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공산주의 대학살 연대기(年代記)
[특집] 20세기 공산주의 대학살 연대기(年代記)
written by. 김필재
월 평균 4만명 학살한 舊 소련 독재자 스탈린
舊 소련의 작가 솔제니친(Aleksandr I. Solzhenitsyn)은 하버드 대학에서 연설 중 "공산주의는 치료할 수 없는 미치광이 병(mad disease)"이라고 했다.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안티테제'(Anti-These)로서 지난 20세기는 공산주의의 광기가 지배한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역사상 공산주의만큼 불과 한 세기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내에 각광받아 세계의 절반 이상을 지배하는 동시에 엄청난 희생을 낳고, 마침내 열병처럼 극적으로 사라진 사상은 없었다.
공산주의, 무신론사상-종교말살론
공산주의는 왜 단명 했는가? 그것은 공산주의의 출발이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 인간성을 저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자본주의는 인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법과 제도를 통해 이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진화 된 반면, 공산주의는 공포와 테러를 통해 퇴화해 버렸다.
공산주의는 무신론(無神論) 사상이며 따라서 종교말살론이다. 마르크스(Karl Marx)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했으며, 레닌(Vladimir Il'ich Lenin)은 “현대 종교는 노동 계급에 대한 억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의 경우 집권 첫 시기부터 “종교는 제국주의 자들의 침략의도구” 이고 “원수가 왼뺨을 때리면 우리는 왼뺨 오른뺨을 다 때려야 한다”며 타인에 대한 사랑을 중요시하는 기독교 교리에 악담을 퍼부었다.
마르크스, 공산혁명을 위한 전쟁 정당화
마르크스는 "전쟁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이를 강화하며 확대하기 위해 행해지는 사회집단 상호간의 무력 투쟁이다."라고 정의했다. 즉 생산수단의 소유를 위한 수단과 방법 및 행위가 전쟁이라고 정의했다. 아울러 그의 주장은 계급투쟁에서 "역사에는 유일하게 항구적인 투쟁만이 존재하는데, 그 투쟁이란 바로 가난한 자가 있는 자에 대한 투쟁"이라고 정의했다. 또한 "이를 성실히 수행하면 사회혁명이 일어나고 이것이 전쟁으로 발전한다"고 정의를 내렸다.
마르크스의 이론을 바탕으로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이후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일어나는 전쟁에는 반대하나,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해방전쟁에는 찬성한다"며 전쟁에 대한 이론을 전개시켰다. 이 같은 공산주의의 폭력혁명 이론은 무서운 결과를 초래해 2차 대전 이후 전 세계를 이념 전쟁의 회오리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대표적인 예가 중국의 공산화, 6.25 전쟁, 베트남전쟁, 캄보디아 내전에 따른 폴 포트의 대학살(The Killing Field)등이다.
舊 소련, 10월 혁명 이전 공산당 가입자의 90% 처형
솔제니친은 1975년 6월30일, 미국 최대의 노조 연합체인 'AFL-CIO' 제1차 초청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문가들의 객관적이고 정확한 통계에 의하면 러시아 혁명 이전 80년 동안 연간 약 17명이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는 혁명운동의 시대로서 짜르(Czar)를 암살하고자 하는 시도가 많았던 시기다. 수십년 동안 지속되었던 스페인의 종교재판도 그 절정기에는 매달 10명 정도 밖에는 처형하지 않았다. '수용소 군도'에서 나는 '체홉'이 1920년 출판했던 저서를 인용한 바 있다. 체홉은 이 책에서 1918~1919년 동안 매달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재판도 받지 않고 처형되었다는 '혁명활동'을 자랑스럽게 보고했다. 체홉이 지적한 이 수치가 완벽한 것인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아 유감스럽다. 그러나 체홉이 이러한 내용에 관해 역사가 조명하기 이전에 스스로 집필한 것은 사실이다. 스탈인의 테러가 절정에 달했던 1937년과 1938년에 처형된 사람들은 월별로 따져보면 1개월 동안 약 4만 명 이상이나 된다."
후버연구소의 러시아 전문가인 로버트 콘퀘스트(Robert Conquest) 박사는 그의 저서인 'TheGreat Terror'(엄청난 폭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1956년 2월 전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폭로하기를 1936년에서 1938년 사이 10월 혁명 이전에 공산당에 입당한 사람의 90%를 죽였고 그 후에 입당한사람은 50%를, 군 장성급의60%를 처형했다."
공산당, 혁명 방해세력은 무조건 처형
공산혁명을 일으킨 후 소련은 귀족 및 군인, 지식인의 저항에 부딪쳐서 국내정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많은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켜 1941년 6월 바바로사(Barbarossa)계획에 의하여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오히려 스탈린으로 하여금 공산혁명의 완성을 결정적으로 도와주는 격이되었다. 당시 스탈린은 혁명에 저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선별하여 애국이라는 명분으로 이들을 징집하여 전선(戰線)으로 몰아넣어 이들 전부를 죽게 만들었다.
실제로 모스크바 전투시기인 1941년 6월22일에서11월 말까지 단일 전투에서 400~500만 명의 사상자를냈다. 이 전투에서 제일 먼저 총알받이가 되어 죽은 사람이 바로 혁명의 방해가 되는 모스크바 인사들이었다. 소련은 전체적으로 2차대전 기간동안 군인 750만 명이 전사했고, 군인부상자 1,400만 명, 민간인 사망자가1,500만 명이발생했다.
스탈린은 혁명에 방해가 되는 대상에 대해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무자비한 처형을 단행했다. 그는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에조프를 내무 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임명하고1936~1939년 기간동안 제일 큰 위협인 군대를 제거했다. 1937년 6월 2일에는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영웅이며 소련군 건설의 1등 공신인 참모총장 두하체프스키 원수 이하 8명의 장군을 나치와 손잡고 스탈린에 대해 음모를 꽤했다는 죄로 처형했다.
스탈린, 자신의 흉상·동상·초상 건립 개인 숭배 강요
스탈린의 군부 대숙청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5,000명이 넘는 고급장교가 처형됐다. 이 숙청으로 5명의 원수 중에서 3명, 15명의 군사령관 중에서 13명, 85명의 군단장 중에서 57명, 195명의사단장 중에서 110명, 406명의 여단장 중에서 220명이 처형됐다. 혁명에 방해가 되는 군부의 고급 장교들을 두하체프스키 원수의 죄목에 뒤집어 씌워 처형했다. 실제로 에조프가 스탈린에게 바친 사형자 명단은 책으로 383권인데 모두 4,500만 명이 넘는 인원을 죽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무자비한 조직가였던 스탈린의 일대기는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소비에트식의 '전설'로 인해 오랫동안 은폐되어왔다. 그 '전설'은 영웅적인 볼셰비키 혁명의 모의자이자 소련의 건국자인 레닌의 충실한 추종자로서 그의 위대성을 과장하고 있다. 전성기에 스탈린은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서 찬양을 받았고,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Our Father)로 불리기까지 했다. 자기 자신의 흉상·동상·초상 들을 많이 건립해 개인 숭배를 강요함으로써 전대 미문의 광신적인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정치국원 라브렌티 베리야에게 독살당한 스탈린
1953년 3월 1일 스탈린은 니키타 흐루시초프 등 정치국원 4명과 식사를 하던 도중 쓰러졌다. 독재자 스탈린은 나흘 뒤 숨졌다. 공식 발표된 사망 원인은 뇌일혈. 그러나 세간에는 독살됐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그로부터 50년 후 스탈린 전문가들이 독살설을 다시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2003년 3월 5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러시아의 역사가 블라디미르 나우모프와 미국 예일대학의 소련연구가인 조나단 브렌트는 공저 `스탈린의 마지막 범죄`에서 독살설 근거를 상술하고 있다.
이들은 정치국원이었던 라브렌티 베리야를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 스탈린 사망 후 베리야는 "내가 그를 해치우고 모든 사람을 구했다"며 자랑한 내용이 흐루시초프 회고록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정치국원 4명이 모두 공모했을 수도 있다고 덧붙이고 있다.
당시 의료진의 보고서 초안에는 스탈린이 숨지기 전 광범위한 위장 출혈을 보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3개월 뒤 공개된 공식 보고서에는 이 내용이 빠져있다는 것이다. 당시 경비병 한 명도 베리야로부터 병세에 대해 함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의 음식에 과다 복용할 경우 장기출혈을 일으킬 수 있는 항응혈제 `와파린`이 섞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공산화 이후 가장 많은 기독교인들을 학살한 국가
러시아는 공산화 이후 2,700만명이라는 역사상 가장 많은 기독교인들을 학살한 국가가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교회를 다 파괴시키고 기독교인들은 시베리아로 끌어가고 그보다도 더 무서운 동북쪽 마가단으로 보내 죽게했다. 겨울에는 얼어붙은 모스크바 강가에 구멍을 파고 벌거벗겨서 산채로 마구 밟아 집어넣었고, 여름에는 배 스크류에 사람들을 묶어서 찢어 죽였다.
모든 교회의 종탑과 십자가들을 꺾어버렸고, 교회들을 불지르거나 부수거나 장기 두는 곳 혹은 극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모든 것이 1910년부터 1960년대까지 일어난 일이다. 이렇게 해서 공산화 과정에서 2,700만명의 기독교인과 그 외에 반동분자들 4,000~4,500만 명을 합해 모두 7,000만 명이 학살됐다.
공산주의 경제체제, 非능률과 非생산의 전형
한편 경제에 있어 소련의 공산주의는 경쟁상대인 자본주의 경제와 비교하여 기술·경제면에서만 뒤지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많은 낭비 요인들이 있었다. 경쟁력·합리화·기술혁신을 이룩할 내부적 동기가 없었던 탓으로 소련의 산업 부문뿐만 아니라 동구의 소련식 복제판 경제도 관료적 비능률과 비생산적인 자원낭비의 전형이 되어 버렸다.
이념적으로 고립된 채 중앙 집중적 관료체제를 이룩한 소련의 모습은 외부 세계에 대해 경제적·사회적 역동성의 실례를 보여 주지 못하였다. 한 가지 품질의 소비제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글자 그대로 당의 정치국 선에서의 정치적 의사 결정을 거쳐야 했으며, 소련 통치 70여 년간의 기간 동안에 세계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상품을 한가지도 생산된 적이 없었다.
舊 소련 관료, 불필요한 업무량으로 곤혹치러
그러한 경제체제에서는 국가 관료가 수백만 종의 물품의 쿼터를 배정하고 가격을 매겼으며, 관리자들은 혁신을 위한 아무런 유인(誘引)도 없이 생산을 감독했다. 노동자들은 생산성을 증가시키거나 품질을 향상시킬 아무런 동기도 없이 생산에 종사했다. 경작이 허용되었던 사유경작지는 전체 경지면적의 4%에 지나지 않았으나, 개인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소련 전체 식료품 공급량의 25%를 생산하였다.
공산주의 경제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시장기능에 맡겨 두어도 잘 운영될 수 있는 불필요한 업무량으로 관료들이 일에 파묻힐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예를 들어 2,400만 종이나 되는 생산 품목에 대한 연간 목표량을 산정하는 임무 같은 것들이다.
1987년 11월 2일자 ‘이즈베스티야’(Izvestia)지는 “우리의 관리기구는 실로 방대하여 1,800만 명이 관여하고 있다. 이는 전국 노동력의 15%에 해당하며 인구 6∼7명당 1명의 경영관리자가 있는 셈이다.”라고 보도했다. (konas)
모택동의 문화대혁명과 중국인 대학살
"모택동은 영원한 반역자이며, 신의 법이든 사람의 법이든 자연법이든 마르크스주의 법이든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면서 인민을 30년간에 걸쳐 하나의 비전 추구로 이끌었다. 그 비전은 처음에는 웅대했지만, 점차 망상이 되어 드디어 악몽이 되었다. 용두사미(龍頭蛇尾)이며 무참한 결말이다"(스튜어트 슈람·Stuart R. Schram, 하버드 대학 교수)
12명의 작은 모임에서 출발한 중국 공산당은 불과 20여 년 만에 거대 중국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리고 중국 역사에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많은 국가처럼 이들도 분열되거나 와해될 것이라는 예측을 벗어나 12억 중국인들을 억압하며 50년 넘게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이같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통치 기반을 다진 인물이 바로 모택동이다.
1949년 봄 모택동은 지금까지의 중국혁명은 '지방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는' 비(非)정통적인 노선을 걸어왔으나 앞으로는 도시가 지방을 이끌어가는 정통노선을 걷게 되리라며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의 성립을 선언했다. 당시 중국 인민들은 어느 누구도 신생 공화국의 희망찬 미래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빗나갔으며,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었다. 모택동은 타고난 혁명가이자 반란의 명수이며 선동가였다. 그는 新 중국 건설의 모든 문제를 대중의 지지를 동원해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반란으로 해결하려 했다.
新 중국 건설의 선두에 선 모택동은 인민을 총동원해 난국을 돌파하는 특유의 혁명적 방법을 동원했다. 소련이 수년 내 공업생산력에서 미국을 따라잡게 될 것이라는 흐루시초프의 허풍에서 힌트를 얻은 모택동은 1958년 15년 내에 영국을 따라잡겠다고 선언했다. 소위 '대약진운동'의 시작이었다.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은 특유의 대중동원을 통해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공업과 농업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봉건적 후진사회인 중국을 빠른 시일 내에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었다.
모택동, “경제 뒤떨어지고 가난할수록 혁명하려 한다”주장
우선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농촌에 대규모 집단농장인 '인민공사'를 설치했다. 인민공사는 완전한 평등주의에 입각한 농업공동체로 농민의 사유재산은 모두 공사의 것이 되며, 막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식사도 같이 하는 한편 모든 수입은 평등하게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5억의 중국 농민은 조상 대대의 재산을 처분하고 2만6천여 개의 인민공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됐다.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처분했다. 살고 있던 집들도 부수고 그 재목으로 공동막사를 지었다.
