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예수 소개하는 엘리야 (말라기 4:5)

탈북자 이순옥씨 증언


- 어머니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다 -


저는 북한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근 50년을 북한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은총으로 96년 아들을 데리고 남한으로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제가 영문도 모른 채 지하 감옥에서 모진 고문과 사형선고까지 받고 사형집행날 극적으로 사형을 취소한다는 통지와 함께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 졌을 때 수용소 안에서 겪은 북한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저는 김일성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기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죄수의 신분으로 유일하게 6,000 여명이 수용된 그 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는 생산지휘와 모든 재정업무를 맡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는 많은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들을 이곳저곳 마음대로 갈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저를 담당하고 있던 재정부장 교도관이 저를 불러놓고는 단단히 교육을 시켰습니다. 


“너는 오늘부터 매일 어떤 공장으로 나가야 하는데 그 공장에는 미친 정신병자 놈들만 모여 있다. 그 미친 정신병자 놈들은 당과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자들이니 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 곳에 가야 된다. 그리고 그 미친 자들하고는 절대 눈 길 한 번 마주치지 말아라. 그렇지 않고 네가 그자들이 믿는 하늘을 믿게 되면 네 목숨은 여기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거기 가서 그 사람들을 보는 순간 나는 너무 놀랐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무리 같지 않았습니다. 1,500도 이상 시뻘겋게 타오르는 용광로의 고열 노동 작업장이었는데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걸 보았을 때, 무슨 짐승의 무리 같기도 하고 외계인 같기도 하고 도무지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에 머리카락이 붙어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얼굴은 해골 같고 이빨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키기 다 줄어들어서 120센티 30센티 요렇게 땅에 딱 붙은 난쟁이들만 움직였습니다. 나는 가까이 가서 그들을 보았습니다. 전 너무나 놀랐습니다. 잡혀 올 때는 정상인들이 잡혀 왔는데 거기 와서 하루 열 여섯 시간, 열 여덟 시간씩 먹지도 못하고 그 고열 노동 속에서 일을 하다 보니 그 사람들은 척추가 녹아 내려서 뒷잔등에 혹이 되어 있었고 몸이 다 휘어져서 앞가슴하고 배가 마주 붙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두 그렇게 육체가 망가져 기형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프레스로 찍어도 한 판에 그렇게 똑 같은 모습으로 찍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들이 일하는 작업장에는 교도관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교도관들은 말로 일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소가죽 채찍을 윙윙 휘두르고 다니면서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을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의 몸에는 옷이 입혀져 있지 않습니다. 저는 처음에 멀리서 그 사람들을 보았을 때 모두 다 꺼먼 옷을 입고 있는가 했습니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서 찬찬히 보니 그 사람들은 맨 살가죽에다 앞에 시커먼 고무 앞치마 하나만 걸치고 있었습니다. 


용광로의 뜨거운 불꽃이 앙상하게 말라붙은 살가죽에 튀고 또 튀어 딱지가 앉고 그 자리에 쇳물이 또 떨어지고, 타버리고 해서 그 사람들의 피부는 한 곳도 성한 곳이 없었고 마치 짐승의 가죽과 같았습니다. 


