 98명을 포함하면 150명이 희생되었다(「한국가톨릭대사전」,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1992, p.911).
天主敎, 제2의 박해기
그러나 기독교계의 연구 자료와 정부가 전국에 걸쳐 작성한 피살자와 피납북자의 명부를 조사한 결과 기독교 교역자의 피해는 그보다 많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전쟁 전부터 북한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을 처형 또는 투옥하다가 전쟁을 일으킨 후에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개별적으로 검거하여 처형하거나 北으로 끌고 갔다. 기독교인들을 수십 명씩 집단으로 학살한 사건도 여러 곳에 있었다.
북한에서의 종교 탄압은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북한 정권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를 청산하고 종교를 말살하는 단계까지 이르게 하려는 것이었다. 광복 이후 북한 공산 정권의 종교 탄압과 기독교의 수난에 대해서 한국 천주교회사는 「침묵의 교회 형성기」 또는 「제2의 박해기, 순교자들의 시대」로 규정한다.
천주교의 경우 한 연구에 의하면 제일 먼저 탄압을 받았던 덕원 면속구와 함흥교구에서는 1949년 5월9일 보니파시오 사우어(B. Sauer, 辛) 주교와 3명의 신부들이 체포된 이래 6·25 전쟁 직전까지 73명이 체포 또는 피살되었다. 독일인 성직자 22명, 수사 25명, 수녀 20명, 한국인 신부 5명, 수녀 1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31명이 희생(외국인 25명, 한국인 6명)되었고, 42명은 후에 생환하였다.
덕원에서 시작된 교회 탄압은 평양교구와 황해도 교회로 이어졌다. 평양교구에서는 1949년 5월14일 교구장 洪龍浩(홍용호, 프란치스코) 주교가 납치된 이래 6·25 직전까지 14명이 체포·구금되어 모두가 행방 불명되었다. 가장 늦게까지 성직자·수도자들이 활동했던 황해도 지역에서 1949년 5월20일에 체포된 韓允勝(한윤승, 필립보) 신부를 비롯하여 모두 5명의 한국인 신부들이 행방 불명되었다(차기진, 「6·25 사변과 천주교회의 순교자들」, 「사목」, 1994.10).
이는 전쟁 이전에 북한 정권이 북한에서 자행한 천주교 박해의 특수한 예에 불과하다. 개신교에 대한 탄압도 이에 못지않았을 것이다. 金日成은 전쟁을 일으킨 후 남한에 진주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을 처형했다. 공산당은 남한의 몇 개 지역에서는 교인들을 집단으로 학살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기독교도를 집단학살한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50년 9월, 전남 靈巖(영암)읍 교회에서 신도 24명을 집단학살하였고, 沃溝(옥구)에서도 20여 명의 신도가 학살당했다.
전남 서쪽 바다에 있는 荏子島(임자도)에서도 100명, 혹은 150명씩 구덩이를 파고 양민과 교인을 학살했다. 10월5일 새벽 이판일 장로의 일가족 13명이 학살당했으며, 집단 학살당한 교인은 43명이었다. 충남 논산의 병촌교회에서는 한 살짜리 어린아이부터 육순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60여 명의 교인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다(박완, 「실록 한국기독교 100년」 제6권, 선문출판사, 1973).
정부는 서울이 중공군에게 함락되기 전의 긴박한 상황이었던 1950년 12월 서울에서 납북 또는 피살된 사람들의 실태를 조사하였고, 그 후 두 차례 전국에 걸친 피해상황을 조사하였으며 피살자의 명단을 따로 만들었다. 대한적십자사는 1956년에 납북자들의 가족으로부터 등록을 접수하여 송환을 위한 교섭자료로 활용하였다.
휴전 후 정부는 납북자의 송환을 명시한 휴전협정 제59조의 규정에 근거하여 송환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보았지만 북한의 비협조로 성사되지 못한 채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이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어서 반세기가 흘렀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렀다 한들 종교인들의 생명에 관련된 문제를 외면하고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정부와 적십자사가 수집한 피살 또는 납북당한 사람들의 수는 별표와 같다.
위의 5종류 자료 가운데 치안국 정보과가 1954년에 조사한 「피납치자명부」는 프린트 인쇄가 조악하여 글자가 보이지 않거나 판독이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료로 활용하기에 애로가 있다.
납북된 종교인은 치안국 자료를 제외한 4종류 명부를 조사하여 종합한 것이다.
이 자료들에 수록된 명단에는 중복 포함된 사람도 있고, 3개나 2개 자료 또는 하나의 자료에만 들어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므로 이 5개 자료 가운데 4개 자료를 토대로 피살 또는 납북된 종교인을 찾아내어 종합하고 교회사 자료를 종합해 본 결과 아래에 상술하는 피살 또는 납북 종교인들을 밝힐 수 있었다. 정부 기록 외에도 여러 기독교 자료를 참고로 하여 정부가 조사한 명단에 없는 이름을 추가하였다. 피살·납북 연도는 1950년이다.
피살 종교인들
[목사(38)] 50여 명 무심천에서 피살
郭京漢(곽경한·60) 9월24일 청주형무소에서 피살. 일제시대에는 괴산, 보은, 청원 등지에서 목회하였고 광복 후 청주형무소의 목사로 재임했다. 6·25 전쟁 후 공산군에 체포되어 청주 내무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공산당은 郭목사를 비롯한 50여 명을 결박하여 청주 무심천으로 끌고 가 집단 살해.
金邦昊(김방호·56)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염산교회 목사. 10월27일 염산면 옥실리 장병태의 집에서 부인 김화순과 자녀 등 7명이 피살. 이때 염산교회 신도의 과반수가 넘는 77명이 피살되었다.
金炳球(김병구·40) 전북 정읍군 신태인제일교회 목사. 「기독교대백과사전」은 공산군이 체포하여 살해한 뒤에 연못에 내던진 것으로 되어 있다. 정부의 「피살자명부」에는 金炳珠(김병주·49) 목사가 8월6일 신태인읍 연정리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金炳九(김병구·49)라는 기독교인이 8월6일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연지리에서 납북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두 같은 사람인데 이름과 나이가 다르게 기재된 것이다.
金炳燁(김병엽·43) 전북 정읍군 신태인제일교회 목사. 「피살자명부」에는 金炳華(김병화) 목사가 8월6일 완주군 신태인읍 연정리에서 피살로, 「피납치자명부」에는 같은 사람이 납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김병엽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한편 「기독교대백과사전」과 「한국기독교회사」(김수진, p.346)에는 6·25 전쟁 후 공산군이 물러간 뒤에 패잔병들로 조직된 빨치산들에게 1950년 10월10일 새벽에 피살된 것으로 되어 있다.
金相俊(김상준·27) 9월28일 강원도 횡성읍 北川里(북천리)에서 피살.
金洙鉉(김수현·56) 광복 후 부안읍교회와 진도읍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6·25 전쟁 후 진도읍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수문 밑 바다에 수장되었다.
金禮鎭(김예진·53) 서울 후암교회 목사. 8월2일 11시경 서울 신당동에서 여러 명의 북한군이 연행하여 군용차로 납북하였다. 김예진 목사는 정부가 6·25 직후에 조사한 피살자명부에 수록되어 있고, 「기독교대백과사전」에도 8월2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미아리 골짜기에서 피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1956년에 적십자사에서 납북상황을 신고토록 했을 때에 가족들이 「납북」으로 신고했다. 가족들은 혹시라도 납북된 상태로 북한에 억류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운 희망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金允實(김윤실·34) 서울 북창동 공동교회 목사. 8월11일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9월22일 피살.
金正福(김정복·61) 장로교 목사. 소록도교회에서 나환자를 대상으로 목회하던 중 6·25 전쟁 후 체포되어 고흥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공산군이 후퇴하던 9월28일 애국청년 30여 명과 함께 고흥읍 뒷산에서 피살.
공산군이 쇠창으로 찔러 죽여
金宗仁(김종인·51) 전남 법성포교회(장로교) 목사. 9월29일 공산군에 끌려가 어느 무밭에서 독살당하였고 부인과 두 딸, 한 아들을 포함한 교인 24명도 순교.
金鍾漢(김종한·45) 전북 만경교회(장로교) 목사. 김제군 백산면 신기리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다가 1950년 같은 군의 만경교회에 부임. 9·28 수복과 함께 후퇴하던 공산군은 김종한 등 교인 15명을 김제 내무서 뒤뜰 우물에 생매장하였다. 이때 금산교회 장로 조기남, 주교 교사 김윤철, 대송교회 장로 정기봉을 비롯하여 김형배, 하치오, 김성두, 권태술 등을 죽였고 대창교회 목사 안덕윤을 잔인하게 창칼로 찔러 살해.
金周鉉(김주현·41) 전북 완주군 삼례후정교회 목사. 9월27일 전주 내무서 뒤뜰에서 몽둥이에 맞아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7월27일 전주형무소에서 피살된 것으로 적혀 있다.
都福日(도복일·37) 충남 당진교회 삽교교회 목사. 9월21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삽교 근방에서 피살.
朴錫炫(박석현·52) 광주 양림교회(장로교) 목사. 9월27일경 장모인 전도사 羅玉梅(나옥매), 부인 金貴南(김귀남), 아들 박원택과 함께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피살.
朴淵瑞(박연서·62) 대한기독교서회 목사. 대한기독교서회 편집부장을 지냈다. 정치보위부에 구금되었다가 8월1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피살. 9월19일 피살설도 있다.
裴永石(배영석·46) 전남 강진읍교회 목사. 8월6일 강진읍 장터에서 피살.
白南鏞(백남용·54) 복음교회 목사. 과도정부 입법위원을 지냈고 전북 김제에서 목회했는데 공산군 점령 치하에도 예배인도를 계속하다가 8월28일 연행되었다. 9월27일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피살.
孫良源(손양원·50) 전남 여수 나병원 애양원교회(장로교) 목사. 9월13일 애양원에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여수경찰서에 구치되었다가 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목사와 함께 피살.
安德允(안덕윤 또는 德潤·53) 전북 김제군 죽산면 대창리교회 목사. 일제시대 2년 5개월 동안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광복을 맞아 출옥. 1950년 9월27일 대창리교회 앞 들판에서 공산군이 쇠창으로 찔러 죽였다.
元昌權(원창권·51) 전남 영광읍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이 진주한 후 피난 가다가 열한 살 난 아들과 임신 7개월의 부인이 함께 피살.
劉東熙(유동희·44) 「피살자명부」의 제주도 피살자에 등재되어 있다. 1950년 7월4일 평양 정치보위국에서 피살되었는데 어떤 경위로 평양에서 피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본적이 대동군 시족면 호남리이며 주소는 강동군 원탄면 송오리인 것으로 보아 북한 출신으로 월남하여 제주도에 거주하다가 국군을 따라 북한에 갔다가 피살된 것으로 추측된다.
심한 매를 맞고 피살
柳允洙(유윤수·51) 1950년 9월27일 전북 정읍군 신태인읍 인교동에서 피살.
李用善(이용선·45) 전남 구례읍 교회 목사. 공산군이 후퇴한 이후 1950년 12월9일 순천노회에 참석하고 귀가하던 중 지리산에 숨어 있던 공비들에게 피살.