무소유의 이상적 '공산사회'가 마르크스와 레닌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가난한 중국농촌에서 한때 실현됐던 것이다. 모택동은 한 메모에서 "레닌은 뒤떨어진 나라일수록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어렵다고 말했다. 현재 보는 바와 같이 이것은 올바르지 않다. 경제가 뒤떨어질수록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수월하며 사람은 가난할수록 혁명을 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인민공사’결과 도시와 농촌에 식량부족 사태 발생
또 한 가지, 대약진 운동에서 모택동은 도시와 농촌의 '4해(害)', 즉 파리 모기 쥐 참새를 퇴치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에는 모든 국민이 동원됐다. 왜 참새가 포함됐는지는 모르지만, 참새잡이 모택동 전술은 기발함을 넘어서 소름이 끼친다. 전 국민이 전국적으로 총동원돼 참새가 땅에 앉지 못하도록 쉴새없이 소리를 쳐서 쫓는다. 앉지 못하고 하늘을 빙빙 돌던 참새는 그만 지쳐 떨어져 최후를 맞게 된다. 대약진운동 중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4해 퇴치운동'이었다.
대약진 운동의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1958년 가을 들판에는 곡식이 넘쳐 대풍이 들었고 용광로에서는 엄청난 철이 쉴새없이 생산됐다. 그런데 분명히 대풍이라고 했지만, 인민공사에서 제공하는 음식의 질과 양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기 시작했다. 도시에도 물품과 식량부족이 초래됐다. 그리고 겨울부터 재앙이 찾아왔다. 1958년 중국에서는 너무도 많은 것이 잘못되고 있었던 것이다.
1958년은 풍년이었다. 그러나 곡식들은 대부분 거둬들이지 못한 채 썩어갔다. 건장한 마을 청장년들은 모두 용광로에 매달려야 했다.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허리가 휘도록 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지방 지도자들은 모택동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생산량을 부풀려 보고했다. 생산량에 따라 세금이 정해졌기 때문에 농민들은 엄청난 세금을 치러야 했다.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는 생산된 곡식을 모두 세금으로 내는 바람에 먹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은 곳도 있었다.
‘대약진운동’으로 굶어죽은 사람만 3,000~4,300만 명
더욱이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은 빚을 갚기 위해 소련으로 보내졌다.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기근이 초래되는 와중에도, 모택동은 곡식을 소련으로 보냈다. 자신의 인민공사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흐루시초프가 아는 것이 두려웠던 탓이다. 그러나 가장 큰 잘못은 인민공사 자체에 있었다. 인민공사에서 농민들은 일할 의욕도 생산량을 늘릴 열의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일하지 않는 옆사람과 동일한 수입밖에 얻을 수 없는 상황에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생산량은 급속히 줄어갔다.
마을마다 만들어진 용광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었으며 화근이었다. 토법로는 철광석을 제련하여 철을 얻는 것이 아니었다. 철을 녹여 철을 만드는 용광로에 불과했다. 인민들은 냄비, 주전자, 칼, 수저, 난로, 도끼, 삽, 가래, 금고, 자물쇠, 심지어 트랙터까지 모든 철을 용광로 속에 던져버렸다. 여기서 얻은 철은 거의 사용할 수 없는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용광로를 지피기 위해 집집마다 가구와 문짝을 태웠고 급기야 숲을 태워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의 산이란 산은 모두 민둥산으로 변했다.
실로 중국 농촌은 자멸을 향해 매진했으며, 중국은 철기시대에서 석기시대로 퇴화했다. 농민들은 밭을 일굴 농기구가 없었다. 대기근이 찾아왔다. 인재였다. 아프리카에서 보던, 뼈만 남고 배가 불룩한 어린이들과 굶어죽은 시체를 1959년의 중국에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사람보다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에서 굶어죽은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다. 최소한 3,000만 명, 많게는 4,300만 명이 죽었다는 추정도 있다. 그러나 모택동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혁명의 대의를 위해 생명은 희생돼야 한다"고 했다. 6억 국민을 대상으로 한 그의 실험은 5∼7%의 인구를 희생하면서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모택동, 黨 지도부 파괴 위해 ‘문화대혁명’ 일으켜
대약진 운동이 실패한 이후 모택동은 또 하나의 혁명을 꾸몄다. 바로 '문화대혁명'이다. 문화혁명은 1965년 11월 강청(江靑)의 수하인 상해의 이론가 도문원이 '문회보'에 쓴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에 의해 시작됐다. '해서파관'은 북경 부시장 '오함'이 쓴 희곡이다. 해서는 명대의 충신으로 폭군이었던 황제의 잘못을 용감하게 직언하고 충성을 다한 인물로, 모택동은 해서를 본받으라고 장려하기까지 했었다. '오함'도 해서를 본받으라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해서파관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모택동이 친 덫이었다. 모택동은 과거에도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을 주창하여 지식인들로 하여금 정적들을 비판하도록 하여 그들을 숙청하는 데 활용한 적이 있었다. 충신 해서가 황제에게 직언하고 고초를 당했듯이, 팽덕회도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모택동에 의해 숙청 당한 바 있었다. 많은 당간부들은 팽덕회가 해서와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때가 온 것이다. 모택동과 강청 일파는 '해서파관'은 우익분자 팽덕회를 숙청한 모택동을 해서에 빗대 비난하는 것이며, 그 배후에는 유소기 등소평 등 당 지도부가 연루돼 있다고 뒤집어 씌웠다.
모택동이 그의 충직한 당 지도부를 파괴하기 위해 동원한 것은 9살에서 18살에 이르는 초중고의 어린 학생들, 소위 '홍위병(紅衛兵)'이었다. '백가쟁명' 때 지식인들은 정적들을 비난해주었지만, 모택동도 비난했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그럴 염려가 없었다. 그들은 사리를 판별할 눈이나 비판능력도 없으며 단지 맹목적이었다. 모택동은 이 점을 활용했다.
홍위병, 관리나 부유한 자, 지식인 집에 난입 폭행과 살인 저질러
모택동은 1966년 가을 천안문에 여덟 차례나 오르며 전국에서 모여든 수천만의 홍위병들에게 반란을 획책했다. 모택동은 홍위병에게 사구(四舊), 즉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습, 낡은 습관을 타파하라고 지시했다. 중국 전역에서 학생들이 당 사령부와 사구를 폭파하기 위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파괴와 폭행, 그리고 살인을 일삼았다. 관리나 부유한 자, 지식인의 집에 난입하여 폭행과 살인을 저질렀다.
일례로 1967년 8월 13일부터 10월 7일 까지 후난성(湖南省) 다오현(道縣) 인민 무장부 말단 민병들이 ‘상강풍뢰(湘江風雷)’의 조직원과 검은 5부류를 도살했다. 66일 동안 10개 구역 36개 공사(公社), 468개 대대(大隊), 2778가구에서 총 4,519명이 연루되었다. 그 중 ‘지주, 부농, 반혁명, 나쁜 사람’이 38%를 차지했고, 지주와 부농의 자녀가 44%였다. 살해당한 사람 중에서 연령이 제일 많은 사람은 78세였고 가장 어린 경우는 생후 10일 밖에 안 된 아기였다. 이것은 다만 특정지역에서 문화대혁명 중에 발생한 한 가지 사건에 불과하다.
1968년 초, ‘혁명위원회’ 가 설립된 후, 계급 대오(隊伍)를 조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 당시 네이멍구(內蒙古)에서는 ‘내인당(內人黨)’을 조사하면서 3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해한 유혈사건을 만들어냈다. 1968년 광시(廣西)에서는 4.22 군중 단체에 대한 무장 대학살에 수만 명이 참가했으며, 당시 사망한 사람이 11만 명에 이른다.
농촌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홍위병들은 옛 지주 소실의 자식이거나 金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되는 자, 이웃이 허위로 흑색분자로 고발한 자 등 아무 죄가 없는 마을사람들을 자본주의체제 부활을 노리는 중죄인으로 분류해 가차없이 사형에 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국가조직은 완전히 와해됐다.
제2인자로 국가주석이었던 유소기는 백주에 사무실에서 홍위병들에게 붙잡혔다. 경호원들도 못 본 체했다. 등소평도 붙잡혔다. 부인과 자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위 '비투대회'(批鬪大會)에 끌려가 굴욕적인 자세로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유소기는 결국 모진 고문 속에 살해됐다. 등소평의 장남은 북경대에서 홍위병들에게 고문을 받다가 4층에서 던져져 평생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홍위병, 외교부 점거 후 해외 중국 대사관에 혁명 선전·공산주의 선동
중국 문제에 정통한 뉴욕타임스의 대기자 해리슨 솔즈베리(Harrison E. Salisbury)는 모택동 홍위병의 잔학성을 가리켜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도, 아르헨티나의 파시스트도, 스탈린의 비밀경찰도 모택동의 홍위병에게는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낡은 것을 없애라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문화재들은 파괴되고 책은 불태워졌다. 심지어 중국 고전극인 경극의 가면과 의상도 불태워지고 배우들도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얼마나 많은 인류유산이 문화혁명 중에 파괴됐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시간이 감에 따라 모택동조차도 홍위병을 통제할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됐다. 국가주석이 백주에 붙잡히는 판에 국가기관이 무사할 리 없었다. 홍위병들은 중국 외교부를 점령 폭파했다. 그들은 외교문서를 철저히 파괴했으며 소련, 영국 등 외국 대사관에 침입해 방화했다. 외교부장 진의는 자아비판을 해야 했으며 고문을 당해 결국 죽었다. 외교부를 점거한 그들은 해외의 중국 대사관들이 혁명을 선전하고 지역 공산주의를 선동하는 역할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로 인해 중국대사들은 대부분 소환됐고 몇몇 국가들은 중국과 단교했다. 대외 무역은 급격히 감소했다. 중국의 대외정책은 다른 부문들과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모택동, 커다란 침대 위에서 10대 소녀들과 섹스 즐겨
모택동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인민해방군을 동원했다. 그리고 68년 7월 홍위병을 해산시키고 1000만 홍위병을 모두 농촌으로 하방(下放)시켰다. 홍위병 세대는 지금도 중국의 골칫거리다. 오십 줄의 그들은 한창 공부할 나이에 농촌에서 똥거름을 치며 지냈다. 홍위병이 제거된 이후에도 76년 9월 모택동이 죽을 때까지 문화혁명의 광기는 계속됐다. 약 1억의 중국인이 문화혁명 때에 모진 고초를 당한 것으로 알려진다.(당원만 300만 명 숙청)
모택동은 현대의 진시황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날들을 커다란 침대 위에서 중국 고전들을 읽거나 10대 소녀들과 섹스를 하면서 살았다. 마오쩌둥이 죽은 뒤 문화혁명의 목적과 결과가 모두 부정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아예 정치를 외면하게 되었다.
한편 중국 인민들 사이에서는 심각한 파벌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 문화혁명 기간에 서로 반대 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같은 작업장에서 함께 일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그런 일은 그들이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인류 역사상 자신이 만든 체제를 부수려고 그와 같이 엄청난 대중의 힘을 동원한 지도자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 체제에 가해졌던 폐해는 심각한 것이었으며 모택동이 궁극적으로 달성하려고 했던 목표는 실현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은 당 ·국가 ·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모택동의 극좌적 오류이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했다. (konas)
反美·反戰-간첩과 부패로 패망한 베트남
자유베트남은 시종일관 反美·反戰 데모를 주도했던 간첩과 시민·종교단체의 조직적인 선전선동결과 미군의 전면철수 후 공산화 됐다. 베트남은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맹을 훨씬 앞질렀지만 부패했고, 휴전협정 이전부터 사회 곳곳에 침투한 간첩과 시민·종교단체들은 부패척결과 反美·反戰 평화를 명분으로 베트남의 신경망을 장악해갔다.
197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미군과 한국군이 전면 철수 하자 사이공에는 100여개의 애국단체, 통일 운동단체들이 수십 개의 언론사를 양산하여 베트남의 좌경화 공작에 앞장섰다.
목사, 승려, 학생, 직업적 좌경인사, 反戰운동, 인도주의 운동 등 가능한 모든 운동체가 총동원되어 티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1975년 베트남은 월맹 정규군의 무력침공과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패배한 것 이상으로 이들 100여 좌익 단체의 선전전에 당했던 것이다.
5만여 명의 간첩, 민족주의자·평화주의자로 위장
이들은 호치민이 1930년 2 월에 창당한 베트남 공산당,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의장인 웬후토가 1962년 1월에 창당 한 인민혁명당에서 침투시킨 조직원들이다. 패망 당시 베트남에는 공산당원 9500 명,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5만여 명의 월맹간첩들은 민족주의자, 평화주의자, 인도주의자로 위장한 채 시민·종교단체는 물론 대통령비서실장과 장관, 도지사 등 권력핵심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은 미군의 전면철수 후 베트남패망으로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간 이후에나 확인됐다. 1967년 치러진 베트남 대통령 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된 야당지도자 쭝딘쥬도 대표적 간첩이었다. 그는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들끼리 피를 흘리는 모습을 조상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냐"며 월맹에 대한 포용정책을 주동했다.
간첩들이 가장 많이 침투했던 것은 시민·종교단체의 부패척결운동과 反美·反戰평화운동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선전선동을 통해 대중적 지지기반을 확대해가면서,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전쟁에 미친 또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자유베트남 정부 협조한 사람들 모두 재교육 받아
베트남은 공산화 이후 지식인, 공무원, 군인, 종교인, 부유층, 그리고 월남정부에 협조한 사람들은 전부 재교육을 받았다. 그들은 적대(敵對)계층으로 분류됏으며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로 간주되어 승자의 보복대상이 됐다. 탄압과 차별, 학대와 폭정이 자행되었고 전국 각처에 재교육 수용소가 설치되어 적대계층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잡아 가두고 공안경찰을 증원(增員)하여 국민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고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것을 통제했다.