어느 날 저는 그 곳에서 정말 말로 전하기 힘든 너무나 끔찍하고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오후, 제가 공장문을 열고 들어섰는데, 공장안이 쥐 죽은 듯 고요했습니다. 작업장 한 가운데 수 백 명의 그 죄수 아닌 죄수를 모아놓고 담당 교도관 두 명이 눈에 핏발을 세우고 미친 듯이 고함을 치며 날 뛰고 있었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문 옆 한쪽에 비켜 서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수령님을 믿지 않고 하늘을 믿는 미친 정신병자 놈들이라고, 소리 소리지르며 그 사람들을 차고, 때리고 하면서 인간이하의 취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교도관들은 “너희들 가운데서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대열 앞에 나서라. 하늘을 믿지 않고 수령님을 믿겠다고 하면 자유세상으로 내보내서 잘 살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하면서 그 사람들을 윽박지르며 하늘을 거부하라고 그렇게 채찍으로 때리고 발로 차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너무나도 이상했습니다. 수 백 명의 그 사람들은 왜 그런지 아무 대답도 없이 그렇게 매를 맞으면서도 침묵으로 맞섰습니다. 저는 너무나 무서워서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는데 그래야 오늘 누가 맞아죽지 않을 텐데 왜 계속 저렇게 입을 다물고 있나. 저러고 있으면 또 누구를 끌어내다가 밟아 죽일지 모르는데 빨리 한 사람이라도 나서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마음속으로 다급하게 생각하며 문 옆에 서서 무서움과 공포 속에서 떨고 있는데 예수를 믿는 그 사람들은 계속 침묵으로 대응했습니다. 그 때 독이 오른 교도관이 그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닥치는 대로 아무나 여덟 명을 끌어 내다가 땅바닥에 엎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구둣발로 내리밟고 짓이겼습니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고 허리며 팔 다리뼈가 부러졌습니다. 그 사람들은 고통 중에서도 몸을 뒤틀면서, 짓밟힐 때마다 신음소리를 냈는데 그 신음소리가 너무나도 이상하게 들렸습니다. 


저는 그때, 주님이 누군지,하느님이 누군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뒤에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이 구둣발로 짓밟혀 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부서져 나가면서 신음소리처럼 애타게 불렀던 것은 바로 주님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이 당했던 고통의 천만 분의 일도 제대로 여러분에게 전해 줄 수가 없습니다.


미쳐 날 뛰던 교도관 두 명은 “수령님과 당을 믿는 우리가 사는가 아니면 하느님을 믿는 너희가 사는가 보자” 면서 달려 가더니 용광로의 펄펄 끓는 쇳물통을 끌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쇳물을 피투성이가 된 그 신자들 위에 부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순식간에 살이 녹고 뼈가 타면서 숯덩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저는 난생 처음으로 내 눈앞에서 사람이 숯덩이로 변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그 충격이 컸던지, 그 곳을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기억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도무지 눈을 감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정신적 충격으로 눈만 감으면 눈앞에 숯덩이가 된 사람이 어른거려서 도무지 눈을 감을 수 없고,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고, 일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으며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정신이 들어갔다 나갔다 했습니다. 


저는 그 일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실오라기만큼이라도 수령님과 당에 대해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를 말입니다. 인간은 주님을 꽉 잡아야 된다는 것을 저는 그때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다시,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하늘에 기도했다는 그 하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너무나도 간절하게 하늘을 찾았습니다. 


“저 사람들이 저렇게 불에 타 죽으면서까지도 저렇게 거부하지 않고, 저렇게 믿는 하늘이, 진짜로 그 하늘이 어디에 계시다면 나를 좀 살려달라고... 그리고 저렇게 무서운 짓을 하는 저 자들에게 하늘에서 정말 벌을 내려줘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자나깨나 꿈속에서도 하늘을 찾고 또 찾고 기원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주님께서 그 간절한 저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공개처형이 있었는데 어느 날 누구를 또 공개처형 시키려는지 6천명이나 되는 수용소 사람들을 한 자리에 다 모이게 했습니다. 공개처형 때는 언제나 하늘을 믿는 사람들을 맨 앞 줄에 앉힙니다. 그런데 "하늘을 믿는 자들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하늘을 믿지 못하게 하라"는 김일성의 특별지시와 규정이 있어서 하늘을 믿는 그 사람들을 앉힐 때에는 무릎사이에 목을 끼우고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리게 했습니다. 심지어 죽어서도 하늘을 믿지 못하게 해야 한다면서 죽은 시체도 목을 꺾어 거적에 말아서 어두컴컴한 산골짜기 나무 밑에 파묻게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날도 신자들은 하늘을 조금도 못 보도록 목을 무릎사이에 끼우고 맨 앞줄에 앉아 있었고, 그 뒤쪽으로 다른 사람들이 줄지어 앉아 있었습니다. 누구를 또 공개처형 하려는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쇠몽둥이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정신이 아찔하여 대답도 할 수가 없었고 일어 설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나를 끌어내다 앞에 세웠습니다. 내가 군중들 앞에 섰을 때, 수용소 소장이 나에게 “고마운 수령님과 당의 은덕으로 너는 이 시각에 석방이다”라고 통보를 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목을 무릎에다 끼우고 맨 앞줄에 엎드려 있던 신자들이 내가 석방된다는 소리에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분들의 눈빛을 보았습니다. 그 분들은 눈빛으로 간절히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거든 자기들의 실상을 세상에 알려 달라’고.. 지금도 제 가슴에는 그분들의 그 간절한 눈빛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평생을 빌고 또 빌은 그 하늘이, 한 번 들어가면 살아 나올 수 없는 그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에서 저를 살려 주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저희 모자를 살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북한의 수용소에 갇혀있는 그 신자들의 눈빛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이 시대의 순교자라고 봅니다. 