李龍仁(이용인·38) 목사. 1950년 10월7일, 전남 영광군 춘남리 설도에서 피살.
李載珪(이재규·50) 전북 황등교회(장로교) 목사. 1950년 7월26일 오후 5시 전북 익산군 황등면 황등교회 사택에서 내무서원 2명에게 연행 납치된 후 변영수(장로), 안인호(집사), 이성권(청년회장)과 함께 피살.
李鐘德(이종덕·67) 충남 강경교회(침례교) 목사. 9월28일 공산군이 납치하여 금강 강변에서 총살.
林鍾憲(임종헌·44) 전북 고창읍교회 목사. 10월25일 고창읍내에서 피살. 「한국기독교회사」에는 9월28일 오후 2시 고창읍 뒷산에서 총살로 기록.
全仁善(전인선) 서울 남창동교회(장로교) 목사.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
鄭仁泰(정인태·34) 전남 무안군 몽탄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에게 교회당을 빼앗기고 고향인 함평으로 내려갔다가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10월24일 죽창에 찔려 피살. 그의 아버지 정재련(전도사)도 같은 해 12월6일 함평에서 공산군에게 피살.
趙興植(조흥식·37)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장로교 전도사이며 8월21일 빨치산에게 붙들려 간 후 팔치골에서 피살」. 한편 「피납치자명부」에는 목사로 기록되어 있고 「10월20일 전북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에서 납북」.
崔感恩(최감은·46) 위의 유동희 목사와 같은 경우이다. 「피살자명부」의 제주도 편에 등재되어 있는데 10월12일 평양 동창리 63번지 자택에서 피살되었다. 어떤 경위로 평양에서 피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崔明吉(최명길·44) 전남 목포 연동교회(장로교) 목사. 8월 초순 목포 건너편 둥근섬에서 예배를 보기 위해 교인 20여 명과 배를 기다리던 중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영암군 삼호분주소로 연행되어 그곳에서 심한 매를 맞고 피살.
黃德柱(황덕주 또는 德周·47) 공주형무소 형목. 감리교 목사. 8월20일 강원도 원주 내무서에서 피살.
[소속, 납북 일자 또는 장소가 확실치 않은 목사]
金仁善(김인선) 장로교 목사. 서울에서 목사로 재직하던 중 피살.
劉鍾鶴(유종학·63) 명동교회(감리교) 목사. 공산군이 납치 살해하였다.
이종도 제주도 제1대 목사.
임인재 전남 해제 중앙교회 목사.
전병무 경북과 울릉도에서 활동한 목사.
[신부(24)]
미사 집전 중 납치, 피살
◇ 한국인(7)
姜晩秀(강만수·27) 세례명 요셉. 대전교구 洪城(홍성) 주임. 7월에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8월11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대전 감옥에 수감 중 9월26일 피살.
朴昌大(박창대·62) 8월18일 강원도 마지기 광산에서 피살.
徐起昌(서기창·62) 세례명 프란치스코. 서울교구 황해도 송화본당 주임. 10월6일 연행되어 10월13일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10월16일 피살 기록.
劉載玉(유재옥·53) 세례명 프란치스코. 서울대교구 겸이포 주임. 6월24일 밤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납치되어 海州(해주) 형무소에 수감된 후 10월5일 동해주 백사장에 생매장당했다.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6월 중 서울 종로구에서 납치된 것으로 기록.
李光在(이광재·42) 세례명 디모테오. 춘천교구 양양 주임. 6월24일 연행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0월9일 피살.
李顯鍾(이현종·29) 서울대교구 신부. 세례명 야고보. 7월3일 서울 도림동 천주교회 본당 사제관에서 피살.
全德杓(전덕표·31) 세례명 안드레아. 서울교구 황해도 사리원본당 보좌신부. 10월13일 연행되어 10월16일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구)에는 10월12일 미사를 접전하던 중 정치보위부원에게 납치되어 며칠 후 사리원 성당에서 1km 정도 떨어진 정치보위부 방공호에서 피살.
수도원에서 피살
◇ 외국인(17)
듸포리(48) 천안 천주교회 신부(프랑스인). 9월25일 충남 천안군 성황동에서 피살.
안토니 코리아 주교(프랑스인) 7월30일 춘천시 소양동에서 피살.
吳必道(오필도·56) 프랑스 신부. 8월16일 온양 천주교당에서 피살.
요셉 모리말(J.Molimard, 牟·49 또는 51)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부여 주임. 9월25일 대전형무소에서 피살.
A.Collier(高) 아일랜드 신부. 춘천교구 소양로 본당 주임. 6월27일 피살.
Brennan, Patrick(패트릭 브렌난, 安·50) 세례명은 파트리치오. 미국 몬시뇰 골롬반회 소속 한국 선교사. 광주 지목구장. 8월 연행되어 대전에서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7월24일 목포 본당 주임신부 쿠삭, 보좌신부 오브라이언과 함께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대전 목동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피살.
Cordess, Marius(마리우스 코르데스, 孔·42)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당진 주임. 8월14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Desideratus Polly(폴리, 沈應榮)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천안 주임. 8월23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J.Colin(高)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서산 주임. 7월10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J.Molimard(牟)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부여 주임신부. 8월20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J.O’brian(오브라이언, 吳) 아일랜드 신부. 광주교구 목포 주임. 8월 대전에서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7월24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대전 목동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피살.
Maginn, James(제임스 매긴, 陳·40) 세례명 야고보.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춘천교구 삼척 주임. 7월4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7일 삼척읍 紫芝里(자지리)에서 피살.
P.Leleu(를뢰, 盧) 아일랜드 신부. 대전교구 온양 주임. 8월3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P.Perrin(페렝, 白文弼)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합덕 주임. 8월14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P.Reiller(羅) 아일랜드 신부. 춘천교구 묵호 주임. 7월12일 연행되어 7월 말 피살.
Robert Richard(리샤르·李)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예산 주임. 8월3일 연행되어 9월23일 이후 피살.
T.Cusak(高) 아일랜드 신부. 광주교구 목포 주임. 8월 대전에서 피살.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7월24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대전 목동의 프란치스코 수도원에서 피살.
[수녀(5)]
수녀원 원장도 피살
김정숙 세례명 마리안나. 샬트르 성 바오로회. 10월15일 연행되어 10월17일 피살.
김정자 세례명 안젤라. 샬트르 성 바오로회. 10월15일 연행되어 10월17일 피살.
朴(박) 세례명 루시아. 성 베네딕도 수녀회. 9월25일 연행되어 10월11일 피살. 차기진의 연구에 의하면 원산에서 9월24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10월8일경에 피살.
張(장) 세례명 아가다. 성 베네딕도 수녀회. 6월24일 연행되어 10월14일 피살.
M.Beatrix 프랑스 수녀. 샬트르 수녀회 원장. 7월15일 연행되어 11월3일 피살.
[성공회(5)]
두 아들과 며느리도 처형
◇ 한국인(2)
尹達鏞(윤달용·61) 세례명 모세. 성공회 서울대성전 관할 사제 겸 한국성공회 총감사제. 7월18일 저녁 무렵 서울 중구 정동 3번지 대한성공회 구내에서 세실 쿠퍼 주교와 함께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연행되어 소식이 끊어졌다. 「한국가톨릭대사전」, 「대한성공회 백년사」에는 순교.
趙鏞昊(조용호·53) 세례명 디모데. 성공회 인천교회 신부. 7월24일 저녁 11시경 인천시 송학동 3가 4번지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5명에게 연행되어 인천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8월1일 서울 정치보위부로 이송된 후 소식 두절.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7월7일 인천에서 납북.
◇ 외국인(3)
Albertm, W(이도암 李道岩) 영국인 신부. 7월18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북한 각지로 끌려 다니는 「죽음의 행진」 중에 행방불명.
Mary Clare(마리아 클라라·71) 아일랜드인 수녀. 聖架(성가)수녀회 초대원장. 7월18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 중에 11월6일 중강진에서 사망.
Charles Hunt(헌트·홍갈로) 신부. 한국성공회 총감사제. 7월18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죽음의 행진」 중에 11월20일 해창리에서 사망.
※「대한성공회 백년사」(1990)에 클라라 수녀는 7월31일, 헌트 신부는 7월3일, 이도암 신부는 7월25일에 각각 공산군에게 체포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구세군(2)]
姜基模(강기모·24) 구세군 참위. 9월26일 북한군에 붙잡혀 충남 예산군 손지리 뒷산에서 피살.
盧永守(노영수·46) 구세군 고등참령으로 9월5일 지리산 기슭에서 총살당했다. 그는 세계 구세군 100년 사상 첫 순교자로 기록되었다(「기독교대백과사전」, 「실록 한국기독교 100년」). 한편 「피납치자명부」에는 9월22일 경남 함양군 개평리에서 납북으로 되어 있다.
[전도사(24)]
高永昊(고영호·27) 전북 익산군 낭산면 호암리 낭산교회 전도사. 9월29일 낭산면 방공호에서 피살.
金奎興(김규흥·59) 전도사. 9월14일 인천경찰서에서 피살.
金鳳河(김봉하·33) 충남 문산교회 전도사. 「피살자명부」에 7월31일 대전형무소에서 피살로 되어 있는 金鳳洞(김봉동)과 같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피납치자명부」에는 7월23일 충남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에서 납북.
羅玉梅(나옥매·50) 전남 영암군 상월교회 전도사.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4년 5개월간 목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9월27일경 광주 양림교회 목사인 사위 朴錫鉉(박석현)과 딸 김귀남, 외손자 박원택 그리고 다른 교역자와 함께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에서 피살.
文俊卿(문준경·59) 전남 신안군 임자성결교회 전도사. 10월7일 전남 신안군 후증도 중동리 백사장에서 피살.
朴惠源(박혜원·37) 전도사. 8월13일 춘천형무소에서 피살.
吳秉吉(오병길·54) 전북 부안군 백산면 평교교회 전도사. 9월9일 공음면 내무서 뒤뜰에서 피살. 이튿날 같은 장소에서 두 아들과 며느리도 처형당했다. 이때 집사 김영해 등 덕암교회 교인 22명이 집단 피살.
李光年(이광년·34) 전북 고창군 대산면 사거리교회(장로교) 전도사. 10월16일 공산군에 체포되어 피살. 「한국기독교회사」에는 고창군 공음면 덕암교회 전도사로 기록.
李德奉(이덕봉·51) 충남 금산군 수영리교회(장로교) 전도사. 9월22일 금산 비름고개에서 피살.
李馬太(이마태·31) 전북 정읍군 영원면 영성교회(장로교) 전도사. 9월25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27일 피살.
鄭在鍊(정재련·64) 전남 함평 구봉교회(장로교) 전도사. 12월6일 함평에서 공비들에게 피살. 피살된 전남 무안군 몽탄교회 목사 鄭仁泰(정인태)의 아버지.
趙龍擇(조용택·48) 전남 곡성군 옥과교회(장로교) 전도사. 전남 화순군 화학산에 피신하다가 9월29일 퇴각하는 공산군에게 피살.
朱三植(주삼식·54) 전남 무안군 삼향면 옥암리교회(장로교) 전도사. 7월30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혹심한 고문에 시달리다가 마을 뒷산에서 피살.