특히 가혹한 육체노동을 강요했다. 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규정하여 "부모의 흘린 피와 땀, 자식이 흘린 피와 땀이 합쳐야 나라가 번영한다"고 선전하면서 무자비(無慈悲)한 노동을 강요했다. 논과 밭은 국유화되고 영농은 철저한 3모작을, 일반 국민은 헌금을 강요받았으며 돈이 없는 자는 노력봉사를 해야만 했다. 노동자는 한달에 15kg의 쌀을 배급받아 생활해야 했고, 전쟁부채 상환비, 전비(戰費)기금을 내야 했다.
공무원·경찰·정보요원을 제국주의 앞잡이·도구
먹는 것을 철저히 통제하고 수중에 돈이 없게 하여 국민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는 철저한 국민재교육을 시행했다. 또한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종래 부를 축척한 모든 것을 부정해 자살을 하는 사람이 속출했다. 이 국민 재교육은 "공무원(公務員)은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경찰(警察) 및 정보요원은 제국주의의 도구(道具)로, 군인(軍人)은 무력으로 총을 가지고 대항했던 사람으로, 문예(文藝)인은 민족정신을 교란시킨 사람으로, 종교인(宗敎人)은 국민을 유혹하여 미신에 빠지게 하고 우매하게 만든 사람으로, 자본가(資本家)는 국민을 착취하여 강압적 노동을 시켜서 반혁명에 앞장을 섰으며 국민에게 피의 부채를 지고 있다"는 죄를 물어 재교육을 시켰다.
"우리 공산당은 이 반역자들을 재교육 과정을 통해서 사회주의 혁명에 동참할 선량한 국민으로 개조하고, 사회에 필요한 사람으로 선도할 것이며 노동을 경험하게 하여 자력갱생(自力更生)의 길을 열어준다."라고 선전했다. 한 수용소에 2.000명 정도 수용했으며 성(省) 별로 1개 이상이 있고 사이공 주변 등 도시 주변에는 대상자가 많음으로 여러 곳에 설치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밀림지대에 위치시켜 탈출을 방지하고, 나무를 벌목하여 수용소를 짓고 개간하면서 식량은 월 9kg을 지급하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자급자족하도록 했다.
즉결처분 인원 포함 최소 30~200만명 사망
수용소 방침 자체가 체형(體刑) 및 학대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어 있었고, 작업 실적에 따라서 수용소장의 재량으로 급식의 양을 결정했다. 따라서 제거해 버리고 싶은 적대계층의 사람은 굳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더라도 제거할 수 있게 제도를 만들었다. 가족이나 다른 국민들, 외국(外國)의 항의를 벗어나기 위한 교묘한 방법을 강구해 냈다. 수용소 기간에는 면회가 일체 사절되었고, 편지도 1년 또는 2년에 한번 보낼 수 있었으며 의료혜택은 전무하여 병에 걸리면 바로 죽는 것이었다.
말라리아 등의 열병과 뱀 전갈의 독충과 영양실조 및 미래에 대한 포기는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었다. 자연스럽게 혁명에 방해가 되는 사람을 제거했다. 즉결처분된 사람들을 포함하여 그 인원은 30만에서 200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정확한 통계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월남 군인만 100만이 넘는 것을 감안할 때, 하사관 및 초급장교까지 수용소로 보냈으며 공무원 종교인 경제인 월남 정부 협조자와 그 가족까지를 포함하면 최소한 100만 명 이상의 상당한 숫자가 재교육을 받았다고 판단된다.
한편 공산치하에서 살기를 거부한 수많은 남부 베트남인들은 즉각 해외로의 탈출을 시도했다.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 망명길에 올랐던 1세대 탈출자들은 미국 등 서방으로 이주하여 비교적 쉽게 그곳에서 정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6년부터 탈출한 대부분의 베트남인들은 안전한 이주 및 재정착의 보장없이 무작정 국경을 넘거나, 배를 타고 공산베트남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1976~1992년말까지 총 792,893명 베트남 탈출
이들중 상당수는 다른 나라에서 환영을 받지 못했고, 동남아 일대의 바다를 정처없이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들이 바로 보트피플(Boat People)이라 불리우는 베트남 난민이다. 1976년부터 1992년말까지 동남아지역으로 탈출한 사람들의 수는 총 792,893명에 이르렀다. 1979년부터 1992년말까지 동남아국가들의 난민 수용소(refugee camp)를 거쳐 최종적으로 난민자격(refugee status)을 인정받아 서방 등 제3국에 정착한 난민수는 438,436명으로 나타나고 있다.(konas)
폴 포트와 크메르루주의 캄보디아 대학살(The Killing Field)
"우리는 그동안의 투쟁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전혀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할 것이다. 과거로부터 모든 것을 단절하고 전통은 사라질 것이다. 화폐와 경제체제가 사라져 국가가 인민들의 모든 것을 돌보는 사회를 건설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캄보디아 건설을 위해 수도에 있던 3백만의 인민을 농촌으로 분산시켰다. 이제 농촌은 혁명의 전초기지가 될 것이며 인민들은 앞으로 사라지게 될 여러 도시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체가 될 것이다" (1984년 폴 포트, Grant Evans & Kelvin Rowley 共著, `Red Brotherhood at War`)
1975~1978년까지 캄보디아에서는 공산혁명 결과 200만 명 넘는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3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이 기간동안 캄보디아는 혁명지도부와 그 하수인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일만 하는 동물이나 다름없었다. 역사학자들이 1975년 4월 17일 프놈펜 점령 직후 캄보디아의 2천년이 넘는 역사는 끝났다고 밝혔듯이 공산 혁명은 캄보디아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송두리째 변화시켰다.
공산주의의 대학살로 얼룩진 캄보디아의 비극적 현대사는 크게 5단계로 나누어진다. 1단계(1953~60년대 말)는 1953년 독립한 뒤부터 시아누크(Norodom Sihanouk*82세)국왕이 중립 정책을 펴면서 미국과 갈등을 빚은 시기다.
2단계(1970~75년)는 프놈펜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시아누크 국왕이 물러나고 론 놀(Lon Nol)장군의 친미정권이 들어서면서 크메르루주 군과 내전을 벌인 시기다.
폴 포트 등 대학살 주동자 대부분 프랑스 유학 출신
3단계(1975~78년)는 1975년 4월 수도 프놈펜이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군에 함란된 후부터 1979년 베트남군의 침공으로 폴 포트 정권이 몰락하기까지의 살벌했던 기간이다.
4단계(1979~91년)는 10만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해 폴 포트 정권을 무너뜨린 뒤 헹 삼린, 훈 센의 친 베트남 정부군과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던 시기이다.
5단계(1991~현재)는 파리평화협정 쳬결뒤 U. N 평화유지군 1만 6000명이 포함된 유엔 캄보디아 임시행정청(UNTAC)의 선거 감독 아래 프놈펜에 연립정부가 들어선 후 잇단 정치 불안 속에 1997년 훈 센이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했을 때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다.
캄보디아 대학살의 주동자인 폴 포트(본명 ‘살로트 안사르’*1925∼1998), 키우 삼판, 이엥 사리를 비롯한 크메르루주의 지도자들은 식민지 시절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던 경력을 지니고 있었다. 모택동 주의에 기울어 있던 이들은 시아누크 국왕체제에 불만을 품고 1960년대 후반부터 캄보디아-베트남 접경지대에서 세력을 키웠다. 그러다 친미 성향의 론 놀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자 이에 대해 무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친공반미(親共反美) 성향의 시아누크 국왕
캄보디아가 이처럼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공산화 된 데에는 시아누크 국왕의 ‘친공반미’(親共反美)적 성향도 한몫을 했다. 실제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나는 크메르루주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그들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애국자들이다. 나는 불교신자지만 부패하고 친미 허수아비인 론 놀 치하의 불교국 캄보디아 보다는 정직하고 애국적인 붉은 캄보디아를 택하겠다.”(1973년 7월 18일자 워싱턴포스트)
미국은 1970~75년 기간동안 캄보디아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18억 5000만 달러어치의 군사경제 원조를 퍼부었다. 그러나 론 놀 정권의 부패한 장군들은 미국의 원조를 캄보디아의 발전에 쓰지 않았다. 부패와 내전으로 경제는 더욱 나빠졌다. 1973년 한 해의 인플레 275%에 이르렀을 정도다. 그럴수록 론 놀 정권은 美 원조에 매달렸다. 당시 캄보디아는 국고 수입의 95%를 미국의 원조로 충당했다.
폴 포트, 스스로를 열렬한 모택동 주의자로 소개
한편 캄보디아 대학살의 주동자로 자신을 ‘모택동 주의자’라고 여겼던 폴 포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프랑스계 학교에서 교육받고 정부 장학생으로 1948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가게 된다. 그는 1950년 여름 방학에 유고슬라비아에서 노력 봉사활동을 하면서 공산주의자인 조시프 브로즈(Josip Broz, 티토의 본명)에 매료 된 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다.
1952년 캄보디아로 귀국한 폴 포트는 지하공산당 운동을 벌이다 ‘붉은 크메르’라는 뜻의 ‘크메르루주’라는 공산게릴라군을 조직, 1967년 시아누크 정부에 대해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하편 론 놀 장군은 도피할 때 가지고 간 거액의 달러뭉치로 하와이에 저택을 장만했다. 1년도 못돼 캄보디아 서북부 몇 개 주(州)를 장악한 폴포트는 1975년 4월 17일 수도인 프놈펜에 입성, 혁명정권의 최고 지도자로 3년 7개월 동안 ‘피의 통치’를 했다.
당시 폴 포트는 두 부류의 적을 설정했다. 먼저 내부의 적은 폴 포트 정권에 저항했던 사람들로 크메르루주 군은 이들을 적발하는 대로 처형했다. 외부의 적은 크메르루주식의 공산주의*사회주의를 반대하는 세력으로 미국과 같은 자유진영의 국가였다.
크메르루주, 농민이 안경 썼다는 이유로 학살
폴 포트의 크메르루주 정권은 공산주의, 민족. 민중주의를 축으로 자본주의나 외세에 연 계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처형했다.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는 폐지되었고 수도 프놈펜의 시민은 노동자들을 제외하고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화폐제도는 폐지됐고 프놈펜 중앙은행은 폭파되고 집단 농장이 곳곳에 세워졌다.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 공무원, 교수, 의사, 약사 등 전문직 종사자와 중류층 이상의 사람들은 무조건 처형 대상이었다.
과거 6,25 전쟁당시 공산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손을 보고 손바닥에 못이 배기지 않은 사람들은 무조건 부르주아로 몰아 본인과 가족까지 학살했다. 크메르루주는 총알을 아끼기 위해 구덩이에 생매장시키고 우물에 처넣기도 했다. 심지어 일자무식의 농민이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오해를 받고 죽임을 당했으며 국제경기에 참가한 경력이 있는 운동선수 2천명이 학살되기도 했다.
크메르루주 군은 캄보디아의 중산층은 모조리 처형했던 것이다. 크메르루주 군의 손으로 넘어간 캄보디아는 모든 형태의 종교가 조직적으로 말살되었다. 불교 사찰들과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가톨릭교회들은 파괴되거나 곡식을 보관하는 창고로 바뀌었다. 특히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이 기간에 순교했다.
당시 캄보디아 내의 기독교인 수는 약 1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90%의 기독교도들이 폴 포트의 추종자들에게 처형당했으며 종교적인 관습과 가르침이 금지됐다. 프놈펜의 가톨릭 성당과 바탐방의 캄보디아 복음교회가 폐쇄됐으며, 수천 명의 난민들이 태국국경으로 탈출했다. 이와 같은 모든 일들이 ‘앙카르’(Angkar)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앙카르’는 캄보디아 말로 ‘상부조직’이란 뜻으로, 오류를 범하지 않는 권위를 의미했다.
1만 5천명의 캄보디아 젊은이들이 대학살의 주역
한편 이와 같은 광란의 주동자들은 1만 5천명의 캄보디아의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중국의 홍위병처럼 15세 이하의 소년들이 ‘가진 자’에 대한 증오심과 붉은 혁명 사상으로 무장되어 크메르루주 군의 잔인한 살인광풍에 앞장섰던 것이다. 크메르루주 치하의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는 곳이 프놈펜 시내에 자리 잡은 ‘투올 슬렝’(Tuol Sleng) 감옥이다.
이 감옥은 원래 여자 고등학교 건물이었는데 감옥으로 개조하여 심문실, 고문실, 유치실로 만들어 혁명정권의 악명 높은 숙청의 산실로 이용되었다. 크메르루주 군이 남기고 떠난 서류뭉치와 흑백 필름으로 미뤄볼 때 모두 1만 6000명이 이 감옥을 거쳐 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은 자술서에 3명이 동조자 이름을 써야 했다. 이런 식으로 잡혀온 사람들은 다시 다른 3명을 끌어들여야 했다.
실제로 크메르루주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1978년 5월 27일 하루 동안에만 582명이 처형된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 감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지 10여명에 불과하다. 이들은 투올 슬렝의 자가 발전기 기술자, 폴 포트의 초상화를 그리던 화가, 그리고 폴 포트의 흉상을 만들었던 조각가등이다. 현재 투올 슬렝감옥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시체를 발굴한 구덩이와 위령탑이 조성되어 있으며 이 위령탑 안에는 발굴된 시체들의 두개골이 안치되어 있다.
크메르루주, 집권기간 동안 150~200 만명 학살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이어진 크메르루주 집권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학살 됐는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캄보디아에서는 1962년 인구조사를 실시한 이래 내전이 계속된 1980년대 내내 인구조사작업을 하지 못했다. 1979년 단숨에 태국으로 달려가 캄보디아 국경의 난민촌에 자리를 잡은 키어넌은 난민들을 대상으로 수많은 인터뷰 자료들을 모았고 그 자료들을 근거로 크메르루주 집권기간 동안 무려 150~200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학살당했다는 논문과 기고문을 남겼다.(Ben Kiernan, ‘Genocide and Democracy in Cambodia’, 1993)
이외에도 미국과 네덜란드 자금으로 세워진 ‘캄보디아기록센터’의 크레이그 애치슨도 희생자 규모가 200만이 넘는다고 주장했다.(Craig Etcheson, ‘The Rise and Demise of Democratic Kampuchea’, 1984)
한편 일생동안 학살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던 폴 포트는 1979년 캄보디아가 친(親)베트남군에 의해 프놈펜이 함락되자 총리에서 사임한 뒤 게릴라전을 재개, 1982년 크메르루주 최고사령관이 되었다가 1985년 공식적으로 지도자 직에서 물러났다. 정부군의 소탕작전과 내분으로 크메르루주가 약화되던 중 1997년 부하들에 의해 체포*자택 연금되었다가 1998년 사망했다.