저의 증언으로 인해 북한 신자들의 인권문제가 150 여개 나라에 나갔고 세계가 떠들었습니다. 유럽의 지식인 100 여명이 프랑스에 모여 북한 신자들의 인권을 위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자유롭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북한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 탈북자 이순옥 사비나(천주교 신자임)의 증언 중 일부 발췌 -


이 글은 제가 평소 알고 지내던 한 여중생의 집에 방문했다가 우연히 눈에 띤 가톨릭 성모회지 <성모님의 동산> 2002년 10월호(138호) "함께 계신 하느님" 란을 읽고 충격을 받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확인하신 바가 바로 "적그리스도 정권"인 공산당의 실체입니다. 저런 마귀의 자식들이 "평화공존"을 외칠 때 여러분은 따라가시렵니까? 저들이 옆구리에 성경을 들고 나올 때 여러분은 반가워 그들과 함게 거짓된 공동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나라 정치와 우리나라 종교는 저들(공산당=러시아, 중국, 북한)의 평화공존 속임수에 박수를 쳐주고 있으며, 저들의 거짓 목사들과 남북공동예배를 드리곤 합니다. 이것은 완전히 속고 있는 것임을 외치는 제단이 전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멸공진리>의 본 제단입니다. 북방세력 속에 갇힌 가련한 양떼를 구원시키실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을 통해서!


멸공용사가 



이순옥 씨 - 북한 죄수캠프에서의 7년간의 고문

 


이순옥은 북한의 개천교도소의 죄수였다. 그녀는 최근에 자신의 체험을 발간했으며 미국 의회에서 겪은 일을 증언했다. 또한 미국 NBC뉴스에게 자신의 개천에서의 시간들을 말했다. 


저는 평안북도 개천에 있는 정치범교화소에 7년동안 투옥되었습니다. 저는 1987년부터 1993년 1월까지 갇혀 있었습니다. 투옥시 제 나이는 39이었습니다. 저는 중앙 물자보급소에서 일했으며, 저는 그 곳에서 관리자였으며, 북한에서 우리는 주민들에게 식량과 물자들을 배급했습니다. 북한경제가 침체되고 물자배급 상황이 나쁘다는 이유로 저는 투옥되었습니다.


개천교도소에는 6,000명 이상의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전부 정치범이었고 그들은 꼭 짐승처럼 취급되었습니다. 그리고 교도소 간수들은 죄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인간이 아니다. 너희들은 짐승들이라고 생각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모든 죄수들이 사상적으로 반정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식량부족때문에 비참하게 되었고, 한마디 불평을 중얼거렸을 때에 그들은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간주되었습니다. 7,000명의 죄수들 중 2,000명은 집에 아이들이 있는 주부들이었으며, 죄수생활한 지 한 달만에 그들이 처형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울부짖었습니다.