池漢永(지한영·41) 전남 여천군 율촌면 장천교회 전도사. 9월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피살.
[소속, 납북 일자 또는 장소가 확실치 않은 전도사]
김대업 전남 해제 중앙교회 전도사.
金仁奉(김인봉·37) 전남 영암군 순회 전도사. 공산군에게 붙잡혀 피살. 장인은 피살된 장로 박병근.
김인재 전남 광주 선교부 전도사.
魯洪均(노홍균) 전남 영암군 서호교회, 매월교회 전도사.
朴淳信(박순신) 서울 영등포 목동교회 전도사. 공산군 패잔병에게 발각되어 피살.
申德哲(신덕철·4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전도사.
신복균 전남 강진군 해남읍교회 전도사.
오교남 전남 진도 벽파교회 전도사.
鄭連行(정연행·62) 전남 옥구군 혜성교회 전도사.
조상학 경남 하동군 하동읍교회 전도사.
[장로(33)]
전세 불리해지자 학살
姜聲振(강성진·59) 전북 만경교회 장로. 9·28 수복 때 후퇴하던 공산군에 의해 목사 김종한 등 교인 15명과 함께 피살.
金桂洙(김계수·51) 전남 목포 연동교회 장로. 8월 초순 최명길 목사와 함께 체포되어 피살.
金東欽(김동흠·33)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시무 장로. 10월6일 밤 공비에게 붙들려 월출산 기슭에서 피살.
金斗炳(김두병·45) 전주 중앙교회 장로. 전주 광장에서 열린 인민재판에서 심한 구타를 당했으며 9월27일 전매국 창고에서 피살. 한편 정부의 「피살자명부」에는 이름이 金斗煥(김두환)으로 되어 있다.
金相天(김상천·54) 전북 완주군 봉동면 제내리교회 장로. 전세가 불리하자 공산군이 소방서 창고에 우익청년을 포함하여 50여 명을 감금하였다가 9월27일 집단 살해.
金容善(김용선·45) 전남 담양읍교회 장로. 10월5일 담양읍 남산 기슭에서 공비들에게 피살.
金應洛(김응락·45) 서울 영락교회 장로. 9월 영락교회에서 피살.
金在俊(김재준·49) 충남 금성군 금성면 상가리교회 장로. 8월22일 금성면 화림리 구주바위 골짜기에서 장로 김희식과 함께 피살.
金正鉀(김정갑·42) 「피살자명부」에는 金匹鉀(김필갑)이라는 장로가 8월23일 피살로 되어 있고, 「납북자명부」에는 金正鉀(김정갑)이 8월5일 전북 부안군 상서면에서 납북으로 되어 있다.
金鍾五(김종오·33) 「피살자명부」에는 8월12일 대전형무소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9월7일 납북.
金平國(김평국·71) 전남 영광군 묘량교회 장로. 9월18일 묘량교회 뜰에서 인민재판을 받고 가족 8명과 같은 교회 신도 김윤환의 가족 18명이 집단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金平局(김평국)이 9월10일 묘량면 신천리에서 피살로 기록.
金顯慶(김현경·44) 전북 완주군 봉동면 제내리교회 장로. 9월27일 같은 교회 장로 김상천과 함께 9월27일 소방서 창고에서 피살.
金揮男(김휘남·33) 전북 임실군 관촌면 관촌장로교회 장로. 8월25일 관촌면 광장에서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金體男(김체남)이 7월27일 관촌면 사선대에서 피살.
金熺植(김희식) 충남 금산군 군복면 외부리교회 장로. 8월22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금성면 화림리 구주바위 골짜기에서 장로 김재준과 함께 피살.
朴炳根(박병근·59) 전남 함평군 나산교회 장로. 8월5일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었는데 공산군이 후퇴할 때 함평읍내 향교리 뒷산 중턱에서 피살. 광주 숭일중학교 5학년이었던 둘째 아들 金圭(금규)도 공산당에게 총살당했고 전도사였던 사위 金仁奉(김인봉)도 9·28 수복 후 도피하던 공산군에게 붙잡혀 피살.
白南哲(백남철·53)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장로. 「피살자명부」에는 9월26일 부여군 홍산면 남촌리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8월18일 납북.
邊榮守(변영수·39) 충남 부여군 황등교회 장로. 8월13일 논산군 성동면에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이재규 목사, 안인호 집사와 함께 피살.
柴美錫(시미석·44) 전북 고창군 고창읍교회 장로. 9월29일 공산군이 사형장으로 사용했던 고창읍 뒷산에서 피살.
李德奉(이덕봉·49) 전북 금산군 복수면 수영리교회 장로. 8월20일 금산 내무서에서 피살. 「한국기독교회사」(김수진)에는 8월22일 금산내무서원에게 끌려가 9월22일 피살.
李判一(이판일·53) 전남 신안군 임자도 진리교회(성결교) 장로. 10월5일 후퇴하는 공산군에게 붙잡혀 어머니와 차남, 아우 등 가족 13명이 교인 43여 명과 함께 모래사장에 생매장당했다.
鄭基奉(정기봉·34) 전북 김제군 봉남면 대송리 대송교회 장로. 9월27일 김제군 봉남면에서 피살. 「한국기독교회사」(김수진)에는 鄭奇奉(정기봉)으로 되어 있다.
鄭在浩(정재호·51) 「피살자명부」에는 8월17일 대전형무소에서 피살, 「피납치자명부」에는 8월13일 납북.
趙景宜(조경의·61) 서울 동막교회 장로. 8월4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 옥사.
趙鏞錫(조용석·54) 경남 함안 사촌교회 장로. 9월17일 함안군 군북면에서 피살.
崔秉浩(최병호·77) 전남 신안군, 해남군, 장흥군 등지 교회에서 시무. 7월30일 전남 완도 관산리(조약도) 해변에서 우익진영 청년 7명과 함께 피살.
洪在棋(홍재기·76) 전북 정읍군 정읍제일교회 장로, 변호사. 9월27일 정읍경찰서 유치장에서 피살.
黃道文(황도문·55)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교회(감리교) 장로. 9월30일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개성에서 피살.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10월3일 선두리교회에서 납북.
[소속, 피살 일자 또는 장소가 확실치 않은 장로]
金柳讚(김유찬·58) 경남 고성군 영오면 오서리에서 피살.
金鍾大(김종대·53) 전북 옥구군 미평 신관리교회 장로.
심은양 경북 육통교회 장로.
장석팔 충남 예산 웅봉교회 장로.
최치한 충북 영동읍교회 장로.
許詳(허상)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염산교회(장로교) 장로. 제방공사 수문턱 위에서 피살.
[신학생(2)]
高光奎(고광규) 세례명 베드로. 광주교구. 9월 전주에서 피살.
全基洙(전기수) 세례명 그레고리오. 광주교구. 9월 전주에서 피살.
[집사 ·기타(41)]
영광에서 일가족 18명 피살
金永解(김영해·52) 전북 고창군 공음면 덕암교회 집사. 9월23일 가작동 뒷산에서 신도 22명과 집단 피살.
金容俊(김용준·33) 전북 전주 중앙교회 집사. 「한국기독교회사」(김수진)에는 피살로 기록되어 있으나 「피납치자명부」에는 9월8일 전북 완주군 이서면 단교리에서 납북.
金元培(김원배·39)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10월4일 월출산 아래 남풍리 저수지에서 피살.
金允子(김윤자·37)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영암군 부인회장. 10월30일 서남리에서 피살.
金允喆(김윤철·24) 전북 김제군 금산면 금산교회 주일학교 교사. 8월25일 정읍시 감곡면에서 피살.
金允煥(김윤환·27) 전남 영광군 묘량교회. 「한국기독교회사」에는 9월18일 묘량교회 뜰 안에서 인민재판을 받고 가족 18명과 집단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金潤煥(김윤환)이 9월10일 운당리에서 피살.
金昌化(김창화·35) 서울 영락교회 집사. 8월4일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뒷산에서 피살.
盧炳在(노병재) 전남 영광군 염산면 봉남리 염산교회(장로교) 집사. 제방공사 수문턱 위에서 같은 교회 장로 허상과 가족 13명이 피살.
盧龍植(노용식)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피살자명부」에는 魯用植(노용식·53)이 10월5일 영암군 군서면 도장리에서 피살.
朴鍾海(박종해·38) 전남 진도읍교회(장로교) 집사. 피살된 목사 김수현의 아들을 피신시키려고 애쓰다가 공산군에게 피살.
徐鳳九(서봉구·22) 천주교회 급사. 7월3일 도림동 천주교회에서 피살.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
宋光植(송광식·40) 전북 익산군 망성면 무형교회(장로교) 집사.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이리 내무서에 수감되었다가 8월15일 인민재판에 회부되어 피살. 「피살자명부」에는 宋廣植(송광식·39)이 7월28일 익산시 함열읍에서 피살.
宋炳德(송병덕·45) 전북 완주군 봉동읍 서두교회(장로교) 집사.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봉동면 소방서 창고에 감금되었다가 9월27일 교인들과 집단 피살.
李仁錫(이인석·39) 강원도 정선군 북면 여량성결교회 영수. 8월6일(또는 8월1일) 북면 분주소원에게 납치되어 춘천에서 피살.
崔泳旭(최영욱·60) 기독교인. 광주 제중병원장. 美 군정 시기에 한국인 초대 전라남도 지사를 역임하였고 1947년 「호남신문」 사장으로 언론계에도 종사하였다.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광주교도소에 투옥되었다가 총살당하였다.
池漢永(지한영·41) 전남 여천군 돌산면 군내교회 집사. 9월28일 미평공동묘지에서 조상학, 손양원 목사 등과 함께 피살.
피살 일자 및 장소가 확실치 않은 집사]
고웅두 충남 오량교회 집사.
金東信(김동신)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김두환 경북 기계제일교회 집사.
김춘동(61) 전남 영광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문봉순(43) 전남 영암군 천해교회 집사.
박상문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朴仁在(박인재)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안수집사.
박일규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방후용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서상철 충북 청산교회 영수.
서석근(52)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申相翊(신상익·44) 전북 이리 제일교회 집사. 광주형무소에서 피살.
심만길 경북 육통교회 집사.
안인호 충남 부여군 황등교회 집사.
오죽현(77) 전남 영암군 천해교회 집사.
윤성전(7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윤임례 전북 정읍 두암교회 집사.
李一(이일·45)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이민우 충남 부여군 홍산교회 집사.
임유삼(6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任子壬(임자임·45) 전남 영암군 학산면 매월리교회 집사.
鄭壽一(정수일) 충남 논산 병촌교회 집사. 같은 교회 교인 65명과 함께 피살.
조인심(60) 전남 영암군 학산면 상월리교회 집사.
채수원 전남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영암읍교회 집사.
한창교 경남 거창군 덕산교회 집사.
납북 종교인들
납북된 교직자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수는 개신교 목사 74명, 가톨릭 신부가 26명이었고, 장로 5명을 비롯하여 많은 교인들이 납북되었다. 납북된 주요 교직자 가운데는 종교계의 중요 인사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목사(77)]
새문안교회 金英珠 목사의 운명
具滋玉(구자옥) YMCA 총무 역임. 광복 후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 총무로 당선되었다가 정부 수립 후 경기도 지사 역임. 서울 종로구 누하동 187번지 자택에서 납북되어 백암산 줄기를 타고 끌려가다가 龍淵(용연)에서 약 20리 떨어진 산 속에서 숨을 거두었다.