현재 살아있는 크메르루주 주요 간부 가운데 구속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現 훈 센총리로부터 정치적 사면을 받아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크메르루주 전범재판을 통해 캄보디아가 내전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진 가장 큰 이유는 여전히 캄보디아가 공산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konas)
300만명을 아사(餓死)시킨 살인마 김정일
프랑스의 북한인권위원회 위원장인 피에르 리굴로 (Pierre Rigoulet*'사회사평론' 편집장)은 지난 1997년 발간된 ‘공산주의 黑書’(The Black Book of Communism-Crimes, Terror, Repression)에서 북한공산주의의 죄상을 별도로 다룬바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당내숙청: 10만명 ▲강제수용소: 150만명 ▲6.25 전쟁 및 남한에 대한 자살특공대: 130만명 ▲기아 및 이로 인한 식인(食人)행위: 50만명 ▲합계 340만명의 인원이 북한 공산주의 정권에의해 희생당했다고 폭로하고 있다.
미국의 인권운동단체인 '프리덤 하우스'(freedom house ; 이하 FH)는 세계 각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실현정도를 1부터 7까지로 표현하여 매년 연말에 이를 발표하고 있다.
1에 가까울수록 인권상황이 좋은 나라이며 7에 가까울수록 인권상황이 좋지 않은 나라인데 다시 이를 등급화 하여 1∼2.5까지를 F(Free)-자유국가, 3∼5.5는 PF(partly free)-부분적인 자유국가, 5.5∼7은 NF(Not free)-전혀 자유가 없는 국가로 분류하고 있다.
美 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 北은 자유가 전혀 없는 국가로 분류
프리덤 하우스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세계의 자유 2005년’에서 북한은 전 세계 192개국 가운데 정치적 자유와 시민의 자유 모두 최하 등급인 평점 7점(최고 점수 1, 최하 점수 7)을 받아 미얀마, 쿠바,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소말리아, 수단, 시리아, 투르크메니스탄과 함께 최하위 9개국에 포함됐다.
FH의 보고서가 처음 발행되던 1972년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고 7등급을 석권(?)한 국가는 지구상에 북한이 거의 유일하다.
북한에서는 길게 잡아 김일성이 사망한 94년부터 98년까지 5년간, 짧게 잡으면 95~97년까지 3년 동안 북한에서 식량난이 직,간접적 원인이 되어 아사, 병사, 장기 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한 주민은 수백만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아사자 수와 관련, 한국정부의 공식발표 20여만 명(이종찬 전 국정원장 발언)을 비롯하여, 2백만명설, 4백만명 근접설 등 큰 차이를 보여왔다.
美 존스 홉킨스대와 시민단체 등은 3백만 명 정도로 추산한 바 있으며, 이는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가 증언한 북한의 노동당 조직지도부 책임간부의 설명과 일치되어, 지금은 3백만 명 아사가 가장 유력하다.
北 아사자, 적대계층 많이 사는 함경남북도에 집중
북한의 아사자는 대부분 김정일의 선군정치(先軍政治)에 따라 식량을 軍에 먼저 배급 하고 핵·미사일 등 무기개발에 경제력이 집중되며 발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단지 94년부터 매년 일어난 자연재해로 농업이 큰 타격을 받아 식량부족이 됐다고 정도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기아에 견디지 못하고 중국으로 탈출한 수십만의 북조선 난민들은 인육(人肉)을 먹을 정도로 극심한 기아와 대량의 아사자 발생을 이구동성으로 증언하고 있다.
문제는 그 원인이다. 아사자 발생을 인정하더라도 그 이유를 자연재해나 농업의 부진을 이유로 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정일정권에 더 많이 원조하면 아사자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견해로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국제원조 식량이 대량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도 아사자가 급증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② 대량아사자가 발생하기 시작한 95년부터 절정기인 97년까지 북한은 매년 250만t에서 300만t의 식량을 수입하고 있었다. 국제원조와 합치면 국내생산이 제로(零) 일지라도 전 국민을 먹일 수 있었다.
③ 아사자는 적대계층이 많이 사는 함경남북도에 집중되었다.
이상 세 가지 사실로써 대량아사는 자연사(自然死)가 아니라 김정일에 의한 의도적이고 인위적인 살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25만 명의 정치범 죽음만 기다리며 목숨 연명
현재까지 파악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대략 10개이며 그 면적은 무려 북한 국토의 1.23%에 해당하는 총 1,508Km2에 달한다. 이곳에서 지금 25만 명으로 추정되는 정치범들이 짐승이하의 천대와 고역 속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며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 정치범 수용소에는 8*15 해방 전의 지주, 자본가 그리고 6.25전쟁당시의 치안대, 반공조직원등의 계층과 그 가족들이 수용되어 있다. 특히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는 정치범이라고 볼 수 없는 무고한 사람들도 상당수 수용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인들을 들을 수 있다. 이들이 수용된 이유는 단지 김일성*김정일을 믿지 않고 진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김일성 초상화와 휘장을 잘못 관리해서 훼손시킨 죄목, 6.25때 가족이 월남한 것도 수감대상이 된다. ▲일본에서 북송된 정치범 중에는 북한의 통제체제에 적응하기 어려워 불만을 토로했다고 해서 수감된 사람, 먹고살기가 힘들어서 일본으로 도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고 해서 수감된 사람도 있다.
김일성,“정치범은 3대를 멸족”하라고 교시 내려
정치범 수용소의 수감자들에게는 결혼이나 출산이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온 가족이 함께 수용된 경우에도 부부를 종신토록 갈라놓는다. 결혼이나 출산이 허용되지 않는 법적 근거는 바로 “정치범은 3대를 멸족”시키라는 김일성의 교시 때문이다.
모든 수감자들은 하루에 12시간씩 휴식 없는 고된 노동을 해야 한다. 이에 대한 법적 근거는 “죽을 때까지 고된 노동을 하면서 당과 수령 앞에 지은 죄를 씻게 하라”는 김정일의 지시이다. 수감자들은 토피(진흙과 볏짚을 섞어서 만든 블록)로 지은 다세대 형식 또는 반토굴 형식의 짐승 우리만 한 집에 온돌을 놓고 짚이나 풀단 등을 깔고 생활해야 하며, 경비대원들이 입던 헐어빠진 옷을 가끔 공급받아 춘하추동 입고 다녀야 한다.
특히 수감자들은 수용소 당국이 공급해 주는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감자와 강냉이만으로 식생활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정치범들은 수령을 배신한 동물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北 인권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안은 김정일 제거
북한 인권 문제는 생사기로의 노예처지에 있는 2천 3백만 인명을 구원하기 위한 초미의 문제이다. 북한 인권문제는 김정일 절대주의 ‘병영국가’에서 '자폭용사', '총 폭탄'과 같은 인간 무기로 길들여진 2천3백만 노예군대를 해체하고 한반도의 공고한 평화와 안전을 실현하기 위한 심각한 문제이다.
북한 인권문제를 해결의 유일한 방도는 김정일을 제거하는 것이다. 김정일을 제거하면 북한 인권문제의 해결은 물론, 북한 주민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다. 북한인권 문제는 현재 한반도 위기의 초점인 북한 핵문제와 분리된 별개의 사안이다. 핵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북한 인권 문제는 국제사회의 대북 요구사항으로 흔들림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 국민과 정부는 북한인권 문제의 심각성과 중대성을 다시 한번 자각·인식하고, 국제사회와 호흡을 같이 하여 김정일 정권에 대한 인권 개선 압박을 한층 강화해 나가야만 할 것이다. (konas)
중국 정치범 집단수용소의 참상
공산주의는 ‘노동을 통한 개조’ 라는 역사상 어떤 체제와도 비교할 수 없는 양식규범을 갖고 있다. 전체주의 수용소에서 강제노동은 이견을 억제하고 정권을 위한 이익을 창출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중국의 강제노동수용소는 이러한 체제에서 일어나는 극악한 인간성 말살을 보여준다.
지주, 부자, 우파(右派) 분자 대상으로 강제노동․사상개조 시켜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정책을 취한 지 3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정치범집단수용소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은 1950년대 계급투쟁을 하면서 지주, 부자, 반동, 악인, 우파(右派)분자들로 분류된 사람들을 강제노동과 정치사상 공작을 통해 개조 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그래서 이 다섯 부류의 피억압 대상자들은 ‘감옥’(jian yu), 흔히 ‘라오가이’라 부르는 ‘노동개조대’(lao gai dui), ‘노동교양소’(jiao suo), 공안국(公安局)에서 운영하는 정신병원, 그리고 ‘강제취업’(qiang zhi jiu ye)등에 수감됐다.
중국에서 이 같은 노동교양제도가 뿌리를 내리게 된 배경에는 문화대혁명이 자리 잡고 있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 중국에서는 기존의 모든 법체계가 무너져버렸고 어떤 식으로든 사회질서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공안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한 처벌이라는 악습을 형성했다. 즉, 법제도가 무너진 공백을 현실적인 힘을 지닌 공안으로 대체하여 일반 국민들에게 공안이 하는 일은 모두 합법적이라는 가상을 심어주게 된 것이다.
中 공산당, 정부 비판해도 무조건 노동개조대에 수감시켜
일례로 1960년대 중국 공산당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일반 주민들이 정부에 대해 약간만 불평을 늘어놓아도 무조건 체포해 노동개조대(lao gai)에 수감시켰다. 수감자들은 이곳에서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으며 공장처럼 생긴 노동개조대 내에서 생산 활동에 종사했는데 이들이 만든 제품의 상당수는 외국으로 수출됐다. 물론 수익금의 대부분은 중국 공산당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러한 중국의 정치범 집단수용소는 북한의 노동교화소, 노동교양소, 노동단련대, 집결소 등에 견줄 수 있다. 일례로 북한의 노동교화형은 지난 해 법(法)개정으로 다소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간 정식재판 없이 수감되어 왔으며, 행정령으로 사법적 범위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특히 그 존재가 비밀에 부쳐져 있거나 부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과 북한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중국과 북한 정치범 수용소는 서로 닮은꼴
중국의 노동개조대는 북한의 정치범교화소 혹은 ‘특별독재대상구역’과도 유사한 점이 많다. 중국의 ‘라오지아오’(laojiao․노동교양소)는 북한의 정치범관리소 내의 ‘혁명화대상구역’과도 유사한 측면이 많다. 한편 라오가이와 라오지아오 수감자들이 수형생활 말기 혹은 종료 후에 수감되어 그 기간이 임의적으로 연장되는 ‘강제취업’(jiyue)제도는, 북한의 노동단련대나 집결소와 그 형태가 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형기(刑期)가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라오가이는 정치범관리소 내의 ‘특별독재대상구역’과 차이가 있다. ‘강제취업’ 대상자들은 노동자 평균임금의 40% 정도에 지나지 않는 소액이지만 월급이 지급되고 연(年) 2주간의 휴가가 있다는 점에서 북한의 노동단련대나 집결소보다는 북한에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 초에 존재했던 ‘특별노무자관리소’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해마다 2천~4천 명의 정치범․범죄자 처형, 장기매매 횡행
최근 들어 중국은 정치범 및 범죄자들에 대상으로한 공개처형, 그리고 장기매매의 증가가 큰 사회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중국은 해마다 2천에서 4천 명의 정치범 및 범죄자들을 사형에 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데일리차이나’ 2005년 3월 17일자 보도) 1984년 중국인민최고법원, 중국인민최고검찰원, 공안부, 민정부, 위생부와 사법부에서 발표한 ‘사형수 시신 및 시신 장기 이용 임시법’에서는 시신을 찾아가는 사람이 없거나 자진 기증한 경우에 시신을 이용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파룬궁 수련자들처럼 노동수용소에서 공안에 비참하게 맞아 죽은 수감자들의 가족들은 일반적으로 통보를 받지 못한다. 그러면 시신은 자연히 주인 없는 시신으로 분류되어 ‘법에 의해’ 사분오열되고 만다. 실제로 2001년 6월 중국 톈진무장경찰병원 화상과 교수 왕궈치(王國齊)는 미국 국회에서 사형장에서 백 차례도 넘게 직접 시신에서 피부와 각막을 분리해낸 사실을 증언했다.