저는 5살, 7살의 아이들을 둔 젊은 주부를 보았습니다. 그녀가 교도소에 끌려 왔을 때 “나는 아이들이 있고 남편도 교도소에 있는데 이제 내 아이들은 집에서 굶주릴 것이다”라고 소리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6,000명의 죄수들이 보는 앞에서 그 여자가 처형 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교도소에 있을 때 여성이라고 달리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김정일 독재정권 아래에서, 저는 쇠기둥에 가슴, 배, 다리가 묶여 있었습니다. 총알 3발씩을 가지고 있는 6명의 사형집행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부 18발의 총알을 심장에 쏠 것입니다. 비인간적입니다. 저는 너무나 슬펐고, 우리가 전쟁범죄자들도 아니고, 적도 아닌데, 아이들의 어머니인 젊은 여자를 그렇게 처형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교도소에는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6.25전쟁 이후로 제1의 적은 하나님입니다. 김일성은 하나님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1956년과 1963년 사이에 수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투옥되었고, 그들의 가족들은 별도의 교도소에 투옥되었습니다.


개천교도소에서 저는 하나님을 믿게 되어서, 저는 간수들에게 걷어 차이고, 철공소에서 일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일들은 고열 속에서 해야 하기에 제 등골이 오그라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제 키는 120-130센치가 되었습니다. 저는 바로 동물처럼 취급 당했습니다. 제 등은 축구공처럼 휘게 되었고, 제 심장과 위장사이의 간격이 좁아졌습니다. 제 어깨와 뼈들이 튀어 나왔습니다. 저는 기이한 동물처럼 보였습니다.


제 어깨 뼈가 너무나 튀어 나와서 저는 머리가 두개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는 외계인처럼 느껴졌고 이 세상의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바로 짐승이었습니다. 저는 바로 동물처럼, 노예처럼 취급 당했습니다. 10센티 넓이, 1.5미터 길이의 가죽혁대로 맞았습니다. 군화발에 차였습니다. 저는 이상하게 생긴 동물처럼 되었습니다.


저는 교도소생활동안 이 잔악함을 겪었으며, 7년동안 매 끼니로 100그람의 강냉이만 받았습니다. 저는 단 한번도 다른 음식을 먹지 못했습니다. 강냉이과자는 쵸코파이의 크기인 100그람짜리입니다. 그리고 소금물 작은1컵을 주었습니다. 일일 정량을 다 먹지 않는 사람은 50그람으로 줄였습니다.


저는 단지 독재치하의 죄수였습니다. 이러한 독재치하에서는, 우리는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고, 웃지도 못하며, 눈물을 보일 수도 없고, 자유롭게 걸어다닐 수도 없으며, 우리는 하루에 3번만 화장실에 가도록 강요되었습니다. 저는 총칼의 압박아래서 제 신체적 기능을 유지하면서 그런 엄격한 통제 밑에서 살아 남은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개천교도소의 6,000명의 죄수들 대부분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으며, 그들은 정치범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런 말 한마디를 중얼거렸습니다. “왜 우리가 굶주려야 하는가. 지도자인 김정일이 있다면 왜 우리가 굶주려야 하는가.” 이런 불평 한마디가 우리를 교도소로 집어 넣습니다. 저는 공개처형을 목격했습니다. 저는 이것은 사람이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 지구상의 인간지옥입니다. 


그리고 저는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 생화학 무기를 만들어 적이 동물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이유로 동물이 아닌 인간을 상대로 실험하는 것에 대해 정말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김정일의 지시였습니다. 그들은 동물 대신에 죄수들에게 테스트했습니다.


저는 불쌍한 희생자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생화학 실험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1987년에 투옥되었으며, 1988년부터 석방된 1993년까지 사이에 저는 실험감독관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기대 이상으로 생화학무기의 효과가 나온 것을 즐기고 있었으며 그들은 실험이 성공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를 회상하며 저는 아직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다시피 제 얼굴이 이렇게 쪼그라든 것이 저는 정말로 슬픕니다. 제 얼굴은 쪼그라들었고, 제가 할 일을 안했다는 이유로 저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제 얼굴의 왼쪽은 이렇게 기형이 되었으며 본모습으로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 교도소에는 6,000명의 죄수들이 있었고, 북한에는 전부 20만명의 정치범들이 있습니다. (울기 시작한다) 우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없는 정권치하에서 어떻게 그렇게 많은 정치범들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이것은 말도 안됩니다.