權泰羲(권태희·45) 경북 출신으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문교사회위원장 피선. 납북된 후 1956년 7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발기인 겸 중앙위원으로 동원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인민경제대학에 재학 중이었는데 10월까지는 평양에 거주.
奇世福(기세복) 6·25 전쟁 중에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金庚鍾(김경종·56) 서울 후암동교회(장로교) 목사. 공산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인 6월28일 오전 7시 서울 용산과 삼각지 사이 노상에서 인민군에 납치되어 아오지 탄광에서 강제노역 중이라는 사실을 원산에 살던 이 아무개 장로가 가족들에게 알려주었다.
金東哲(김동철·52) 서울 서소문교회(감리교) 목사. 7월23일 서울 서대문구 서소문동 75번지 자택에서 공산당원에게 연행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金斗錫(김두석·61) 파주 봉일천교회(장로교) 목사. 9월18일 오후 9시경 서울 용산구 동자동 153번지 자택에서 민청원 3명에게 연행되어 동자동 내무서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金峠(김상·61) 종군목사. 9월12일 서울 서대문구 의주동 자택에서 납북.
金尙七(김상칠·53) 제7안식일교회 총무(목사). 7월27일 오후 5시경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590-9번지 자택 앞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동대문 내무서에 4일 동안 억류된 후 국립도서관에 있던 정치보위부로 옮겨졌다가 납북.
金聖元(김성원·68) 장로교 목사. 9월25일 전남 완주군 동상면에서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金誠源(김성원·78)이 완주군 일대에서 교역하던 중 납북.
金英珠(김영주·57) 서울 새문안교회(장로교) 목사. 함북 명천 출신으로 한때 총회의 정죄를 받았던 자유주의 신학의 목사. 광복 후에는 새문안교회를 개방하여 교파 통일을 위한 장로·감리교의 협의회와 초교파 기독청년운동의 진행을 위한 광장으로도 제공했다. 8월23일 오전 9시경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43 자택에서 연행되어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납북.
金元圭(김원규·49) 개성 감화원(소년원) 원장. 감리교 목사. 1946년부터 개성지방 감리사로 시무. 경기 개성시 관훈동 604-2. 7월6일 11시경 개성에 있는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납북. 1951년 5월 熙川(희천)까지 끌려갔을 때에는 다리를 삐어 굴신을 못 하는 상태였다.
金裕淳(김유순·69) 기독교 대한감리회 제9대 총리원 전도국 감독. 서울 북아현교회(감리교) 목사. 8월23일 오전 8시50분경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의 140 자택에 기독교민주동맹 이사장 金旭(김욱) 명의의 회의 소집장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자동차로 연행 납북.
내무서원에 연행된 후 납북
金有淵(김유연·50) 서울신학대학 교수. 서울 신공덕동 성결교회 목사. 성결교단 잡지 「活天(활천)」 주무. 한국기독교연합회 기관지 「기독공보」 주필. 1923년 6월부터 1930년까지는 동아일보 京西(경서)지국을 경영한 일도 있었다. 1945년 9월부터 신공덕동 교회(現 신덕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임 중이었다. 8월10일경 서울 마포구 공덕동 111-10호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이건, 최석모, 박현명, 박유연 목사 등과 함께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납북.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 김성호 목사의 아버지.
金熙雲(김희운·38) 서울 중앙교회(감리교) 목사. 8월23일 오후 3시경 시내 노상에서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연행되어 정치보위부 지하실에 서울 지방의 목사 여러 명과 함께 감금되었다가 납북.
南宮爀(남궁혁·69) 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교수. 대한기독교연합회 총무. 8월24일 오후 11시경 경기도 독도 중곡리에서 정치보위부 고급간부 朴允模(박윤모), 崔鐸(최탁)에게 연행 납북된 후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朴萬春(박만춘·42) 대한 감리회총리원 전도국 총무. 감리교 목사. 6·25 전쟁 후 총리원을 지키기 위해 서울에 남아 있던 총리원 감독 김유순 목사 등과 함께 납북.
朴相建(박상건·54) 서대문형무소(장로교) 목사. 정부가 6·25 전쟁 직후에 조사한 피살자 명부에는 서대문형무소에서 피살로 기록되어 있으나 북한으로 끌려갔던 것이 확실하다. 7월13일 오전 11시경 서울 한강로 1가 183번지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6월28일 새벽 공산군에 의해 납북 기록.
朴璇齊(박선제·67) 경동교회(감리교) 목사. 태평양 무역(주), 국제 손해보험(주) 사장 역임. 공산군이 납북.
朴炫明(박현명·48) 성결교회 목사, 서울신학교 교수. 광복 후 교회와 신학교 재건에 앞장 서 1946년 재건총회 초대 총회장에 선출되어 3년간 시무. 8월23일 오후 3시경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김유순, 이건, 최석모, 박형규 목사 등 성결교회 지도급 목사들과 함께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 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8월10일 납북 기록.
朴亨圭(박형규·51) 성결교회 목사, 서울신학대학교 사감. 8월23일 오후 3시경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김유연, 박현명, 이건 목사 등과 함께 8월10일 납북 기록.
方薰(방훈·58) 자교교회 목사. 감리교 총리원 이사. 8월23일 창성동에서 납북되어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白學信(백학신·52) 강화읍교회(감리교) 목사. 9월26일 밤 12시경 강화읍 신문리 549번지 자택에서 민청원 12명에게 연행 납북.
徐斗成(서두성·30) 경기도 용인군 외사면 백암교회(성결교) 목사. 백암중학교 교장. 7월28일 10시경 경기도 용인군 백암교회에서 보안서원 2명에게 연행되어 용인 보안서를 거쳐 수원 내무서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徐太源(서태원·46) 서울 정동교회(감리교) 목사. 협성감리교 신학교 교수. 8월23일 오후 3시경 기독교민주당원에게 연행 납북.
宋昌根(송창근·53) 한국신학대학장. 8월23일 오전 7시경 서울 중구 도동 자택에 보안대원이 와서 지프차로 연행.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북한으로 이송되었다는 사실을 함께 납북되었다가 탈출한 사람이 가족에게 알려주었다.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다. 한편 조철의 「죽음의 세월, 납북인사들의 생활실태」에는 1951년 7월 하순경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평양 근처의 대동군 문성리에 있는 산 아래 농가에 수용되었다가 사망으로 되어 있다.
宋台用(송태용·43) 서울 초동교회 목사. 1934년 성결교회 기관지 「활천」의 편집을 맡았으며 1935년 1월 창간된 「성화」의 편집 주임으로 창간에 참여. 8월27일 서울 중구 주교동 자택에서 납북.
沈明燮(심명섭·50) 감리교 목사. 대한기독교교육협회 협동총무. 8월23일 오후 9시경 서울 종로구 삼청동 35-100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3명이 와병 중인 상태에서 연행 납북.
安吉善(안길선·60) 서울 신당동 중앙교회 목사. 8월24일 오전 10시경 서울 성동구 신당동 333-80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에게 연행된 후 납북.
梁柱三(양주삼·73) 적십자사 총재, 감리교 목사. 8월23일 기독교연맹 이사장 金旭(김욱) 명의의 소집통지서를 가지고 와서 서울 서소문교회 목사 김동철과 함께 납북.
吳澤寬(오택관·63) 장로교 목사. 제헌국회의원으로 한국독립당 옹진군당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로 독립운동가, 정치인. 9월2일 저녁, 서울 종로구 혜화동 22-76 자택에서 민청원에게 연행되어 정치보위부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문공부 장관, 동아일보 사장, 기독교방송 이사장을 지낸 오재경이 장남이다.
兪世根(유세근·41) 대한성결교회 서울시 독립문교회 목사. 8월23일 오후 4시경 서울 독립문 성결교회에서 수요예배를 인도하고 교회당을 나오다가 정치보위부원 2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8월10일 경성신학교 교수들과 함께 납북.
劉在獻(유재헌·46) 장로교 목사. 임마누엘수도원 부흥사. 8월15일 서울 서대문구 구기동 223 기독교 사업체인 修禱園(수도원)에서 정치보위부원이 연행 납북.
柳禎喆(유정철·46) 기독교 장로회 신남포교회(장로교) 목사. 8월21일 오후 10시경 중구 장충동 2가 162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시무 중이던 신남포교회에서 6월23일 정치보위부에 체포되어 평양감옥에 감금되었다가 공산군에 피살.
尹聖浩(윤성호·32) 장사동교회(감리교) 목사. 9월19일 오후 3시경 서울 용산구 갈월동에서 내무서원 수명에게 트럭에 실려 연행된 후 소식 두절.
특별회의 소집 후 납치
李鍵(이건·53) 서울신학교 교수. 성서학원장. 8월23일 오전 9시경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5번지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에서 기독교민주동맹원 3명에게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김유연, 박현명 목사와 함께 8월10일 납북.
全用燮(전용섭·33) 충북 청안교회(장로교) 목사. 9월17일 12시경 청주시 문화동 수도국 밑에서 후퇴하던 북한군이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9월26일 공산군 패잔병에게 체포되어 우암산에서 피살.
全珍珪(전진규·56) 서울 성동교회(現 보문교회) 목사. 대한감리회 전도국장. 서울 동지방 감리사. 연희대학교 재단이사, 전국주일학교연합회 회장, 기독교연합회 간사. 8월23일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318-16 자택에서 납북.
田斅培(전효배·65) 서울 금호동교회(감리교) 목사. 서울 동지방 감리사. 8월23일 밤 12시경 신원을 알 수 없는 2명이 마포구 아현동 산 11 자택에서 연행하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하였다가 납북.
鄭達雄(정달웅·35) 서울 청파동 감리교회 목사. 8월3일 새벽 5시경 서울 용산구 청파동 감리교회 사택에 내무서원 3명이 와서 특별회의가 있다면서 연행 납북.
鄭致鎬(정치호·33) 서울 미암교회 목사. 8월13일 새벽 2시경 서울 돈암동 산 11번지 미암교회 사택에서 정치보위부원에게 2명에게 연행되어 돈암동의 안재홍(국회의원, 한성일보 사장, 납북) 집에 있는 방공호에 감금된 후 면회, 의복 및 식사 차입 등이 일절 거절당한 채 심야에 납북.
曺相文(조상문·53) 서울 북아현교회 목사. 8월23일 오전 8시경 서울 마포구 북아현동 9-1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3명에게 연행되어 국립도서관에 있던 정치보위부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연행 납북.
趙相學(조상학·74) 전남 여천 덕양교회(장로교) 목사. 9월27일 전남 여천군 소라면 덕양리에서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여수 내무서원이 연행하여 손양원 목사와 9월28일 美坪(미평) 공동묘지에서 살해.
曺喜哲(조희철·50) 서울 신암교회 목사. 7월23일 오전 노상에서 인민위원이 연행 납북.
강계에서 발진티푸스로 사망
朱在明(주재명·32) 장로교회 목사, 8월3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175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마포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납북되어 12월에 강계까지 끌려가던 중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
朱埰元(주채원·46) 마포형무소 형목. 서울 향화동교회(장로교) 목사. 7월27일 오후 10시경 서울 마포구 아현동 468-2 자택에서 마포 내무서원 2명이 연행하여 정치보위부에 감금한 후 납북.