왕 교수의 말에 의하면 사형수들은 대부분 모두 이 같은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한다. 사실 많은 중국 사람들은 하늘과 법을 무시하고 오로지 이익만을 챙기는 이러한 야만적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형제나 친척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러한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사형수 처형 후 유명 영화배우에게 간(肝) 이식
지난달, 중국 매스컴들은 9월 4일 사형수로부터 간을 이식받고 건강을 되찾은 중국의 유명한 영화배우 푸뱌오(傅彪)에 대한 보도를 앞 다투어 내보냈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법, 공안 및 기타 사회 각계의 노력과 협조로 푸뱌오씨가 끝내 20대 사형수의 장기를 얻게 되었다. 이 사형수는 혈액형이 푸뱌오씨와 같았을 뿐만 아니라 신체검사를 통하여 여러 가지 조건이 푸뱌오씨에게 아주 적합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희망을 잃었던 푸뱌오씨는 활기를 되찾았다...(중략) 9월 4일, 사형수가 처형된 뒤 그의 건강한 간은 신속히 베이징 무장경찰총병원에서 대기하고 있던 푸뱌오씨에게 이식되었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이 수술은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의 각종 요소와 잘 맞아 떨어졌다.”(2004년 9월 17일 신화망)
70년대 말~80년대 초부터 ‘노동교양’ 제도 다시 부활
이처럼 중국은 개혁개방이 진행됨에 따라 사회 기풍과 도덕이 일일 천리로 미끄러져 내려가자 사회 치안을 명목 하에 70년대 말~80년대 초부터 ‘엄중한 타격[嚴打]’이라는 구호를 제창하면서 ‘문화대혁명’ 기간에 중단되었던 ‘노동교양’제도를 다시금 부활시켰다. 이와 함께 1982년 중국 국무원은 회람을 통해 공안국이 개인(반혁명분자, 반당․반사회 분자 등)을 재판 없이 3년 이하의 ‘노동교양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한편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제19차 회의(1981년 6월 10일)에서는 ‘강제취업’정책을 다시 채택하면서 ‘반혁명범죄자들’에 대해서는 무조건 ‘강제취업’조치를 취하라고 지시를 내린바 있다. 이에 따라 최근 중국은 노동교양소를 더 많이 만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konas)
김필재 (코나스 객원기자)
2005-09-28 오후 4:09:3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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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은 영원한 반역자이며, 신의 법이든 사람의 법이든 자연법이든 마르크스주의 법이든 얽매이는 것을 거부하면서 인민을 30년간에 걸쳐 하나의 비전 추구로 이끌었다. 그 비전은 처음에는 웅대했지만, 점차 망상이 되어 드디어 악몽이 되었다. 용두사미(龍頭蛇尾)이며 무참한 결말이다'(스튜어트 슈람·Stuart R. Schram, 하버드 대학 교수)》
모택동
12명의 작은 모임에서 출발한 중국 공산당은 불과 20여 년 만에 거대 중국을 손아귀에 넣었다. 그리고 중국 역사에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많은 국가처럼 이들도 분열되거나 와해될 것이라는 예측을 벗어나 12억 중국인들을 억압하며 50년 넘게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이 같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통치 기반을 다진 인물이 바로 모택동이다.
1949년 봄 모택동은 지금까지의 중국혁명은 '지방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는' 비(非)정통적인 노선을 걸어왔으나 앞으로는 도시가 지방을 이끌어가는 정통노선을 걷게 되리라며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의 성립을 선언했다. 당시 중국 인민들은 어느 누구도 신생 공화국의 희망찬 미래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은 빗나갔으며,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의 시작이었다. 모택동은 타고난 혁명가이자 반란의 명수이며 선동가였다. 그는 新 중국 건설의 모든 문제를 대중의 지지를 동원해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반란으로 해결하려 했다.
新 중국 건설의 선두에 선 모택동은 인민을 총동원해 난국을 돌파하는 특유의 혁명적 방법을 동원했다. 소련이 수년 내 공업생산력에서 미국을 따라잡게 될 것이라는 흐루시초프의 허풍에서 힌트를 얻은 모택동은 1958년 15년 내에 영국을 따라잡겠다고 선언했다.
소위 '대약진운동'의 시작이었다.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은 특유의 대중동원을 통해 노동력을 집중적으로 투입해서 공업과 농업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봉건적 후진사회인 중국을 빠른 시일 내에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구상이었다.
모택동 “경제 뒤떨어지고 가난할수록 혁명 한다” 주장
우선 농업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농촌에 대규모 집단농장인 '인민공사'를 설치했다. 인민공사는 완전한 평등주의에 입각한 농업공동체로 농민의 사유재산은 모두 공사의 것이 되며, 막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식사도 같이 하는 한편 모든 수입은 평등하게 분배한다는 것이었다.
5억의 중국 농민은 조상 대대의 재산을 처분하고 2만6천여 개의 인민공사에서 공동생활을 하게 됐다.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처분했다. 살고 있던 집들도 부수고 그 재목으로 공동막사를 지었다.
무소유의 이상적 '공산사회'가 마르크스와 레닌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가난한 중국농촌에서 한때 실현됐던 것이다. 모택동은 한 메모에서 '레닌은 뒤떨어진 나라일수록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어렵다고 말했다. 현재 보는 바와 같이 이것은 올바르지 않다. 경제가 뒤떨어질수록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수월하며 사람은 가난할수록 혁명을 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인민공사’결과 도시와 농촌에 식량부족 사태 발생
또 한 가지, 대약진 운동에서 모택동은 도시와 농촌의 '4해(害)', 즉 파리 모기 쥐 참새를 퇴치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에는 모든 국민이 동원됐다. 왜 참새가 포함됐는지는 모르지만, 참새잡이 모택동 전술은 기발함을 넘어서 소름이 끼친다.
전 국민이 전국적으로 총동원돼 참새가 땅에 앉지 못하도록 쉴새없이 소리를 쳐서 쫓는다. 앉지 못하고 하늘을 빙빙 돌던 참새는 그만 지쳐 떨어져 최후를 맞게 된다. 대약진운동 중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4해 퇴치운동'이었다.
대약진 운동의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1958년 가을 들판에는 곡식이 넘쳐 대풍이 들었고 용광로에서는 엄청난 철이 쉴새없이 생산됐다. 그런데 분명히 대풍이라고 했지만, 인민공사에서 제공하는 음식의 질과 양은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기 시작했다. 도시에도 물품과 식량부족이 초래됐다. 그리고 겨울부터 재앙이 찾아왔다. 1958년 중국에서는 너무도 많은 것이 잘못되고 있었던 것이다.
1958년은 풍년이었다. 그러나 곡식들은 대부분 거둬들이지 못한 채 썩어갔다. 건장한 마을 청장년들은 모두 용광로에 매달려야 했다.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이 허리가 휘도록 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지방 지도자들은 모택동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생산량을 부풀려 보고했다.
생산량에 따라 세금이 정해졌기 때문에 농민들은 엄청난 세금을 치러야 했다.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는 생산된 곡식을 모두 세금으로 내는 바람에 먹을 것이 하나도 남지 않은 곳도 있었다.
‘대약진운동’으로 굶어죽은 사람만 3,000~4,300만 명
더욱이 세금으로 거둬들인 곡식은 빚을 갚기 위해 소련으로 보내졌다.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기근이 초래되는 와중에도, 모택동은 곡식을 소련으로 보냈다. 자신의 인민공사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흐루시초프가 아는 것이 두려웠던 탓이다.
그러나 가장 큰 잘못은 인민공사 자체에 있었다. 인민공사에서 농민들은 일할 의욕도 생산량을 늘릴 열의도 가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일하지 않는 옆사람과 동일한 수입밖에 얻을 수 없는 상황에 누가 열심히 일하겠는가? 생산량은 급속히 줄어갔다.
마을마다 만들어진 용광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었으며 화근이었다. 토법로는 철광석을 제련하여 철을 얻는 것이 아니었다. 철을 녹여 철을 만드는 용광로에 불과했다.
인민들은 냄비, 주전자, 칼, 수저, 난로, 도끼, 삽, 가래, 금고, 자물쇠, 심지어 트랙터까지 모든 철을 용광로 속에 던져버렸다. 여기서 얻은 철은 거의 사용할 수 없는 쇳덩어리에 불과했다. 용광로를 지피기 위해 집집마다 가구와 문짝을 태웠고 급기야 숲을 태워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의 산이란 산은 모두 민둥산으로 변했다.
실로 중국 농촌은 자멸을 향해 매진했으며, 중국은 철기시대에서 석기시대로 퇴화했다. 농민들은 밭을 일굴 농기구가 없었다. 대기근이 찾아왔다. 인재였다. 아프리카에서 보던, 뼈만 남고 배가 불룩한 어린이들과 굶어죽은 시체를 1959년의 중국에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죽은 사람보다도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에서 굶어죽은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다. 최소한 3,000만 명, 많게는 4,300만 명이 죽었다는 추정도 있다. 그러나 모택동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혁명의 대의를 위해 생명은 희생돼야 한다'고 했다. 6억 국민을 대상으로 한 그의 실험은 5∼7%의 인구를 희생하면서 철저한 실패로 끝났다.
黨 지도부 파괴 위해 ‘문화대혁명’ 일으켜
대약진 운동이 실패한 이후 모택동은 또 하나의 혁명을 꾸몄다. 바로 '문화대혁명'이다. 문화혁명은 1965년 11월 강청(江靑)의 수하인 상해의 이론가 도문원이 '문회보'에 쓴 '해서파관(海瑞罷官)을 평한다'에 의해 시작됐다. '해서파관'은 북경 부시장 '오함'이 쓴 희곡이다.
해서는 명대의 충신으로 폭군이었던 황제의 잘못을 용감하게 직언하고 충성을 다한 인물로, 모택동은 해서를 본받으라고 장려하기까지 했었다. '오함'도 해서를 본받으라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해서파관을 썼다.
그러나 그것은 모택동이 친 덫이었다. 모택동은 과거에도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齊放百家爭鳴)을 주창하여 지식인들로 하여금 정적들을 비판하도록 하여 그들을 숙청하는 데 활용한 적이 있었다. 충신 해서가 황제에게 직언하고 고초를 당했듯이, 팽덕회도 대약진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모택동에 의해 숙청 당한 바 있었다.
많은 당간부들은 팽덕회가 해서와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때가 온 것이다. 모택동과 강청 일파는 '해서파관'은 우익분자 팽덕회를 숙청한 모택동을 해서에 빗대 비난하는 것이며, 그 배후에는 유소기 등소평 등 당 지도부가 연루돼 있다고 뒤집어 씌웠다.
모택동이 그의 충직한 당 지도부를 파괴하기 위해 동원한 것은 9살에서 18살에 이르는 초중고의 어린 학생들, 소위 '홍위병(紅衛兵)'이었다. '백가쟁명' 때 지식인들은 정적들을 비난해주었지만, 모택동도 비난했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그럴 염려가 없었다. 그들은 사리를 판별할 눈이나 비판능력도 없으며 단지 맹목적이었다. 모택동은 이 점을 활용했다.
홍위병, 관리나 부유한 자, 지식인 집에 난입 폭행과 살인 저질러
모택동은 1966년 가을 천안문에 여덟 차례나 오르며 전국에서 모여든 수천만의 홍위병들에게 반란을 획책했다. 모택동은 홍위병에게 사구(四舊), 즉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습, 낡은 습관을 타파하라고 지시했다.
중국 전역에서 학생들이 당 사령부와 사구를 폭파하기 위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거리를 휩쓸고 다니면서 닥치는 대로 파괴와 폭행, 그리고 살인을 일삼았다. 관리나 부유한 자, 지식인의 집에 난입하여 폭행과 살인을 저질렀다.
일례로 1967년 8월 13일부터 10월 7일 까지 후난성(湖南省) 다오현(道縣) 인민 무장부 말단 민병들이 ‘상강풍뢰(湘江風雷)’의 조직원과 검은 5부류를 도살했다. 66일 동안 10개 구역 36개 공사(公社), 468개 대대(大隊), 2778가구에서 총 4,519명이 연루되었다.
그 중 ‘지주, 부농, 반혁명, 나쁜 사람’이 38%를 차지했고, 지주와 부농의 자녀가 44%였다. 살해당한 사람 중에서 연령이 제일 많은 사람은 78세였고 가장 어린 경우는 생후 10일 밖에 안 된 아기였다. 이것은 다만 특정지역에서 문화대혁명 중에 발생한 한 가지 사건에 불과하다.
1968년 초, ‘혁명위원회’ 가 설립된 후, 계급 대오(隊伍)를 조사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 당시 네이멍구(內蒙古)에서는 ‘내인당(內人黨)’을 조사하면서 35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살해한 유혈사건을 만들어냈다. 1968년 광시(廣西)에서는 4.22 군중 단체에 대한 무장 대학살에 수만 명이 참가했으며, 당시 사망한 사람이 11만 명에 이른다.
농촌의 경우는 더욱 심각했다. 홍위병들은 옛 지주 소실의 자식이거나 金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되는 자, 이웃이 허위로 흑색분자로 고발한 자 등 아무 죄가 없는 마을사람들을 자본주의체제 부활을 노리는 중죄인으로 분류해 가차없이 사형에 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국가조직은 완전히 와해됐다.
제2인자로 국가주석이었던 유소기는 백주에 사무실에서 홍위병들에게 붙잡혔다. 경호원들도 못 본 체했다. 등소평도 붙잡혔다. 부인과 자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위 '비투대회'(批鬪大會)에 끌려가 굴욕적인 자세로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유소기는 결국 모진 고문 속에 살해됐다. 등소평의 장남은 북경대에서 홍위병들에게 고문을 받다가 4층에서 던져져 평생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홍위병, 외교부 점거 후 해외 중국 대사관에 혁명 선전·공산주의 선동
중국 문제에 정통한 뉴욕타임스의 대기자 해리슨 솔즈베리(Harrison E. Salisbury)는 모택동 홍위병의 잔학성을 가리켜 '히틀러의 나치 친위대도, 아르헨티나의 파시스트도, 스탈린의 비밀경찰도 모택동의 홍위병에게는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한편 낡은 것을 없애라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문화재들은 파괴되고 책은 불태워졌다. 심지어 중국 고전극인 경극의 가면과 의상도 불태워지고 배우들도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얼마나 많은 인류유산이 문화혁명 중에 파괴됐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다.
시간이 감에 따라 모택동조차도 홍위병을 통제할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됐다. 국가주석이 백주에 붙잡히는 판에 국가기관이 무사할 리 없었다. 홍위병들은 중국 외교부를 점령 폭파했다. 그들은 외교문서를 철저히 파괴했으며 소련, 영국 등 외국 대사관에 침입해 방화했다.
외교부장 진의는 자아비판을 해야 했으며 고문을 당해 결국 죽었다. 외교부를 점거한 그들은 해외의 중국 대사관들이 혁명을 선전하고 지역 공산주의를 선동하는 역할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로 인해 중국대사들은 대부분 소환됐고 몇몇 국가들은 중국과 단교했다. 대외 무역은 급격히 감소했다. 중국의 대외정책은 다른 부문들과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모택동, 커다란 침대 위에서 10대 소녀들과 섹스 즐겨
모택동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인민해방군을 동원했다. 그리고 68년 7월 홍위병을 해산시키고 1000만 홍위병을 모두 농촌으로 하방(下放)시켰다. 홍위병 세대는 지금도 중국의 골칫거리다. 오십 줄의 그들은 한창 공부할 나이에 농촌에서 똥거름을 치며 지냈다.