그렇게 많은 정치범들을 가두고 있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북한에 이렇게 많은 정치범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신다면 고맙겠습니다. 이쪽 편에서 살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고 자유롭게 자기의 좋아하는 아이들을 돌보고 옷과 먹을 것을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북한에서의 죄수생활을 회상할 때엔 그 곳에는 2,000명이 넘는 주부들과 임산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정치범들은 3대를 멸하는 법이 있습니다. 


세대를 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이를 낙태시키도록 강요받습니다. 그들은 여자들이 임신 8개월이나 9개월이 되었어도 태아를 죽이기 위해 커다란 주사기로 임산부의 자궁에 소금물을 집어 넣었습니다. (운다). 그리고 가끔 산 아이가 태어나면 간수들이 핏덩이의 아이를 발로 차서 죽입니다. (운다). 그리고 저는 갓난 아이가 고통으로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운다). 저는 이러한 비인간적인 지옥을 목격한 것을 이렇게 말로 표현해야 합니다.(운다). 저는 86년 10월에 붙잡혔으며, 87년과 88년 5월에 투옥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잊을 수 없읍니다. 간수들은 군화발로 저를 찼으며, 해보지도 못했던 노동을 강요받았습니다. 한번 그들이 우리들 중 50명을 뽑아서 강당에 넣고 그들에게 삶은 배추 조각을 주었고, 그들이 그것을 먹자마자, 그들의 입과 항문에서 피가 쏟아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죽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그들이 이렇게 20분 내지 30분만에 죽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저는 마음을 둘 곳이 없었습니다. 이게 생시입니까 악몽입니까. 그 때 저는 비명을 질렀고 강당 밖으로 쫒겨 났습니다. 그것은 생화학실험이었으며, 10,000분의 1이라는 지극히 소량만을 사용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건강한 사람을 그렇게 죽일 수 있습니까.


1990년, 91년, 92년에 걸쳐 그들은 기독교신자들을 더욱 가혹히 다루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별도의 작업장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때, 30명의 죄수들이 간수들의 군화발에 차여 죽었습니다. 2명의 간수가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 주님.”하고 주님을 찾아 울 때, 그들은 끓는 물을 그들에게 부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잿더미로 되었습니다. 북한같은 지옥은 또다시 없습니다. 우리는 영양실조에 시달렸고, 가장 열악한 상태인 3등급 영양실조에 달하면, 물이나 빵을 먹으면 곧바로 항문을 통해 배출되어 버립니다. 교도소에는 쥐들이 있는데, 그곳에는 가죽제품들을 만들기에 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쥐를 붙잡으면 그 날은 행운의 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쥐를 잡는 것이 발각되면 우리는 별도의 독방에 쳐 넣어집니다. 쥐를 잡으면 우리는 요리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먹었습니다. 


우리가 한조각의 빵과 소금기 있는 물을 마시고 이렇게 1년을 지내면, 인간은 짜든 날것이든 무엇이든지 그 맛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쥐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맛 없이. 저는 머리를 발로 걷어 차여서 종종 두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시력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제 어께는 휘어 있습니다. 어깨 양쪽이 똑바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물고문도 당했습니다. 저는 물 속에서 물을 마셔야만 했습니다. 저는 드러 누어서 물을 마셔야 했습니다. 그 때 제 위장이 물로 가득찼을 때 그들은 제 위장을 밟아서 물높이와 제 몸 높이를 같게 하고, 물이 제 입과 항문으로 쏟아져 나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물높이와 제 몸 높이가 같아질 때까지 짓밟았습니다. 