陳學哲(진학철·54) 장로교 목사. 7월5일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황해도지역에서 목회활동을 하다 공산군에게 피랍으로 기록.
車敬昌(차경창·51) 서울 수표교회(감리교) 목사. 6월 하순경 남하 도중에 경기 수원(또는 오산) 부근에서 내무서원이 연행 납북. 몇 년 후 월남한 어떤 여자 교인이 북한 어느 곳에 수용되어 있다는 소문을 들려주었다.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6월28일 외출하였다가 공산군에게 납북.
崔相殷(최상은·45) 서울 응암동교회(장로교) 목사. 함남도청 사무국장. 8월11일 오후 7시경 서울 종로구 원남동 147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연행 납북.
崔相鉉(최상현·61) 기독교회신학교 교수·목사. 美군정청 군정장관 고문. 8월25일 오후 9시경 서울 성북구 돈암동 482-58 자택에서 인민군 2명이 연행.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된 사실을 들었으나 그 후 소식 두절.
崔錫模(최석모·61)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1949년 기독교 대한성결교회 총회장 피선. 8월23일 오후 3시경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1-379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2명이 연행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이건, 김유연, 박현명 등 성결교회 지도급 목사들과 함께 8월10일 납북.
崔元初(최원초·45) 장로회 목사. 8월23일 새벽 1시경 서울 중구 장충동 2가 162번지 자택에서 정치보위부원 3명에게 연행 납북. 신안주 방면으로 끌려간 것을 목격한 사람이 있었다.
崔宗默(최종묵·54) 서울 궁정동교회(감리교) 목사. 7월 공산군 정치보위부원에 의해 납북
崔泰龍(최태용·53) 대한복음교회 목사. 국민훈련원 원장. 정부의 농민회(現 농협) 부회장.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친구 柳錫東(유석동)의 집에 은신 중이었는데 9월6일 오후 10시30분경 정치보위부원 3명이 가택을 수사하여 최태용과 유석동 등 3명을 연행하였다가 이튿날 두 사람은 석방하였으나 최태용은 목사라 하여 국립도서관 정치보위부에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감금하였다가 납북. 「기독교대백과사전」에는 9월11일 공산군에게 체포된 후 피살.
許殷(허은·37) 서울 해방동교회 목사. 7월25일 12시경 서울 중구 회현동 일출아파트 자택에서 내무서원이 연행해 중부 내무서에 감금하였다가 납북.
玄碩鎭(현석진·44) 경기도 광주군 둔전리교회(장로교) 목사. 7월14일 새벽 4시경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전리교회 사택에 같은 마을 내무서원 4명이 친미파이며 미국의 연락자, 국군에게 식사를 대접했다는 등의 이유로 같은 교회의 장로 金德男(김덕남)과 함께 연행 납북.
[소속 및 납북 일자와 장소가 확실치 않은 목사]
金鳳圭(김봉규) 강원도 철원교회(성결교) 목사.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행방불명.
金相俊(김상준·25) 청풍감리교회 목사. 충북 단양군 홍성읍에서 납북.
金晟植(김성식·43) 경기 화성군 마도면 (같은 이름의 김성식 목사가 2명 더 있는데 나이와 주소가 달라 동일인인지 알 수 없다. 金晟植(58) 주소 경기 시흥군 중정 안양리. 피랍 장소 개성시: 金晟植(67) 주소 서울, 수원교회 목사).
金裕海(김유해) 강원도 지석교회(감리교) 목사.
金長輝(김장휘·60) 7월20일경 서울 을지로 노상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된 후 정치보위부를 거쳐 서대문형무소에 감금되었다가 납북.
金鍾萬(김종만·59) 감리교 신학교 교수. 체부동교회 목사.
金珍珪(김진규·54) 목사. 서울.
金哲星(김철성) 서울 성동구 신당동에서 납북.
金泰周(김태주·63) 8월13일 10시경 서울 성북구 성북동 168-4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성북 내무서에 1주일간 감금되었다가 정치보위부로 이송된 후 납북.
都柄日(도병일·37) 9월2일 충남 예산군 삽교면 석리에서 납북.
朴成萬(박성만·31) 7월18일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서 납북.
申基俊(신기준·47) 서울 서대문구 행촌동 자택에서 납북.
劉載報(유재보·53)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납북.
李成萬(이성만·31)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서 납북.
張基衡(장기형·50) 7월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 자택에서 납북.
張德檀(장덕단·68) 서울 중구 회현동. 효자동교회 목사 .
全有淵(전유연·48) 8월23일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자택에서 납북.
陳令鐘(진령종·49) 7월5일 서울 뚝섬 자택에서 납북 .
崔明殷(최명은·45) 서울 종로구 원남동. 8월11일 납북.
崔榮鎔(최영용·50) 8월15일 서울 시내에서 납북.
韓致明(한치명) 납북된 후 반동종교인으로 낙인 찍혀 다른 종교인들과 함께 12월에 만포진까지 끌려갔고 1951년 초부터 1954년 5월경까지 평양교화소 임시수용소에 감금되어 있었으나 1955년 이후 행방불명.
洪吉龍(홍길용·31) 전북 김제군. 7월25일 납북.
[가톨릭 신부(28)]
교황 사절 돕다가
◇ 한국인(11)
金慶旻(김경민·49) 세례명 루도비꼬. 서울교구 안악 본당 주임. 6월25일 행방불명. 공산정권의 교회 탄압에 신부들이 행방불명되자 교구장에게 보낼 유서를 작성하고 신변을 정리해 나가던 중 6월24일 오전 11시경, 종교인 회의를 구실로 찾아온 안악 정치보위부원에게 임의동행 형식으로 연행되어 간 후 행방불명.
金義漢(김의한·56) 대한기독정교회 신부. 7월23일 12시경 서울 서대문구 정동 22 대한기독정교회에서 반동분자라는 이유로 윤학기에게 연행된 후 납북.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8월7일 서소문동 자택에서 납북.
白南昌(백남창·31) 세례명 아가비도. 서울대교구 신부. 聖神(성신)중학교 교사. 9월17일 오후 11시경 취침 직전에 보안서원이 성신중학교 교장 이재현 신부와 함께 납북.
申允鐵(신윤철·45) 세례명 베드로. 서울 교구 장연(황해 은율군 장연면) 본당 주임. 6월24일 행방불명.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7월1일 서울 종로구에서 납치. 「한국가톨릭대사전」은 6월24일 밤, 장연 내무서로 강제 연행된 후 어디론가 끌려가 공산군에 의해 피살.
梁德煥(양덕환·56) 세례명 안드레아. 서울교구 황해도 재령본당 주임. 10월5일 피살.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종로구에서 납북. 「한국가톨릭대사전」은 10월5일 본당 사제관 근처에서 납치되어 행방불명으로 기록.
兪榮根(유영근·45) 세례명 요한. 일명 漢主(한주). 천주교 서울교구 본부 경리부장. 주한 교황 사절 방(方, P.Byrne) 주교가 납치 당하자 그의 식사와 침구 등을 주선하다가 7월11일 서울 중구 명동성당에서 납북. 寧邊(영변)과 溫井(온정)을 거쳐 끌려가는 동안 중태에 빠져 들것에 실려가다가 11월10일경 사망. 1956년 적십자사에 납북자를 신고할 때에 盧基南(노기남) 주교가 신고했다.
尹義炳(윤의병·62) 세례명 바오로. 서울교구 황해도 은율본당 주임. 6월24일 행방불명. 「한국가톨릭대사전」은 6월24일 새벽 2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연행되어 1개월간 수감되었다가 비밀리에 해주 방면으로 이송된 후 행방불명으로 기록.
李順成(이순성·46) 세례명 안드레아. 서울교구 황해도 신계본당 주임. 7월5일 행방불명. 「한국가톨릭대사전」은 7월5일 오전 10시경 신계읍 정치보위부원 2명에 의해 트럭에 태워져 사라진 후 행방불명으로 기록.
李汝球(이여구·54) 세례명 마티아. 서울교구 매화동 주임. 7월7일 행방불명. 정부의 「피납치자명부」는 6월 중 경기도 개성시에서 납북. 「한국가톨릭대사전」은 7월17일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납북.
李在現(이재현·42) 세례명 요셉. 서울교구 성신중학교 교장. 9월17일 오후 11시경 취침 직전에 보안서원이 성신중학교 백남창 신부와 함께 납북.
鄭鎭求(정진구·28) 세례명 마티아. 동성중학교 지도신부. 7월17일 오후 11시경 서울 용산구 원효로 4가 1번지에서 내무서원이 연행 납북. 1956년 적십자사에 납북자를 신고할 때에 노기남 주교가 신고했다. 9월17일에 행방불명되었다는 설도 있다.
교황 사절도 납북 뒤 사망
◇ 외국인(7)
Byrne, James Patrick(제임스 패트릭 번, 方溢恩·63) 미국 주교. 주한 교황 사절. 6·25 전쟁 후 외국인 성직자들을 일본으로 피란시킨 뒤 교황 사절관을 지키다가 7월11일 보좌 부드(W. Booth, 夫文化-생환) 신부와 함께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삼화빌딩에 감금되어 인민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北으로 끌려갔다. 「죽음의 행진」 중에 11월25일 하창리 수용소에서 62세의 나이로 옥사.
F. Canavan(孫) 아일랜드 신부. 춘천교구 춘천 보좌. 7월2일 연행되어 12월6일 옥사.
Gombert, Antoine(안토니오 공베르, 孔安國·76) 프랑스인. 서울 혜화동 가르멜 수녀원 지도 신부. 7월15일 납북되어 11월12일 옥사.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7월11일경 인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서 체포되어 납북, 「죽음의 행진」 중에 11월11일 옥사.
Gombert, Julien(줄리앙 공베르, 孔安世·74) 프랑스인. 인천 샬트르 성 바오르 수녀회 지도 신부. 안토니오 공베르 신부의 동생으로 7월15일 납북되어 11월13일 옥사. 「한국가톨릭대사전」은 「죽음의 행진」 중에 11월12일 옥사로 기록.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7월 7일 납북.
J.Bulteau(吳)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공세리 주임. 7월12일 연행되어 1951년 1월6일 하창리에서 옥사.
J.Cadars(카다스, 姜達淳) 프랑스 신부. 대전교구 목동 주임. 8월19일 연행되어 1951년 1월6일 하창리에서 옥사. 「한국가톨릭대사전」에는 7월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9월경 피살.
Villemot, Marie Pierre Paul(마리 피에르 폴 비에모, 禹一模·82) 1869년 6월28일 프랑스에 태어나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를 졸업한 후 1892년 3월 사제 서품을 받고 곧바로 한국선교사로 임명되어 6월18일 한국에 도착했다. 인천과 전라도 지방에서 선교사업을 벌였고 1898년에 서울로 와서 중림동의 약현성당과 명동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다가 1942년 고령으로 현직 사목에서 은퇴하였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지도 신부로 재임하던 중 6·25 전쟁 발발로 7월11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다른 외국인 성직자, 수도자들과 함께 서울 소공동의 삼화빌딩에 감금되어 인민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北으로 끌려갔다. 9월5일 만포를 출발하여 11월7일 중강진 부근의 하창리 수용소에 수용되는 「죽음의 행진」을 겪었다. 그러나 고령에다 행진 도중의 고초와 수난으로 그해 11월11일 하창리 수용소에서 82세의 나이로 옥사.