홍위병이 제거된 이후에도 76년 9월 모택동이 죽을 때까지 문화혁명의 광기는 계속됐다. 약 1억의 중국인이 문화혁명 때에 모진 고초를 당한 것으로 알려진다.(당원만 300만 명 숙청)
모택동은 현대의 진시황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날들을 커다란 침대 위에서 중국 고전들을 읽거나 10대 소녀들과 섹스를 하면서 살았다. 그가 죽은 뒤 문화혁명의 목적과 결과가 모두 부정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아예 정치를 외면하게 되었다.
중국 인민들 사이에서는 심각한 파벌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 문화혁명 기간에 서로 반대 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같은 작업장에서 함께 일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그런 일은 그들이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인류 역사상 자신이 만든 체제를 부수려고 그와 같이 엄청난 대중의 힘을 동원한 지도자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 체제에 가해졌던 폐해는 심각한 것이었으며 모택동이 궁극적으로 달성하려고 했던 목표는 실현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1981년 6월 중국공산당은 '건국' 이래의 역사적 문제에 관한 당의 결의’에서 문화대혁명은 당 ·국가 ·인민에게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모택동의 극좌적 오류이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했다.(2005년 9월23일 작성)
정리/김필재 spooner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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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주체사상가 였다(?)” 美심슨大 신은희 교수 주장 파문
“예수는 주체사상가 였다(?)” 美심슨大 신은희 교수 주장 파문
신 교수는 학계에서 `주체사상 전도사`로 알려진 인물
미국의 오하이오주 심슨 대학에서 종교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신은희 교수(36)가 “예수는 주체사상가 였다”는 주장을 제기해 파문이 일고 있다.
신 교수는 친북성향의 인터넷 매체로 알려진 ‘통일뉴스’에 <신은희의 통일문화 이야기>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하고 있는 인물로 학계에서는 소위 ‘주체사상 전도사’로 알려진 인물.
신 교수는 27일 “예수도 주체사상가 였다”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평화적인 통일문화를 이루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고 있는 세력이 바로 기독교인들”이라고 전제한 뒤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기독교 근본주의, 썩을 대로 썩은 최악의 종교제품”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유통기한이 지난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다. 종교인에게도 유통기간이 있을까? 있다...(중략) 유통기간이 가장 오래지나 썩을 대로 썩은 최악의 종교제품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 근본주의다. 세상에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있는데 어떻게 예수만을 믿을 수 있을까? 이러한 근본주의 기독교는 유통기간이 지나도 너무 오래 지난 종교성이다. 더 늦기 전에 반품해야 한다”
신 교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북한의 주체사상가들을 비교해 보면 근본주의자들이 훨씬 배타적이고 폭력적일 때가 많다”고 말한 뒤 그 이유를 “북한의 주체사상가들은 적어도 다른 문화를 ‘악’이나 ‘사탄’으로 규정하지 않으며 다른 종교와 문화를 ‘악마화’하는 작업을 더 이상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주체사상은 다원주의적 토착 신학의 대명제”
신 교수는 김일성은 기독교를 결코 부인하지 않았다고 전제한 뒤 “김일성은 조선 사람은 조선하늘에서 조선의 하나님을 믿자고 제안했다. 즉 기독교를 조선식으로, 한국식으로 믿자는 것이다. 이는 자기민족을 부인하지 않는 다원주의적 토착 신학의 대명제”라며 북한의 주체사상을 찬양했다.
신 교수는 “북한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예수는 주체사상가’ 이었으며 실제로 역사 예수에게서 나타난 기독교 정신은 근본주의자들보다 주체정신에 훨씬 가깝다”며 “주체란 단순히 김일성 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중심이 되어 ‘자주적 구원’을 이루는 원리를 뜻한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이어 예수가 세상을 떠나며 남겼던 마지막 지상명령은 세상의 모든 민족이 각 민족의 주체성을 살려 자기민족에게 가장 어울리는 자주적 구원을 이루도록 돕고 협력하라는 것이었다며 아래와 같이 덧붙였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 사회주의 이상을 그대로 실현”
“모든 민족에게 있어서 주체는 생명 그 자체이다. 주체는 생명이 가장 생명답게 살 수 있는 평화의 절대 조건이다. 잃어버린 민중의 주체를 회복시킨 인물, 역사 예수, 예수도 주체사상가였다. 예수의 자주적 구원관은 강대국이 주도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는 북의 현실에서 너무나 절실하다. 주체사상은 기독교 정신과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예수가 만들었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야 말로 사회주의 이상을 그대로 실현한 공동체였다”
신 교수는 창조의 대화에는 “불교인, 회교도인, 성균관 유생, 도인, 무당, 빨갱이, 이단자, 주체사상가 등등 모두가 함께 모여야 한다”며 “남과 북이 더 이상 국가간의 거래가 아니고 민족간의 거래가 된 오늘 기독교와 주체사상이 만나 밤을 태우며 나누는 이 둘의 뜨거운 열애가 21 세기에는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출처: kon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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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집단] 6.25때 공산군의 학살행위
[특집]한국전쟁 시기 인민군 및 左翼측의 민간인 학살 행위
written by. 김필재
학살당한 민간인 총 122,799명, 납북자 수 84,532명
6.25 전쟁당시 북한 인민군과 좌익(左翼)측의 학살 유형은 주로 비무장한 적(敵)에 대한 대량의 보복 처벌이었다. 그 형태는 대개 '인민재판' 혹은 '처형'의 형태를 취했다. 특히 인민군 점령지역에서는 인민군의 전폭적 후원을 받은 지방 좌익들이 활개치면서 우익인사 및 그 가족들을 인민재판을 거쳐 죽창이나 칼·낫과 같은 원시적 무기로 난도질하여 처형하거나 고문 및 학살을 자행했다.
▲ 한국전쟁 기간동안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학살 당한 민간인은 총 122,799명(‘대한민국통계연감’, 1952년 발간)에 이른다. 위 사진은 퇴각하는 김일성의 지시로 학살당한 함흥 주민들의 모습으로 사진에 보이는 동굴에서만 300여 명의 시신이 발견됐다. (사진출처 : 美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의 경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경찰이나 군인 그리고 이들의 가족들을 체포해 그 자리에서 인민재판에 회부했으며, 체포를 거부할 시에는 즉결처형을 했다. 인민군은 공무원, 군, 경찰, 학자 등 소위 인텔리 계층을 최우선 대상으로 학살했다. 그 대상에는 부녀자와 어린이들까지 대거 포함되었고, 반동분자로 낙인찍히면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먼 친척까지 몰살 당했다.
1950년 9월 20일 김일성은 이용가치가 있다고 판단해 살려둔 수감인사들에 대한 '제거' 조치를 전체 점령지역의 행정기구에 하달했다. 후송을 하되, 후송 곤란시에는 즉결처치하라는 것이 주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장 먹을 군량미도 다 떨어져가는 마당에 어떤 인민군이 우익을 먹여가며 재워가며 후송하겠는가. 이것은 사실상 '전면적 학살'을 지시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학살 당한 민간인 총 122,799명, 납북자 총 84,532명
전남에서도 800여 명의 양민이 무참하게 학살당했으며, 전북 무안에서는 퇴각하는 인민군이 주민 80명을 묶어 장작더미 위에 올려놓은 후 태워죽이기도 했다. 목포시의 경우 목포시 연동의 미곡 창고에서 300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살해되었으며, 전남 임자도의 경우 전 주민의 절반 이상이 인민군과 지방 좌익에 의해 처형됐다.
총 4권으로 이루어진 '6·25 사변 피살자 명부'(공보처 통계국. 작성일 1952년 3월31일)에는 59,964명의 피살자 명단이 실려 있다. 이 명부는 범례(凡例)에 "6·25 사변 중 공무원 및 일반인이 잔인무도한 괴뢰도당에 피살당한 상황을 조사 편찬하였다"면서, 대상을 "군경(軍警)을 제외한 비(非)전투자에 한하였다"고 밝혀, 인민군 등 좌익에 의해 피살된 사람들의 명단만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라남도' 지역 피살자만 43,511명 (전체의 72.6%)
명부에는 5만9964명의 피살자 가운데 전남 지역에서 피살된 사람이 43,511명으로 전체의 72.6%를 차지하고 있다. 다음으로 전라북도(5,603명), 충청남도(3,680명), 경기도(2,536명), 서울시(1,383명), 강원도(1,216명) 順이다. 그 외 경상남도 689명, 충청북도 633명, 경상북도 628명, 제주도 23명, 철도경찰 62명이 좌익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기록됐다. 전체 피해자 가운데 남자가 44,008명, 여자가 15,956명이다.
여성 피살자 15,956명 가운데 13,946명이 전남 지역에서 피살됐다. 피살자가 집중된 전남 지역에서도 특히 영광군의 피해가 가장 컸다. 전남 지역 피살자 43,511명 중 절반에 가까운 21,225명이 영광군에서 피살됐다. 영광지역 여성 피살자는 전국 여성 피살자의 절반 가까운 7,914명이다.
▲ 함흥에서 학살된 민간인 시체를 우물에서 건져 올리고 있는 국군의 모습
영광군 인근 지역의 피해도 컸다. 전북 지역 피살자 5,603명 중 2,364명이 피살된 고창은 행정구역은 전북에 속해 있지만 영광과 이웃해 있는 지역이다. 전남 지역에서도 영광과 이웃한 郡인 나주(3,596명), 장성(4,306명), 함평(1,954명) 등에서 피살자가 많았고 영암 지역에서도 7,175명이 피살됐다.
이외에도 6.25 전쟁 당시 소위 '바닥빨갱이들'에 의해 가장 큰 피해자집단 중 하나는 종교인들이었다.
지금까지 정리된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6·25 당시 인민군과 바닥빨갱이들에 의해 학살당한 목사·신부·장로·수녀들은 신원이 밝혀진 사람만 174명에 달한다. 또한 인민군이 퇴각하며 납북된 종교인들도 184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기독교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남 영암읍 교회사건 등 3개월 이하의 인공치하 동안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전남 영압읍 교회에서는 신도 24명이 집단 학살됐고, 옥구에서도 20여 명의 신도가 학살됐다. 전남 서쪽 바다에 있는 임자도에서는 150여 명이 구덩이를 파고 양민과 교인이 학살됐고, 충남 논산 병촌교회에서는 한 살짜리 어린아이부터 육순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60여 명의 교인들이 학살됐다.
인민군, 평양 칠골리에서만 2,500여명 학살
한편 미군의 38선 이북으로 진격하자 인민군은 북으로 후퇴하면서 북한 지역에서도 숱한 학살극을 벌였다. 김일성은 6.25남침 때에 북한지역에서 이른바 북한 내 불순분자 색출을 모토로 '예비검속'(豫備檢束)을 했는데, 이들에 대한 성분조사는 악명높은 '정치보위부'에서 실시했다. 김일성은 미군이 압박해 들어오자마 모조리 이들을 학살했다.
국군과 미군의 평양 입성 후에야 확인된 사실이지만, 김일성의 북한정권은 사람들을 새끼줄로 묶어 총살한 다음 시체를 우물 속이나 창고, 방공호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구체적으로는 평양의 칠골리에서 2,500여명, 평양 승호리 인근의 사도리 뒷산에서 4,000명 정도가 학살당했고, 평양의 기림 공동 묘지터와 용산 공동묘지에서도 학살이 있었다.
함흥에서는 함흥감옥에서 700명, 충령탑 지하실에서 200명, 정치보위부가 있는 3곳의 지하실에서 300명, 덕산의 니켈 광산에서 6,000명, 반룡산 방공굴에서 8,000여 명이 학살당했다. 또한 함흥시에서만 모두 1만 2,000여 명이 퇴각하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학살당했다. (출처: "자유공화국 최후의 날", '지옥유폐 130일-원산 대학살 사건의 전모', 박계주 著)
▲ 6.25 전쟁 당시 함흥시에서만 모두 1만 2,000여 명에 이르는 무고한 양민들이 퇴각하는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학살당했다. 위 사진에서 보는것처럼 인민군의 학살에는 남녀가 따로 없었다.(사진출처:美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이처럼 만인이 보는 앞에서 학살을 당한 민간인이 122,799명(‘대한민국통계연감’, 1952년 발간)이고, 납북자 수는 84,532명, 전쟁 중에 죽은 민간인이 244,633명이다.
< 자료1. 김일성의 대량 학살 책임을 보여주는 戰時하 김일성의 발언 및 지시>
-"후방을 철옹성같이 다져야 한다. 도피분자, 요언(妖言) 전파 분자와 무자비하게 투쟁하며 밀정 및 파괴분자를 적발, 가차없이 숙청하고 반역자는 무자비하게 처단해야 한다" (1950년 6월 26일, 방송을 통한 김일성의 지시하달, 출처: "남북한 관계 사료집 22권")
-"반동분자, 비협력분자, 도피분자를 적발하여 '무자비'하게 숙청하라" (1950년 6.25 남침 직후 서울 시내에 뿌려진 김일성의 호소문,출처: "꽃피는 산하-6.25의 흔적을 찾아서")
-"국군장교와 판검사는 무조건 사형에 처하고, 면장, 동장, 반장 등은 인민재판에 부친다"(1950년 6월 30일 포고문, 출처: "정치범은 자수하라"와 "반동분자 처리지침")
-"숨어 있는 반동도배들이 자수하기를 기다리면서, 그 반동분자들과 투쟁하지 않는 경향이 당일꾼들에게 만연되고 있는 현상은 극렬히 비판해야 한다." (1951년 1월 21일, "적에게 일시 강점 당하였던 지역에서의 반동단체에 가입하였던 자들을 처리함에 관하여"라는 군사위원회의 결정 3개항을 설명하면서)
-"악질반동에 대해 복수하려는 것은 극히 정당한 일입니다." (1950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대회에서 진술한 김일성 동지의 보고/”한반도 분단의 재인식”-신일철 著)
< 자료 2. 남한 지역에서 발생한 북한군 양민 학살 현황>
(출처: 공보처 통계국 '6.25 사변 민간 피해 조사표'. 단위 : 명)
지역 사망 학살 납치
서울 29,688 8,800 20,738
경기 62,621 7,511 16,057
충북 24,320 3,409 6,312
충남 23,707 5,562 10,022
전북 40,462 14,216 7,210
전남 14,193 69,787 4,171
경북 35,485 6,609 7,534
경남 19,963 6,099 1,841
강원 17,122 6,825 10,528
총계 사망-244,663 학살-28,945 납치-84,532
(교전이 직접 벌어지지 아니한 제주는 제외)
< 자료 3. 북한지역에서 발생한 북한군 양민 학살>
아래는 주로 UN군의 북진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인민군 주력부대가 퇴각하며 발생한 학살이다.