그리고 데 갈비뼈와 등뼈 그리고 제 다리는 정상상태가 아닙니다. 북한에서의 고문으로 인한 육체적 부작용은 아직까지도 굉장합니다. 저는 남한에서 위수술을 받을 수 있었지만 물고문때문에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물고문을 할 때 그들은 특별히 고안된 10리터짜리 주전자를 사용했습니다. 그들이 죄수들의 입에 주전자꼭지를 넣으면 목구멍이 자동으로 열렸습니다. 


그 때 제 얼굴에 이렇게 상처가 생겼습니다. 지금도 여기 그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를 천장에 두 손과 함께 매달고 저를 때렸습니다. 제가 매달렸을 때 제 몸의 무게때문에 수갑을 찼기에 손목에 부상을 입고 살점이 떨어졌습니다. 제 어깨 오른쪽은 덩어리채 튀어나왔고, 뼈가 위로 치솟았습니다. 그리고 이 쪽은 그들이 짓밟았기에 움푹파였습니다. 


그 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고문이었습니다. 저는 제 사무실에서 이유도 모른채 그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제 책임이 아니고 지도자 (김정일)의 책임이었는데도 그들은 주민들에게 식량이 공급되지 않은 것이 제 책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저로부터 제 책임이라는 시인을 받기 위해 저를 고문했습니다. 


그들이 저를 고문할 동안, 어쩔 때엔 이틀씩, 저는 의식을 잃었고, 제가 정신을 차렸을 때 제 등에 상처가 난 것을 보았고, 커다란 파리들, 어쩔 때엔 구더기들이 피묻은 부분에 달라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 하나 밖에 없는 아들과 내 사랑하는 남편이 나의 투옥과 아무 관계가 없는데도 강제노역소로 가야만 했던 것 때문에 제 가슴은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체제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고, 오직 북한에만 존재합니다. 그 때 제 유일한 아들은 김일성대학 대학생이었고, 제 남편은 교장선생님이었습니다. 그들은 강제노역소에서 노동을 해야했으며, 저는 아직도 제가 북한에서 태어난 것과 제 남편이 그러한 상황에서 죽은 것 때문에 마음이 안 좋습니다. 제 아버지는 북한에서 고위직이었고, 제 자신도 대학을 나왔으며 노동당 당원이었고, 그 전에는 아무런 고통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심한 고통을 참을 정도로 제가 강하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교도소에서 그 고통을 겪어야 했으며 그런 상황에서 자유롭게 된 것이 분명 기적입니다. 지금은 완전 180도 달라졌습니다. 바로 지금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느낍니다. 저는 마치 제가 죽었다가 다시 태어난 것처럼 느낍니다. 당장은 2,300만 북한주민들이 해방될 수 있는 날이 더 가까워진다고 희망합니다.


저는 북한으로부터 신체적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김정일은 비인간적인 자입니다. 저는 그러한 잔혹함을 겪었고 그것을 세상에 알렸으며, 그래서 김정일은 수백번 저를 죽이려 할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 생명이 희생되어도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왜 내가 그런 용기를 가지고 있는지의 이유입니다.


저는 세상사람들 모두가 북한에서의 그러한 잔혹함을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권이 없는 곳--- 오직 북한에서만 그렇습니다. 아직까지 그곳에 교도소에 갇힌 사람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가족교도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두사람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있었던 곳 같은데서 살아 남은 사람은 제가 유일합니다. 이것은 비밀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들은 미국 의회와 미국 정부, 그리고 UN에서 알아야 하며, 그들은 김정일이 죄수들을 해방시키게 만들어야 합니다. 모든 북한주민들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 저는 이것을 진심으로 요청합니다. 


제가 그곳에 있을 때, 24개의 교도소가 있었습니다. 그 후, 저와, 제 아들, 그리고 강철반, 안혈, 안영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사실들을 UN을 포함한 세상에 알렸으며, 저는 김정일이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지금은 교도소 숫자가 반으로 줄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수들의 숫자 20만여명, 그리고 다른 형태의 죄수들 20만 --- 전체 40만명의 죄수들이 교도소에 있습니다. 지금은 몇명이나 교도소에 갇혀 있으며 몇명이나 죽음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북한은 매년 죄수의 숫자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죄인이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죄수들이 만드는 제품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북한사람들, 3살짜리 아이들도 죄수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아이가 울다가도 교도소에 보낸다고 하면 울음을 멈춥니다. 그들은 잘못 말하면 언제 붙잡혀 교도소로 보내질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의견을 표현하는데에 매우 조심합니다.