[소속 및 납북 일자와 장소가 확실치 않은 신부]
高一郞(고일랑·40) 8월30일 충남 서산군 서산읍 동문리에서 납북.
孔德文(공덕문·57) 9월8일 충남 당진군 당진면 읍내리에서 납북.
金軍文(김군문·43) 7월 서울에서 납북.
白文弼(백문필·66) 9월8일 충남 당진군 합덕면 운산리에서 납북.
兪榮根(유영근·49) 7월11일 납북. 주소는 서울 중구 명동.
李泌球(이필구·49) 7월 납북. 주소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
趙炳錫(조병석·34) 8월30일 납북. 주소는 충남 부여군 구룡면 논치리.
韓元勝(한원승·33) 7월 납북. 주소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 90-12.
라바트리시오(39) 7월15일 강원 강릉군 묵호읍에서 납북.
리씨(리氏·58) 미국인. 경기 인천시 인천성당 신부. 7월7일 납북.
[수녀(4)]
徐(서) 세례명 요세피나.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10월8일 행방불명.
張貞溫(장정온·45) 세례명 앙네따.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초대원장. 10월4일 행방불명.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10월10일 순천에서 납북되었으며 순천시 천주교회 수녀원장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통령과 국무총리를 지낸 정치인 張勉(장면)의 여동생. 「한국가톨릭대사전」은 전쟁 발발 후 평남 대동군 송림리 공소(영유본단 관할)에 피신해 있다가 10월4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행방불명으로 기록(차기진, 정부, 가톨릭).
마리 데레사 벨기에인. 가르멜 수녀회. 7월15일 연행되어 11월30일 옥사.
맥틸드 벨기에 수녀. 가르멜 수녀회. 7월15일 연행되어 11월18일 옥사.
[성공회(2)]
이흥식 성공회 회장(실록).
洪淳玉(홍순옥·56) 성공회 재단이사. 제헌국회의원. 의사. 7월14일 서울에서 납북(실록, 가톨릭).
[구세군(3)]
金三錫(김삼석·50) 구세군 목사(정위). 8월23일 오전 11시경 서울 종로구 신문로 1가 58 구세군 대한본영에 2명이 찾아와 기독교민주동맹의 회의가 있다면서 연행 납북.
金鎭河(김진하·52) 구세군 참위. 광복 후 북한지역인 황해도 연백군 해룡면 富士(부사)리 군영 담임으로 임명되었는데 6·25 전쟁 후 서울로 피신하였다가 9·28 수복 후에 다시 임지로 가서 1·4 후퇴 때 북한군에 의해 납북.
허버트 로드(Herbet A. Lord) 구세군 사령관.
[전도사(4)]
金陽淳(김양순·40) 전도사. 9월27일 오후 4시경 같은 마을 교인의 집에 심방 나갔다가 귀가 중에 납북. 주소는 서울시 중구 쌍림동 119.
金麟熙(김인희·43) 장로교 전도사(助師). 북한의 종교탄압을 피해 월남하여 대한예수교 장로회 태평로 재건교회를 설립했던 재건교회 지도자. 7월20일 10시경 자하문 밖에서 납북. 정부의 「피납치자명부」에는 7월25일 납북.
朴寶(박보렴·여·54) 전도사, 독립운동가. 6·25 전쟁 후 서울대 약학대학장이었던 남편 김기우와 함께 납북.
朴文熺(박문희·50) 성결교 초기 전도사, 독립운동가.
[장로(19)]
張德櫓(장덕로·68) 서울 옥인동교회 장로. 3·1 운동 후 上海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다가 광복 후 귀국하여 1949년 옥인동교회 창설.
高明宇(고명우·68) 서울 남대문교회 장로. 세브란스 의과대학 교수 겸 외과과장. 7월26일 오후 2시경 서울 용산구 원효로 3가 184 자택에서 사복청년이 납북.
金奎植(김규식·74) 서울 새문안교회 장로. YMCA 학교 교사 및 경신학교 학감, 重慶(중경) 임정 부수석. 6·25 전쟁 후 피랍되어 1950년 12월10일 만포진 부근에서 사망.
金德男(김덕남·41) 둔전리교회 장로. 7월14일 새벽 4시경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둔전리교회 사택에서 현석진 목사와 함께 같은 마을 내무서원 4명이 연행 납북.
金東元(김동원·67) 장로교 장로. 소설가 김동인의 형. 광복 후 군정청 고문을 거쳐 한민당 총무, 제헌국회 부의장 역임.
金允童(김윤동·48) 장로. 7월25일 오후 8시경 서울 마포구 만리동 세관 앞에서 보위부원 3명에게 연행되어 서대문구 당 정치보위부에 수감되었다가 열흘 뒤 구로구 서울시 정치보위부였던 국립도서관에 감금된 후 납북.
金益俊(김익준·46) 서울 마포구 신수동 신수교회 장로. 직업은 신수동회 사무소 회계사였는데 7월13일 마포구 신수동 300번지 자택에서 같은 동네 사람 2명과 함께 내무서원에게 연행되어 내무서에 감금되어 있다가 동네 사람 2명은 석방되었으나 김익준은 교회 장로이며 洞(동)청년단 부단장이라는 이유로 서대문형무소 수감된 후 납북.
金在恩(김재은·27)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 목실리성결교회 전도사. 8월7일 오후 2시경 교회에서 내무서원 3명에게 연행 납북.
林壽烈(임수열·31) 강릉 성결교회 전도사. 납북 당시의 정황은 확실히 알 수 없다. 가족들은 부산으로 피난했었고 본인만 교회를 사수하겠다며 강릉성결교회에 있다가 납북당했다.
黃國祿(황국록·40) 창신장로교회 장로. 육군본부 지정 대동장유공장 대표자로 있으면서 육군 부식 및 각종 물품을 조달했다.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 김창일외과병원에서 치질을 가장하여 입원 중이었는데 8월15일 오후 5시경 성동내무서원 2명과 인민군 수명이 찾아와 연행. 성동내무서와 정치보위부를 거쳐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9월17일경 미아리를 거쳐 의정부까지 끌려간 사실을 같이 끌려가다 탈출한 사람으로부터 들었다.
[소속및 납북 일자와 장소가 확실치 않은 장로]
강준표 서울 서강교회 장로.
權相和(권상화·68) 7월5일 오전 10시경 서울 서대문구 만리 2가 294-22 자택에서 내무서원에게 연행.
金東元(김동원·44) 감리교 장로. 9월20일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에서 납북
金斗枚(김두매·43) 8월14일 전북 전주시 고사동에서 납북.
申相厚(신상후·39) 장로교 領袖(영수). 7월4일 경기도 고양군 지도면 행주외리에서 납북.
이정진 서울 수송교회 장로.
李鍾聲(이종성·62) 8월25일 경기도 파주군 위동면 금촌리에서 납북.
李弼斌(이필빈) 서울 신암교회(장로교) 장로.
정호석 서울 서강교회 장로.
[신학생(2)]
金龍瑞(김용서·22) 장로회 신학생. 8월27일 납북. 주소는 서울 성동구 신당동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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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종교인의 봉사까지 ‘反美’ 연결해 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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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家 "한국에서 할일 다해 떠나겠다"…"반미흐름 앞에 쫒겨가는 것" 비난
2004-05-24 17:37:44
북한의 대표적 대남공작 전위대인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은 연세대 설립자이자 한국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인 언더우드(Underwood) 일가가 한국을 떠나는 것과 관련 "반미의 흐름 앞에 더는 배겨낼 수 없게 되어 쫒겨가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한민전 대변인은 지난 21일 논평을 내고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통일로 나아가는 오늘 이 땅에는 언더우드뿐아니라 그 어떤 외세도 남아있을 자리가 없다"며 "언더우드 4세의 귀환은 그들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발표후 우리 민중의 반미자주기운이 급격히 높아지고 숭미굴종의식이 무너져내린 대세의 흐름 앞에 더는 배겨낼 수 없게 되어 쫒겨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변인은 또 "전 국민은 반미자주화투쟁의 불길을 더욱 세차게 지펴 올려 미군강점 60년이 되는 2005년을 이 땅에 대한 미국의 강점과 지배를 완전히 끝장내는 원년으로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입국 119년 만에 한국을 떠난다는 영국 런던 출신의 언더우드 1세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주에서 살다 1885년 선교사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광혜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언더우드 1세는 연희전문학교와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한국YMCA를 조직했다.
2세 원한경 박사와 3세 원일한 박사, 4세 원한광 한·미교육위원회 위원장에 이르기까지 언더우드가는 연희전문학교 교장직과 연세대 재단이사 등을 두루 맡으며 한국의 교육·종교·사회운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다음은 한민전 대변인 논평 전문이다.
미국선교사 언더우드 4세가 미국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두세기전에 이 땅에 기여든 언더우드일가는 이조봉건말기와 일제식민지통치시기, 미군강점하의 전 기간 「자선」과 「박애」의 간판 밑에 교묘한 방법으로 미국에 대한 환상을 조성하는 한편 교활한 정탐활동으로 미국의 대한반도침략정책을 앞장에서 충실히 집행해왔다.
언더우드일가는 4대에 걸쳐 120년동안이나 선교사의 탈을 쓰고 미국의 한반도침략의 발판을 닦아온 길잡이이고 척후병이며 이 땅에 숭미공미사상을 전파시키고 양키 문화를 퍼뜨려온 주범이다.
언더우드일가의 추악한 행적은 곧 미국의 한반도침략의 역사이며 그들이 대물림하며 우리 민족에게 지은 죄는 결코 용서될 수 없고 역사에 가장 수치스러운 기록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언더우드 4세의 귀환은 그들스스로 택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발표후 우리 민중의 반미자주기운이 급격히 높아지고 숭미굴종의식이 무너져내린 대세의 흐름 앞에 더는 배겨낼 수 없게 되어 쫒겨가는 것이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자주통일로 나아가는 오늘 이 땅에는 언더우드뿐아니라 그 어떤 외세도 남아있을 자리가 없다.
언더우드족속들이 쫒겨가게 된 것처럼 이제는 미강점군도 쫒겨갈 때가 되었다.
각계 애국민중은 가장 낡은 것인 미국의 지배와 침략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만악의 근원인 미군을 하루빨리 철수시키기 위한 투쟁에 한 사람같이 떨쳐나서야 한다.
전 국민은 반미자주화투쟁의 불길을 더욱 세차게 지펴 올려 미군강점 60년이 되는 2005년을 이 땅에 대한 미국의 강점과 지배를 완전히 끝장내는 원년으로 만들어야 한다.
미국은 우리 민중의 확고한 반미의지를 똑바로 보고 언더우드 4세뿐아니라 강점군과 전쟁장비를 걷어가지고 이 땅에서 지체없이 물러가야 할 것이다.