1. 함남 원산(元山)학살
- 발생장소 : 원산시 시내, 신풍리 여왕산, 원산 앞바다, 원산인민교화소
- 방식 : 4명 1개조로 묶어 방공호에 집어넣고 집단총격으로 사살
- 희생자 수 : 1,700여명
2. 함남 함흥학살
- 발생장소 : 함흥인민교화소, 충령탑 지하실, 정치보위부 지하실, 함흥북쪽 덕산니켈광산 반용산
방공호
- 방식 : 집단 무차별 총살, 방공호의 경우 폭사, 우물 생매장, 투석
- 희생자 수 : 12,000여명 (납치자, 실종자 포함되지 않은 수임)
3. 강원 고성(高城) 학살
- 발생장소 : 교외 저수지
- 방식 : 저수지로 몰아넣은 후 폭사
- 희생자 수 : 800명
4. 함남 영흥(永興) 학살
- 발생장소 : 영흥국민학교 운동장, 영흥 방공호
- 방식 : 무차별 난사
- 희생자 수 : 1,520명
5. 함남 순천(順川) 학살
- 발생장소 : 순천 북서쪽 터널
- 방식 : 무차별 난사
- 희생자 수 : 200명
6. 함남 신고산(新高山) 천주교도 학살
- 발생장소 : 인근 과수원(사과밭)
- 방식 : 장작 몽둥이로 집단 가격 후 살아남은 자는 총살
- 희생자 수 : 190명
7. 황해 해주(海州) 학살
- 발생장소 : 해주형무소 등
- 방식 : 독살, 해주지역 우물에 집단 생매장 후 돌로 무차별 가격, 소사(불 태워 죽임)
- 희생자 수 : 아이 업은 부녀자들 포함 1,200여명 (이 학살은 종군기자들에 의해 UN에 보고됨)
8. 함북 갑산군(甲山郡) 학살
- 발생장소 : 양유리 줄버드나무 밑, 부흥리 굴, 지경리 느티나무 밑, 읍내 우물 다수
- 방식 : 총살, 우물에 집단 생매장
- 희생자 수 : 420명
9. 함남 고원군(高原郡) 학살
- 발생장소 : 운곡면 차탄 다리밑, 관평역과 흑토령 중간 저지대, 성내리 뒷산 공동묘지
- 방식 : 무차별 총살
- 희생자 수 : 800명
10. 황해 수안군 학살
- 발생장소 : 운곡면 차탄 다리밑, 관평역과 흑토령 중간 저지대, 성내리 뒷산 공동묘지
- 방식 : 무차별 총살
- 희생자 수 : 1,100명
(konas)
김필재 (코나스 객원기자)
출처 : 코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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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김일성)을 추종하는 것은 사상적 우상숭배
"現정권 386운동권은 김일성주의자 출신"
주사파 전향 지식인들, 내부비판 잇따라
386주사파, 제도권 진입 후에도 반성 없어
최근 386운동권에서 전향한 지식인들의 386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현 정권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한 386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제도권 진입 이후에도 과거행적을 반성하지 않고 친북반미라는 시대착오적 이념노선을 답습하고 있어 이러한 비판에 힘이 실리고 있다.
386운동권은 주사파가 장악
386운동권에서 자유주의자로 변신한 지식인들의 비판은 386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의 80년대 학생운동이 실제로는 민주화운동이 아닌 주체사상파(이하 주사파), 소위 김일성파 운동이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한총련 중앙집행위원장 출신인 북한인권정보센터 허현중 연구위원은 지난 22일 동아일보칼럼을 통해 ‘80~90년대 대학가운동권은 김일성파에 의해 장악돼 있었다’며 ‘한 해의 투쟁노선과 전술 역시 김일성 신년사와 대남전선기구인 한민전의 발표내용을 따랐다’고 지적했다.
서울대총학생회 사무국장을 거쳐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간사 등을 지낸 바른사회를위한시민회의 홍진표 정책실장은 10월호 월간조선 기고문을 통해 ‘권력을 움직이고 있는 386들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이 좌파(左派)운동이었다는 주장을 색깔론이라고 반박하지만 이는 거짓말’이라며 ‘80년대 대학가와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은 본질적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지향하는 좌파운동이었다’고 말했다.
홍실장은 특히 ‘주사파는 80년대 중반 이후 전대협, 한총련 등을 조직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잡았다’며 ‘이들은 소위 김일성 원전(原典)을 읽고 한민전을 청취하며 북한 주도의 통일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했다’고 덧붙혔다.
위수김동, 친지김동 김일성*김정일 추앙
이들 전향 지식인들은 386운동권을 장악했던 주사파가 김일성과 김정일을 진심으로 추앙했음을 밝히고 있다.
허위원은 ‘김일성파에게는 김일성과 한민전 노선에 누가 더 충실하냐가 정책의 정당성과 혁명성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며 ‘수령님*장군님*지도자 동지라 통칭하는 것은 당연지사로 여기고 있었다. 북한이 남한에 있었던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홍실장 역시 ‘주사파는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친지김동(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이라는 호칭을 써가며 김일성과 김정일을 진심으로 추앙했다’고 밝히고 있다.
주사파, 사회주의 붕괴 후에도 北추종
주사파가 장악했던 386운동권은 90년대 초 사회주의권 붕괴 이후에도 전향하지 않았음이 확인된다.
허위원은 ‘사회주의권 붕괴로 김일성파에게 인식전환의 기회가 있었지만 이들은 북한이 주장하는 ‘사상과 주체를 바로 세우지 못해 사회주의가 붕괴됐다’는 인식에 동의해 수령숭배와 주체사상, 우리식 사회주의와 자주노선을 지지했다’고 밝혔다.
홍실장도 ‘사회주의권 붕괴에도 주사파가 주축인 NL(민족해방)계열은 ‘북한은 건재하다’는 논리를 앞세워 통일운동을 전면에 내세워 역량을 유지해간다’며 ‘90년대 이후 민족민주혁명당, 중부지역당, 구국전위 등 북한과 직접 연계를 맺는 주사파 지하조직들까지 등장한다’고 지적했다.
주사파에 ‘친북좌익’ 호칭은 진실확인
386운동권에서 전향한 서강대 신지호 겸임교수는 “현 정권 내 386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주사파 출신 중 누구도 과거의 행적을 반성하고 자유주의자로 변신하겠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없다”며 “현 정권은 이러한 지적을 ‘신색깔론’이라 반발할 것이나, 자유주의자를 ‘빨갱이’로 모는 것은 악질적 색깔론이어도 주사파를 친북좌익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진실확인일 뿐”이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主思派 ‘전대협’간부들, 열린당*청와대 권력실세로>>>
전대협 출신들 “北은 가장 호감 가는 나라”
`통일주체권력은 북한정권` 91’총노선서 선언
386운동권의 핵심 ‘전대협’은 87년 결성 이후 주체사상(主體思想)을 지도이념으로 대남혁명투쟁을 해오다 지난 92년 대법원에서 이적단체(利敵團體)로 판정됐다.
전대협은 87년 결성 이후 ‘반미청년회’에 의해, 89년 이후에는 ‘반제청년동맹’ 등에 의해 조종돼왔는데, 이들은 대남혁명기구 한민전의 전위조직을 자처했던 단체이다.
실제 ‘반제청년동맹’ 은 강령을 통해 ‘동맹은 김일성장군님과 한민전의 향도에 따라 나아가는 김일성주의 청년혁명조직이다. 동맹은 미(美)제국주의 침략자들과 그 앞잡이를 몰아내고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전대협은 특히 91년 ‘제5기 전대협 총노선’이라는 문건에서 보이듯 ‘남한사회는 미제의 식민지예속사회이고, 남한정권은 미제의 식민지파쇼정권’으로 인식하며 특히 ‘통일의 주체권력은 북한정권임’을 못 박고 있다.
전대협은 각 대학총학생회 수익금을 소위 투쟁자금으로 활용했는데, 91년의 경우 의장(議長) 활동비만 월 150만원, 의장의 로얄슈퍼싸롱 차량유지비만 월 50만원을 사용했다.
386전대협 “대통령은 우리의 도구”
‘주체(主體)혁명’을 꿈꾸던 전대협 출신은 현 정권 들어 권력실세로 등장했다. 열린우리당 내에는 12명의 국회의원(1기 : 김태년*우상호*이인영*이철우, 2기 : 백원우*오영식*정청래*최재성, 3기 복기왕*이기우*임종석*한병도) 이외에도 이재경 원내대표실 공보실장(1기)과 15명의 의원보좌관 등 전대협 출신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다.
전대협 출신들은 노무현 대통령 측근 중에도 많다. 김만수 청와대 부대변인, 유송화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실 행정관이 2기 출신이며, 송인배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이 5기 출신이다.
노대통령의 부산3총사 중 한 명으로 알려진 최인호 씨는 전대협 3기이다. 그는 93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간부를 거쳐 98년 국회의원비서시절부터 정치인 노무현을 보좌해왔다. 노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여택수 전 행정관도 2기 출신이다.
이러한 386전대협의 영향력을 반증하듯 노무현 취임 초기인 지난 해 2월 386참모들이 보낸 “(대통령이) 우리의 도구로써 변함없이 나가주시기 바란다”는 내용의 생일편지가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386전대협 대북관, 일반 국민과 큰 차이
386전대협 출신들은 과거의 친북반미운동을 반영하듯 외교안보노선에서 일반 국민들과 극단적 괴리현상을 나타내주고 있다.
지난 9월17일 시사저널이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전대협동우회 회원 202명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은 북한을 가장 호감이 가는 나라(39.1%)로 꼽았고, 그 뒤로 중국(29.8%), 미국(6.9%), 러시아(4.5%), 일본(1.05)의 순으로 답했다. 일반 국민들이 ‘미국이 가장 호감이 가는 나라(38.3%)’ 로 꼽고 뒤를 이어 중국(23.8%), 북한(10.6%), 일본(9.7%), 러시아(4.9%)를 든 것과 큰 차이를 보이는 대목이다.
북한이 안보에 위협적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일반국민들의 69.7%가 위협적이라고 답한데 반해 전대협386은 14.4%만이 위협적이라고 답변했다.
김성욱기자 2004-10-25 오전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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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온 팩스 한 장, 형의 순교사실 확인”
주기철 목사 아들 주광조 장로, 북구원세미나서 증언
故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광조 장로(극동방송 고문)가 지난 17일 북구원 영화시사회 직후 열린 세미나에서 북한으로부터 받은 팩스를 공개했다. 2002년 4월 일본을 통해 수신한 이 팩스는 주 장로가 지난 50여 년간 수소문해온 북한의 형과 형수의 생사를 확인한 북한측의 공식 문서였다.
주 장로가 공개한 한 장짜리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찾은 사람 / 형 주영진. 남자 1919년 10월 25일 생. 1950년 처단. 서성구역 서성리 악질 종교인에 수교(우두머리) 목사로 1950년 반동단체에 가담. 악질적으로 만행하다 체포 처단 / 형수 김덕성 1920년 8월 11일 생. 당과 정부 정책과 반국가적 선전행위를 감행하다가 1970년 10월 26일 체포되어 1971년 1월 15일 처단…>
주 장로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형 주영진 전도사는 1950년 처형되기 이전에도 북한 공산당에 의해 두 번 구속당한 바 있다.
첫 번째는 교회당 안에 스탈린과 김일성 사진을 걸어놓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교회당을 투표장소로 개방하지 않았다는 것과 주일성수를 위해 교인들의 투표참여를 권유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이번에 북한측의 문서에 의해 밝혀진 것처럼 1950년 6·25 동란 발발 이전 “악질적으로 만행했다”는 죄목으로 검거되어 서른 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순교했다.
한편 故 주영진 전도사의 처 김덕성 씨는 문서를 통해 “반 국가적 선전행위를 감행했다”는 이유로 1970년 검거됐고 3개월여 만에 처형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주 장로는 “많이 배우지 못한 아녀자가 무슨 반국가적 악질 선전을 했겠는가. 바로 남편의 뒤를 따라 복음을 전하다 순교당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 장로는 이어 “공산치하에서 목회자의 양심을 지키려다 젊은 아내와 핏덩이 두 아이를 놓고 먼저 가야했던 큰 형님 그리고 목회자의 아내로서 남편을 따라 몰래 복음을 전하다 악질선전의 죄목으로 처단당한 형수님, 이런 가족사 앞에 나는 고개를 숙이게 된다”라고 말했다.
알려진 대로 주 장로와 故 주영진 전도사의 아버지 주기철 목사는 일제치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7년간 옥살이와 고문 끝에 1944년 4월 평양 형무소에서 순교했다.
주 장로는 “가족사에 대해 하소연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교회의 현실, 차로 겨우 1시간 정도만 달려가면 닿은 그곳에서 지금도 누군가가 외로운 신앙을 지키며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 북녘 땅의 종교적 탄압이 5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현실을 한국교회 앞에, 조국 앞에, 그리고 젊은 우리 후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라고 밝혔다.