저는 고문때문에 제 눈 왼쪽에 상처자국이 있고 제 이빨들은 부러졌습니다. 제 얼굴 왼쪽은 마비되었습니다. 그들이 제 몸을 너무나도 심하게 짓밟아 제 이빨이 부러졌고 제 눈알이 튀어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눈알을 다시 집어 넣고 손으로 며칠동안 주물렀습니다. 그리고 눈이 부풀러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 파인 곳을 보십시오. 제가 의식을 차린 후에 발견했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무엇인가로 찔림을 당했음에 틀림없습니다.


원문: http://www.msnbc.com/news/859731.asp?0cb=-113130711


Soon Ok Lee is a former prisoner at Kaechon Prison in North Korea. She recently published her memoirs and testified about her experiences before the U.S. Congress. She also spoke with NBC News about her time at Kaechon. Below is an edited account of that discussion, in her own words. (Editor’s note: Soon’s descriptions are graphic and may not be suitable reading for all.)


I WAS imprisoned for seven years at the political brainwashing camp Kaechon in Pyungbuk province.… I was in prison from 1987 till January 1993. I was imprisoned at the age of 39.


I worked at the chief product supply office, I was the general manager of the product supply office, in North Korea we were supplying food and materials to people. And I was imprisoned because the North Korean economy was in recession and the supply of materials was not in good condition, that’s why I was imprisoned.


In Kaechon Prison, there were more than 6,000 prisoners. All of them were political prisoners, and they were treated just like beasts.


And the guards of the prison told the prisoners, “You are not human beings. You must think that you are beasts; otherwise you will not survive.”


Not all the prisoners were ideologically against the government — they were just miserable because of the lack of food, and when they uttered one word of complaint, they were considered to have a problem ideologically.


Among 7,000 prisoners there were about 2,000 housewives who had children at home, and after one month of my life in prison, I saw them publicly executed.


I was crying out, calling my children’s name. And I saw one young housewife who had children age 5 and 7. I saw she was forced to come to the prison, and she shouted “I have children but I’ve been imprisoned, and my husband was imprisoned, and now the children will starve at home.” And I saw her executed, in public, in front of 6,000 prisoners. 

When I was in prison I was treated with no regard to my motherhood. Under the regime of Kim Jong Il’s dictatorship. I was fastened to an iron pole, fastened at my bosom and stomach and legs.


There were six executioners with three bullets each. They would shoot a total of 18 shots to the heart. That is inhuman. I was so sad, and I was so stunned to see that young woman executed although we are not war prisoners and we are not enemies, but they executed a mother of children, just like that.


In the prison there were many Christians. And since the Korean War — in Korea they call it June 25 War — the No. 1 enemy is God. Kim II Sung hated God most.


Between 1956 and ’63 many Christians were imprisoned, and the rest of their families were imprisoned in another separate prison for families. 


In the Kaechon Prison, I believed in God, and I was kicked by the guards, and I had to work in the ironworks factory.

That type of work is done under a high temperature, and my spine started to shrink. And my height became 120-130 centimeters. And I was treated just like an animal. My back became curved like a soccer ball, and the distance between my heart and stomach narrowed, and my shoulders, the bones stuck out. And I looked like a strange animal. 


I felt like I had two heads because my shoulder bone protruded so much. I felt I had become an alien, not a human being in this world. I was just like a beast. I was treated just like an animal, just like a slave. 


I was beaten with a leather strap 10 centimeters wide and 1.5 meters long. And I was kicked with boots. And I became just like a strange animal in shape. 


I experienced this atrocity during my prisoner’s life, for seven years I got only 100 grams of corn for every meal. I had no other


시스템클럽 2003.3.7 게시판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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