주체 93(2004)년 5월21일
서 울
[신혜식 기자] king@independen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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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안교회는 한겨레신문의 이수영 목사 설교 허위인용 비판과 관련, 사과문 없는 단순정정보도에 항의해 법적인 사과요구를 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8일 새문안교회는 “한겨레신문은 이수영 목사가 전혀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을 사용, 인용문의 형태를 빌려 보도함으로써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사설란 아래 정정 및 사과문을 게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한겨레신문은 지난 10일자신문에서 정정보도를 했으나 새문안교회가 요구하는 사과문은 게재하지 않았다.
이수영목사
이에 지난 11일 이를 요청한 바 있던 새문안교회는 기획위원회를 열고 “한겨레신문의 왜곡보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새문안교회와 이 목사에게 사과하지 않았으며, 인터넷신문에는 사실무근인 내용이 그대로 올라와 있다”며 사과문 요청 방침을 재확인했다.
그럼에도 그 이후에 한겨레신문의 사과문이 없자 14일 새문안교회는 임시당회에서 법적으로 사과요구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새문안교회는 최근 공산주의는 반기독교적이며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애국 등 시국에 관련한 이 목사의 설교 이후 보조의자를 설치할 정도로 교인 수가 계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최영은 기자 clayma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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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후 `교회정화` 명목 기독교 핍박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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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정화’ 명목으로 기독교 핍박 시작될 것
북한은 기독교인의 정치범수용소 수용과 강제노동, 고문, 공개처형 등 지구상 ‘최악의 종교탄압국’으로 전세계의 지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이런 실상에 대해 침묵하고 맹목적 민족공조만을 외치는 친북세력이 최근 득세하면서 종교계 대원로의 고언을 왜곡·비난하는 등 한국기독교계를 위협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함세웅 신부 “김 추기경 시대착오적”
지난 1월 29일 김수환 추기경은 열린당 정동영 의장 일행이 취임 인사차 서울 혜화동 성당을 예방한 자리에서 남북문제 등 국정전반과 관권 선거 논란 등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요즘 감정적 반미가 많아졌는데 반미친북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북한의 인권개선과 체제변화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두고 손석춘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은 인터넷좌파신문 ‘오마이뉴스’에서 “김 추기경의 정치적 발언이 현실을 호도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 내일에 심각한 걸림돌로 불거졌다”면서 “추기경에 대한 ‘거짓 예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겨레의 생존권이며 이 땅의 주류는 여전히 친미반북이기 때문에 반미운동은 지금보다 더 퍼져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열린당의 한 의원도 사석에서 “김 추기경을 다시는 만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으며 심지어 일부 열린당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김 추기경에 대한 노골적인 폄훼 분위기까지 감지됐다.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7년형을 선고받은 송두율씨에게 ‘안중근평화상’을 주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함세웅 신부(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이사장)도 최근 김 추기경의 발언을 왜곡·비난했다.
함 신부는 지난달 21일 “탄핵 여부는 헌법재판소에서 판단하는 만큼 차분하게 결과를 지켜보자”는 김 추기경의 말에 “추기경은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하셨다. 그분의 ‘참으라’는 말씀은 불의한 독재시대에 권력자들이 늘 했던 표현으로 그분의 사고는 다소 시대착오적이라도 판단된다”고 말했다.
한편 안중근의사숭모회(이사장 황인성)는 2일 성명서를 내고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라는 사이비단체가 학자를 빙자한 국제간첩 송두율에게 ‘안중근평화상’을 수여한 것은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정신을 김정일 독재체제의 선전에 악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악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며 “송두율 배후에 함세웅 신부가 도사리고 있음이 이제 만천하에 분명하게 드러났다”고 강조했다.
교회에 사회법 잣대 무리한 적용
지난해 노무현정권은 보수기독교계에 대해 ‘교회정화’라는 명목으로 세속법을 무리하게 적용함으로써 각계에서 교회자율권침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2003년 8월 검찰은 교회법에 따라 자율적으로 운영되어 오던 교회재정문제에 간섭, 세계 최대 감리교회 목회자인 김홍도(금란교회) 목사를 교회공금 횡령혐의로 구속기소했다. 이 사건은 검찰에 고발한 동일인 등에 의해 총 11차례 기독교대한감리회 내 재판절차에 고발됐고 감리교단 내 적법한 절차에 따라 모두 무혐의(無嫌疑) 처리된 바 있다.
그러나 검찰은 성도 10만이 넘는 교회의 현직 성직자를 ‘도주의 우려’로 구속 수사했고, 지난해 11월 18일 서울지법 동부지원 형사1부는 김 목사에 대해 업무상 횡령죄 등의 유죄를 인정했으나, 현재 상소심 계류중이다.
검찰은 또 지난해 8월 1일 정부가 하지 못한 사회복지사업에 뛰어들어 부랑인과 알코올 중독자, 정신지체자 등 오갈 곳 없는 이들을 20여 년간 구제해온 꽃동네 설립자 오웅진 신부를 국고 및 후원금 횡령, 농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이 사건은 꽃동네 수도자들이 수사에 응해 사실관계를 밝히고 꽃동네의 특성과 교회의 고유한 성격을 밝혔음에도 이를 전혀 반영하지 않아 검찰이 ‘악의적 편파수사’를 했다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되었다.
특히 3,000명 이상이 생활하는 꽃동네는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비교적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왔는데 지난해 6월 ‘오마이뉴스’ 등 좌파성향 인터넷신문들은 “꽃동네가 지방선거 때 특정정당 후보에게 몰표를 줬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20여 차례에 걸쳐 오 신부에 대한 비난성 기사를 집요하게 게재해왔다.
박창서 목사(새소망교회)는 “이번 총선에서 열린당이 제1당으로 집권할 경우 한국기독교는 매스컴을 총동원한 음해성 비방 등으로 더욱 핍박을 받을 것”이라며 “친북성향의 인물이 많은 열린당이 기독교에 대해 호감을 갖지 않는 이유는 공산주의와 기독교가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라고 말했다.
박 목사는 또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친북세력이 주도하는 선전선동에 꾀여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다”며 “신앙과 교회의 자유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기독교인들이 먼저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문영 기자 sogood@
신문영기자 2004-04-09 오후 2: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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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07
유시민의원, 기독교 비하발언 파문 확산
written by. 한영숙
유시민 열린우리당 의원(경기 고양덕양 갑)이 기독교를 비하한 인터뷰 내용이 최근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네티즌들 사이에 큰 반발을 사고 있다.
월간 기독교잡지 '복음과 상황' 2002년 9월호에 '휘슬을 내던지고 정치판의 아수라속으로'라는 제목으로 이뤄진 이 인터뷰에서 유시민의원은 "기독교는 예수님이 하지말라는 것 골라가면서 다 한다"며 "징역살면서 조 아무개목사의 설교를 들었는데 전부 거짓말이더라" 라고 말했다.
유의원은 이어 "기본적으로 교회는 사람을 정신적으로 마취시키는 댓가로 현금을 받는 서비스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는 일산에 교회 엄청 많은데 네온사인이 켜져있는 것을 보면 엄청 무섭다. 끔찍하다"고 말하면서 지금의 교회를 총체적 부패, 총체적인 권위주의, 총체적인 무비판이 집약되어 있는 게 한국교회"라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기독교인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김지철씨는 유시민의원 홈페이지에 "교회를 함부로 모독하지 말라. 한국교회가 총체적으로 부패했고 불투명하고 권위적이며 무비판적인 게 집약된 곳이라 한 말은 한국의 4만여 교회와 1,500만에 가까운 기독교인들에 대한 아주 증오스럽고도 심각한 모욕적 발언이 아닐 수 없다"며 무릎꿇고 사과하라고 요구했다.
오는 10일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부활절 비상 구국기도회를 준비중인 김한식 목사도 이 소식을 접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전 기독교인이 용서하기 힘든 발언"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konas)
2004.04.07 16:2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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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민족
월간조선 조갑제 편집장
2004-01-21 12:46:19
김정일은 1994년 김일성 사망 100일에 즈음하여 소위 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의 담화에서, "지금 해외동포들은 조선민족을 김일성 민족이라고 하고 있다"라고 했다. 그는 또 "우리 민족의 건국 시조는 단군이지만 사회주의 조선의 시조는 위대한 김일성 수령 동지"라고 말했다.
- 김일성 동상아래 모인 북한 주민들
평양방송은 1995년에 "우리 민족은 수령을 시조로 하는 김일성 민족이고, 현대 우리나라는 수령이 세운 김일성 조선"이라고도 했다. 가짜 단군릉 발굴과 개축을 주제로 한 단편 [2000년의 분출](한익훈, 조선문학 1995년8월호)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외친다.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영원한 태양이신 김일성 동지는 명실공히 민족사의 뿌리를 찾아주신 우리 민족의 위대한 시원이시며, 우리 인민은 단군을 원시조로 하는 긍지 높은 김일성 민족이라고..."
1996년 평양방송은 ´김정일 민족´이란 말도 썼다.
"우리는 태양을 따르는 해바라기. 우리는 태양의 나라에서 사는 김일성 민족, 김정일 민족. 태양이 영원하듯 김일성 민족, 김정일 민족은 영원무궁하리라."
한국의 좌익들이 부르짖는 ´민족공조´란 김일성-김정일 민족이 되기 위한 ´노예의 공조´란 이야기이다. 설날을 맞아 우리 민족의 보존과 발전을 가능케 했던, 신라의 삼국통일과 최초의 민족통일국가 성립에 감사하면서 왜 김정일 정권이 신라통일을 부정하려고 하는지 알 것 같다. 김정일 父子는 스스로 단군이 되고싶은 것이다.
그 걸림돌이 되는 것이 신라이고 대한민국인 것이다. 가짜 단군릉을 조작함으로써 요절복통의 김일성 민족이란 말을 만들어낸 이 인간에게 아무런 유감도 느끼지 않는 자들이 개혁과 진보의 탈을 쓰고 지금 대한민국 폄하에 앞장서고 있다.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 http://www.chogabj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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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4일 김일성 주석 90회 생일(4.15), 김정일 노동당 총비서 회갑(2.16), 인민군 창건 70돌을 뜻깊게 맞이하기 위한 총돌격전을 벌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노동당기관지 노동신문은 이날 `올해의 뜻깊은 명절들을 강성대국건설의 자랑찬 열매로 빛내이자'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김 주석 생일인 `태양절'과 김 총비서의 `탄생절'은 '우리 민족 역사에서 가장 뜻깊은 세기적 명절이고 군 창건일은 강성민족의 70년 역사를 기념하는 전민족적, 전인민적 경사의 날로 될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고 조선중앙방송이 전했다.
이 신문은 특히 올해를 `김일성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의의깊게 장식하려면 무엇보다 '수령 숭배의 열풍이 온 사회에 차넘치게 하기 위한 일대 사상적 공세를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신문은 또 지난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이겨낸 비결은 주체사상이라면서 주민들 속에서 주체사상 교양을 더욱 강화하고 김 총비서에 대한 `수령결사옹위정신'을 높이 발휘하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고 '올해의 정치촵사상공세를 벌려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노동당의 `혁명전통'을 고수하고 빛내며 군대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당의 선군영도를 받들어야 할 것이며 올해에 `옹군애민 사상만세!' 소리가 전국에 힘차게 울리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문은 이어
△ 전력촵석탄촵금속촵철도운수 부문을 앞세우고
△ 황해남도 토지정리와 개천-태성호 수로공사를 다그치며
△ 현대적 생산기지를 더 건설하고
△ 과학기술 인재 양성에 힘쓰는 등 맡은 분야에서 실적을 올리는 것으로 올해의 명절을 맞이해야 한다고 말했다.