평양이 고향인 주 장로는 반탁시위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중학교 1학년에 퇴학처분을 받고 공산당 치하에서 신앙의 자유가 없어지자 1947년 월남했다. 형 주영진 당시 장현교회 전도사는 “다 평양을 떠나면 누가 아버님이 순교하신 이 곳을 지키겠냐. 너는 가라, 난 여기서 교회를 지키겠다”며 북한에 남았다고 한다.
한편 이민복 前 북한과학원 연구원은 주 장로가 공개한 문서와 관련 “북한은 처단한 사람들에 대해 외부적으로 사실확인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례적인 문서라고 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김범수 기자 2004-09-28 오후 2: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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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적기독 나라인 이유
1. 하나님의 대적이 되므로
에스겔 38:2 "인자야 너는 마곡 땅에 있는 곡 곧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에게로 얼굴을 향하고 그를 쳐서 예언하여 3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로스와 메섹과 두발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하여....."
로스는 러시아, 메섹은 모스크바, 두발은 북서시베리아의 '투발스크'인데, 이 땅을 다스리는 '곡'이라는 왕에 대해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대적하여"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위 지역과 그 땅을 통치하는 왕은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주님도 그들을 대적하고, 하나님이 대적하는 대상은 반드시 그들도 하나님께 대항하기 마련입니다.
2. 온갖 적기독 무리의 대장이 되므로
에스겔 38:7 "너는 스스로 예비하되 너와 네게 모인 무리들이 다 스스로 예비하고 너는 그들의 대장이 될지어다"
러시아는 자기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가증한 무리들을 다 이끌고 그 무리의 대장이 될 것이므로, 러시아 땅의 왕 또는 러시아 영토가 속한 어떤 큰 제국을 다스리는 한 왕이 적그리스도가 될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3. 말년 곧 끝날에 나타나므로
에스겔 38:8 "여러 날 후 곧 말년에 네가 명령을 받고 그 땅 곧 오래 황무하였던 이스라엘 산에 이르리니 그 땅 백성은 칼을 벗어나서 열국에서부터 모여 들어오며 이방에서부터 나와서 다 평안히 거하는 중이라"
에스겔 38:16 "구름이 땅에 덮임같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치러 오리라 곡아 끝날에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내 땅을 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너로 말미암아 이방 사람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그들로 다 나를 알게 하려 함이니라"
"말년"과 "끝날"이라는 표현은 러시아 땅을 지배하는 왕이 인간 종말의 최후 적그리스도로 등장하였다가 멸망할 것을 알려줍니다.
4. 모든 선지자들이 공통으로 말한 그 자이므로
에스겔 38:1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옛적에 내 종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말한 사람이 네가 아니냐 그들이 그때에 여러 해 동안 예언하기를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그들을 치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라"
많은 이들이 러시아를 배제한 채, 유렵연합의 통합대통령에만 관심을 갖고 있지만... 실로 종말에 하나님의 대적이 되어 세상을 요란케 하다가 멸망할 자는 <로스와 메섹과 두발왕 곡>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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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기독교인들 투옥,고문,생체 실험" <美국무부>
"北, 기독교인들 투옥,고문,생체 실험" <美국무부>
written by. 정미란
미국 국무부는 15일 국제 종교 자유에 관한 연례 보고서를 통해 "북한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이유로 투옥, 고문을 당하거나 일부는 생화학전을 위한 생체 실험을 당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이 보고서는 탈북자들과의 인터뷰 내용을 근거로 이같이 말하고 "북한 정권은 외부의 관찰자들이 이 같은 보고들을 확인하지 못하도록 효과적으로 막고 있으나, 최근 수년간 인가받지 못한 종교 활동에 대한 가혹한 탄압 사례들로 볼 때 이 같은 보고에 신빙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북한은 특히 중국에서 추방된 탈북자들이 북한 밖에서 기독교 선교사들과 접촉한 것으로 드러나거나 개종했을 경우 모질게 고문을 가하거나 처형시킨다는 미확인 보고들도 있었다고 이 보고서는 말했다.
이 보고서는 남한의 한 선교사를 인용, 북한이 중국 국경에서의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선교하는 사람들을 잡기 위해 선교사 식별 교육을 강화하고 신고 포상금도 늘렸다고 말했다.
이 보고서는 남한의 종교 및 민간 단체들에 의한 남북간 화해 노력에도 불구, 쌍방간 사회 문화 교류는 제한적이라면서 "그러한 접촉들이 북한의 종교 자유에 효과를 미쳤는지는 불분명하다"고 말했다.
보고서는 지난 2000년 외국의 원조로 북한에 문을 연 한 개신교 신학교는 외국의 기독교 계통 비정부 기구들로부터 원조받기 위한 창구로 이용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이어 미국 정부는 지난해 8월과 지난 2월의 베이징 6자회담에서 다른 국가들에게 북한의 종교 자유에 관한 우려를 제기하면서 구체적이고 검증가능하며 지속적인 인권 개선이 이뤄지도록 북한과의 쌍방 관계를 조절할 것을 촉구했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는 또한 지난 3~4월 제네바에서 열린 제 60차 유엔 인권위원회가 결의안을 통해 북한에 인권 개선과 유엔 특별대표의 방문을 촉구토록 하는데 노력했다고 밝혔다.
존 한포드 미국무부 국제종교 자유 담당 특사는 이날 브리핑을 통해 "북한은 아마 세계 최대의 종교인 수감자를 가진 국가일 것"이라면서 " 북한과 같은 비종교자유 국가들의 문제는 신앙인들이 잔혹한 탄압을 받는 다는 것" 이라고 말했다.
미 국무부는 이날 북한을 포함한 중국, 쿠바, 미얀마. 이란, 수단등 5개국을 비종교자유 국가로 재지정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 에리트레아, 베트남 등 3개국을 새로이 추가했다.
북한은 미 국무부가 지난 2001년 국제 종교 자유 보고서를 낸 이래 해마다 비종교자유 국가 및 전체주의 국가로 지정돼 왔다.
미국법에 따르면 종교자유를 억제하는 국가들에 대해 제재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이와 관련, 콜린 파월 국무장관은 종교적 이유로 차별하는 정책들을 전환하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발표된 보고서는 지난 2003년 7월부터 2004년 6월까지 국무부 및 해외 주재 미국 대사관, 언론인, 비정부기구 관계자 등 수백명이 수집한 정보들을 취합한 것이라고 미 국무부는 밝혔다.(konas)
2004-09-16 오전 9:50:3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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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신문에 나타난 김정일정권의 기독교관
<노동신문에 나타난 김정일정권의 기독교관>
○ 미국의 기독교 지도자 빌리 그라함 목사나 세계 가톨릭 국제회의 웨슨 서기장 같은 고명한 성직자들이 이북 방문 소감에서 "이북에 한하여서는 선교할 필요가 없다면서 성서에 쓰여져 있는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였는가 하면 "주님이 가르친 그 이상사회가 이북과 같은 사회라며 에덴동산이 아니라 주체의 낙원이 지구 위에 피어난 민중복락의 동산"이라고 격찬해 마지 않았다.(1996.2.18)
○ 이북이 현세 천국이고 이북 민중이 현세 천국의 향유자, 주인공이라고 볼 때 하느님이 있는 곳은 이북이며 현세 천국의 창업을 이루어놓으신 김정일 영도자님은 정녕 이 땅위에 계시는 하느님이시다.(1996.2.18)
○ 만민에게 복음을 전달한다는 예수의 사랑의 그릇에는 기독교인들 밖에 담길 수 없었고 주권재민을 제창한 자유민주주의의 그릇에도 돈 가진 자들 밖에 담길 수 없었지만 김정일 영수의 광폭정치 그릇은 천차만별의 온 국민만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 앞에 죄를 짓고 회오의 탄식 속에 지구촌을 방황하던 사람들까지도 따뜻이 안아 사랑의 햇빛 속에 영생의 언덕에서 보람찬 삶을 누리게 해주었다.(1996.12.10)
○ 제국주의자들이 떠벌리는 종교의 자유화는 다른 나라와 민족들의 주체성과 민족성을 말살하고 저들의 지배주의적 야심을 실현해 보려는 교활한 책동이다.(1998.3.14)
○ 종교의 탈을 쓴 반동 단체들은 신앙의 자유, 인권을 부르짖으면서 사회주의를 무너뜨리기 위해 미쳐 날뛰었으며, 사상교양 사업을 하지 않아 텅 빈 사람들의 머리 속에 미신이 들어차게 되었다.(1999.6.24)
○ 김정일은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우리 수령님은 하늘이 낸 위인이시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지적하였다.(1999.7.18)
○ 언젠가 김일성을 만나뵙는 영광을 지닌 서방의 정계, 종교계의 한 저명한 인사는 귀국후 자기의 소감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예수야말로 덕과 사랑의 화신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주석님의 덕망에는 예수도, 하느님도 따르지 못할 사랑의 높이가 있고 가장 깊은 인정의 바다가 있다. 나는 김일성의 숭고한 덕망에서 하느님의 화신을 보았다"(1999.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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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선, “목사·십자가는 공포의 대명사”
“목사·십자가는 공포의 대명사”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 증언
제4회 북구원 월요기도회가 지난 5일 종로 기독교100주년기념관 4층에서 50여 명의 참가자들이 모인 가운데 개최됐다.
이날 모임은 김상철 북구원 공동회장(미래한국신문 회장)의 시론 강연,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의 증언, 이수영 북구원 공동회장(새문안교회 목사)의 말씀에 이어 30분 간의 뜨거운 합심기도가 이어졌다.
특히 김성민 대표는 증언에서 북한 초·중학교에서의 반기독교 교육을 소개하고 절박한 탈북과정 중에 갖게 된 신앙과 자유북한방송을 운영하면서 겪는 고초 등 자신의 경험을 생생히 전해 주목을 받았다. 다음은 김 대표의 증언내용 요약.
북한의 인민(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교과과정을 통해 소위 ‘기독교의 악마성’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
인민학교 교과서에는 아펜젤러라는 선교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인민학교 학생이 사과나무에 손이 꽁꽁 묶여 있고 이마에는 청산(靑酸)으로 ‘도적’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 그림이 나오는데 그것은 어린 학생이 배가 고파 미국인 선교사가 소유하고 있는 평양의 과수나무 밑에서 사과를 주워먹다 발각돼 선교사로부터 학대를 당하고 있는 장면이다.
중학교에 가서는 언더우드 목사의 얘기를 배운다. 언더우드는 평양 근교에서 병원과 교회를 세웠다고 하는데 교회 지하실에서 의사 모자를 쓰고 북한주민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고 있는 그림이 나온다. 그는 주민들의 장기들을 떼내어 미국으로 보내고 있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 어떻게 장기를 떼내고 이것이 돈이 될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다시 한번 미국 선교사와 기독교에 대한 공포가 엄습하던 기억이 있다.
초·중학교 교과과정으로부터 체계적으로 배운 이러한 교육은 북한주민들의 마음 속 깊이 새겨지게 되고 선교사, 목사, 십자가는 곧 공포의 대명사가 된다. 탈북민들이 대체로 기독교를 불신하고 십자가를 두려워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나 또한 교회와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조선족 교회에서, 그리고 죽기 위해 북송되는 기차에서 뛰어내려 탈출하는 과정 중에 하나님을 만나고 영접하게 됐다.
한국에 와서는 연세대와 중앙대 대학원에서 공부도 했고 KTV, EBS, MBC, KBS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으며 작년에는 시인으로 등단도 했다. 백두한라회에서 초대회장을 했고 탈북자동지회에서 사무국장도 지냈다.
하지만 남한사회가 그저 공부하고 출퇴근하면서 노임을 받고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는 생각이 점점 든다. 어느날 갑자기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이라고 부르고 그렇지 않으면 방송 PD들은 카메라를 스톱 시키기 시작했다.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27%가 북한을 가장 가까운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고 31%는 체제에 상관없이 통일만 되면 된다고 생각한다고 한다.
시청 앞에서 ‘미제미군철수 우리끼리민족통일’의 구호를 걸고 하는 촛불시위 장면을 사진으로 봤을 때 나는 정말 그것이 평양시 김일성 광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집회인 줄 알았다. 북한을 경험한 탈북민으로서 더 이상 살이 떨려서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죽더라도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자유북한방송을 만들었다.
보도를 본 분들은 방송사 규모가 꽤 큰 줄 아는데 정작 방송국은 책상 두 개에다가 청계천 중고상가에서 산 마이크 두 개와 중고 인터넷 2개 그리고 21만 원짜리 믹서기가 전부이다. 도합 120만 원도 안 들었다. 그런데 그나마 그 방송을 하겠다고 하니까 남북 장관급회담에서는 북측에서는 기조발언으로 탈북자들이 하는 방송 중단하라고 했다. 그것이 김정일의 지시라는 것은 곧 알게 됐다.
어느날 주요 일간지 기자가 꼭 만나야겠다고 해서 가보니 김정일 지시문 몇 개를 보여줬다. 그 중에 하나가 자유북한방송을 하는 자들을 처벌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직접 나서지 말고 3자를 동원해서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총산회라는 단체가 나서 황장엽 선생에게 협박 글을 보내고, 다음에는 북한의 대표적 대남선전 단체인 평양의 ‘한민전’에서 ‘조국을 버리고 간 배신자들을 용서못한다’는 담화문을 냈다. 한국에서는 통일연대라는 단체의 할아버지 할머니 30여 명이 나와 자유북한방송 앞에서 시위를 했다. 나는 시위장소에서 할 말을 잃고 있다 기절해 병원에 실려가기도 했다.
이러한 안타까움과 혼돈, 거짓 속에서 활동을 계속 해야 하는가. 나는 한동안 망연자실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구원기도회에 와서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내가 열 명을 설득하고 백 명을 설득해서 되는 일이 아니구나. 북한구원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셔야 하는 일이구나’라는 것이다.
정리/김범수 기자 bumsoo@
김범수기자 2004-07-09 오후 5: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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