< 출처 : 서울=연합뉴스, 2002. 1. 4 >
우상숭배와 무력의지가 전부인 이 불쌍한 짐승국가를 보라! 지금은 비료, 식량, 소 보낼 때가 아니다.
진정 이 민족을 사랑한다면 강하게 기도해야 할 때이다
- 스룹바벨 선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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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전지전능한 하느님”???
평양방송, “김정일은 전지전능한 하느님”
<김정일정권을 해부한다④ 김정일의 호칭>
북한에서 사용되는 김정일에 대한 호칭은 김정일 자신의 치밀한 계산과 오랜 기간의 우상화 작업 가운데 만들어져 왔다. 당과 권력에 대한 평가와 보도가 일체 일원화돼 있는 북한사회에서 김일성이나 김정일에게 붙여지는 호칭은 북한정권의 권력구조 동향과 분위기를 반영하는 자료로 이용되기도 한다.
김정일이 1973년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사용한 호칭은 다음과 같다.
▲‘당중앙’(1973년 9월 이후) ▲‘유일한 지도자’ ‘경애하는 지도자’(1975년 2월 이후) ▲‘영명하신 지도자’(1977년 이후) ▲‘영도자’(1983년 2월 16일 이후) ▲‘최고사령관’(1983년 5월 이후) ▲‘인민의 어버이’(1986년 2월 이후) ▲‘백두광명성’(1987년 2월).
1990년대부터는 김일성과 거의 동일시되는 호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강철의 영장’(1993년 7월 이후) ▲‘민족의 어버이’ ‘인민의 지도자’ (1993년 8월 이후) ▲‘우리아버지’ (1993년 10월 이후) ▲충성의 최고 화신 (1994년 3월)
김정일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일부 한국사회계층 사이에서 이미지의 변신을 이뤘다. 베일에 쌓여 있던 광기어린 ‘은둔자’의 부정적 이미지에서 ‘다변가’ ‘외부세계를 잘 아는 사람’ 식의 긍정적 평가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김정일을 두고 `말이 통하는 사람`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하지 못해서 유감`이라고 말한 것도 한 몫을 했다는 평가다.
북한에서도 2000년 남북회담을 전후해 김정일에 대한 호칭의 변화가 있었다. 이전 보다 더욱 원초적이고 황당한 호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통일대통령’ ▲‘21세기 세계수령’ ▲‘21세기 찬란한 태양’ 등이 그것이다.
또한 사이비 교주를 방불하는 신적 호칭으로는 ‘민족의 구세주’, ‘영원한 하늘’, ‘인류의 태양’ 등이 있다. 1997년 1월 1일 평양방송에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이 밖에도 김정일이 사용해온 호칭으로는 ‘천출명장’ ‘자애로운 어버이’ ‘장군 중의 천하제일명장’, ‘백두산의 아들’ 등이 있다.
김대호 전 북한직장 예술선전대 작가는 “북한 주민들은 그러한 호칭을 어려서부터 못 박히게 들어서 당연하게 받아 들인다. 만약 ‘친애하는 지도자’가 아니라 ‘지도자’라고만 해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고 전하고 “호칭은 김정일 우상화 작업의 기본이 된다”고 설명했다
곽대중 월간 ‘Keys’ 편집장은 “김정일의 ‘별명’에서 발견되는 특징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느 것 하나도 김정일과 일치하는 별명이 없는 거짓말이라는 사실이다”라고 촌평했다.
하늘 아래 불가능한 행악은 없는 것인가. 극한 행악은 허탈한 희극이 되기도 한다.
북한전역에는 70년대 이후 김정일의 지도하에 세워지기 시작한 3만5,000여개의 김일성 동상이 있다.
김범수기자 2004-03-13 오전 9: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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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권의 교회 핍박
공산권의 교회 핍박
공산권 국가들 안에서는 예외없이 하나같이 참 기독교가 숨을 쉴 수가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 현상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단 1개국도 예외가 없이 공산국가라면 기독교를 압박한다. 범 지구적으로 하나의 원리로 작용하고 있는 이 현실은 공산권은 마귀가 들어쓰는 국가라는 것을 역으로 잘 증명해주는 근거 된다. 애를 써서 기독교가 전파되지 못하도록 핍박하고 있는 모양과, 참되이 믿는 이들이라면 끝까지 찾아내 공개처형하는 모습은 마귀의 소행으로밖에는 볼 수 없다. 이 현실을 눈으로 확인하면서도 북방 공산권에서 나온 거짓선지들의 무리와 종교적 협상을 하고 있는 것이 또한 아이러니컬한 세계 기독교, 남한 종교지도자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이 북방의 궤휼정책을 진리의 말씀으로 파하고 사단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은 스룹바벨선교회의 지상 사명이다.
시대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핍박하던 강대국들이 존재한 것처럼... 오늘날도 일곱째 머리 소련에서 시행하고 있는 무신론 유물사관 공산주의 정책에 따라, 관계된 많은 국가에서 복음 전파자들이 시련을 받고 있다.
우리 성도들은 공산권에서 기독교를 어떻게 핍박하고 있는지와,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저들이 어떻게 성경을 손에 들고 나와 평화공존을 말하며 어이하여 W.C.C.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고 있는지를 분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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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 손에 죽은 1억명의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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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프랑스에서 나온 [공산주의 黑書](The Black Book of Communism-Crimes Terror Repression)이란 책에는 이런 통계가 있다. 숙청, 집단처형, 집단 강제 이주, 정부가 만든 대기근 등을 통해서 공산주의 체제로부터 죽임을 당한 인간이 약1억 명이란 통계이다. 히틀러의 나치 독재에 의한 피살자는 약2500만 명. 공산주의의 인간 말살이 히틀러의 네 배나 된다. 인류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학살을 공산당이 저질렀다. 그럼에도 나치의 학살보다도 관대한 취급을 받고 있다고 이 책의 저자들은 개탄했다. 1억 명의 피살자들을 국가별로 보면 이렇다.
1. 소련 : 2000만 명
2. 중국 : 6500만 명
3. 북한 : 200만 명.
4. 캄보디아 : 200만 명
5. 아프가니스탄 : 150만 명
6. 아프리카 : 170만 명
7. 베트남(월남) : 100만 명
8. 동유럽 : 100만 명
9. 남미 : 15만 명
10. 공산당이 집권하지 못한 나라와 국제공산주의 운동 : 1만명.
나치의 학살자들은 뉴렌베르그 재판을 통해서 단죄되었다. 공산주의 학살자들은 그런 재판을 받지 않았다. 아마도 김정일이 최초로 법정에 섬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의 죄짐을 몽땅 지게 될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94년 7월 1일자 기사 (스룹바벨 선교회 제공)
공산당은 인류 종말에 '부패한 자본주의'와 '타락한 교회'를 심판하기 위해 성경대로 등장한 '붉은말'입니다. 계시록 6:4 "이에 붉은 다른 말이 나오더라 그 탄 자가 허락을 받아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리며 서로 죽이게 하고 또 큰 칼을 받았더라" 이들은 이사야 19:4절의 '잔인한 군주'이며, 계시록 11:2~ 거룩한 성(교회)를 마흔 두달 동안 짓밟을 '이방인'입니다. 이들은 신명기에서부터 예언된 북방의 '흉악한 족속'인데(신명기 28:49~), 이 흉악한 족속이 등장하는 원인은 백성이 자기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여 버리기 때문이라 하였습니다. 다니엘 9장에서도 '장차 한 왕'이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러 내려온다 하였으니, 붉은 말 공산당의 등장은 성경대로 이루어진 것뿐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심판의 몽둥이'입니다(이사야 10:5).
몽둥이에겐 인격이 없습니다. 고로 몽둥이를 달래는 것도, 협상하는 것도, 무서워하는 것도 다 죄가 됩니다. 그는 쓰임받고는 꺽이워 버리는 존재일 뿐입니다(이사야 10:12). 우리는 백성의 죄값 때문에 등장한 몽둥이를 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한 건 우리의 허물을 볼 줄 아는 것입니다.
그들은 짐승입니다. 사람의 탈을 썼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작정대로 나왔어도 그 속은 마귀가 지배합니다. 그래서 단합이 잘 되고, 그래서 붉은색을 좋아하며, 그래서 투쟁적입니다. 잔인한 몽둥이 공산당을 내어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문제는 누구에게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얼 해야 하겠습니까? 공산당보다 더 강력한 정치집단을 만들어야 할까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무도 저 '잔인한 군주'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입니다. 미국도 그 앞에 두 팔이 꺽인 불쌍한 신세가 될 것입니다. 공산당에게 쌀을 주며 달래면 되겠습니까? 그건 더욱 더 매맞을 일이 될 것입니다.
몽둥이를 비판하기 이전에 우리의 해야할 일을 찾아 봅시다. 우리의 급선무는... 회개입니다.
자본주의의 부패와 교회의 타락(사 28:1~3)을 회개하고, 우리의 신사참배를 회개하고, 우리의 W.C.C. 가입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애굽'(미국)을 의지하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이 나라는 세계를 살릴 제사장 국가요, 선지국가요, 하나님의 종된 나라입니다.
이사야 31:1 "도움을 구하러 애굽(현재로는 미국)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2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3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이 시대에 다시 예언합니다. "미국"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군사력은 무력이지 영력이 아닙니다. "러시아"도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군사력은 땅의 힘이지 하늘의 힘이 아닙니다.
6월이면 '피 **' 목사는 북한 '강영섭' 목사와 '남북통일 화해기도'하러 금강산에 갑니다. 이 민족의 죄악을 위하여 울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심판을 위해 등장한 붉은 말'과 함께 기도하러 간답니다. 위대하신 태양 김일성 (하나님)의 꼬봉 김정일에게 예물을 가지고 화해하러 간답니다. 그 기도! 하나님이 들으실까요?
우리 정치인들에게 필요한 자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백성에게 요구하는 자세는 무엇일까요? 화려한 필치일까요? 뛰어난 현실 분석 능력일까요? 강력한 우방국들과의 협상력 강화일까요? 붉은 공산권 세력을 살살살 달래는 것일까요?
이러한 것들은 문제의 본질을 본 대안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애굽에 갇힌 이스라엘'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모세를 길러 파견하셨듯이, 이 시대에도 흑암 공산권에서 갇혀 방황하며 신음하는 주의 양떼들을 살려내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일하는데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돈 들고, 쌀 들고, 소 몰고' 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W.C.C.에 가입하여 교세확장하며 북한 가짜 목사들하고 기도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은 계시록과 예언의 말씀을 꿀같이 먹고 다시 외치는 인격자입니다. 우리는 주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는 순종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배부르게 밥먹고, 멋진 집짓고, 문화생활을 즐길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일어나 울부짖고 주앞에 구해야할 때일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하신 이 땅의 모든 정치인, 종교인, 언론인, 그리고 제 국민들은 현실을 그대로 고해주고 있는 예언서를 무장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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