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김일성보다 종교에 더 적대적
김정일, 김일성보다 종교에 더 적대적
김정일정권을 해부한다(22): 김정일의 종교정책
김일성 사후 10년, 김정일 체제 하에서의 북한의 종교정책은 무엇일까. 지난 12일 모퉁이돌선교회 주최로 ‘김일성 사후 10년과 김정일시대의 북한선교’를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이날 발표내용을 중심으로 김정일의 종교정책을 살펴본다.
김정일 시대 북한의 종교에 대한 정책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반종교 정책이고, 둘째는 통일전선을 위한 남한 및 해외 종교인들과의 협력강조이며, 셋째는 외형상 드러난 신앙의 자유에 대한 보장 선언이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종교정책을 답습하고 있다
이는 대체로 김일성 시대부터 이어져온 것으로 내용적으로 보면 서로 모순되기도 하는데 이는 종교정책을 체제의 필요에 따라 변화시켜온 결과이며 종교를 보는 유물론적 사관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김정일은 어린 시절 교회에 다닌 경험이 있는 아버지 김일성과는 달리 종교에 대한 체험적 지식이 거의 없다. 김정일은 해방 당시 겨우 네 살이었고 6·25기간과 ‘사회주의건설시기’ 북한에서 종교에 대한 적대적 이해가 팽배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종교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인 면이 더 강한 것으로 분석된다. 50~60년대 북한의 종교에 대한 정책은 김일성이 1962년 사회안전부에 내린 교시에서 잘 드러나 있다.
“종교인들은 모두 착취계급의 대변자로서 거의가 다 우리를 반대하여 왔으며, 우리 공산주의자들을 마귀라고 욕하고 저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종교인들을 함께 데리고 공산주의사회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 천주교에서 집사 이상의 간부모두와 그 밖의 종교인 중 악질을 재판해서 처단해 버렸습니다...종교인들은 죽여야 버릇을 고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북한당국은 1958년 종교인과 그 가족은 반혁명적 요소로 규정하고 주민성분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약 10만 가구 45만 명의 종교인과 그 가족이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되었고 기독교의 경우 2,000개의 교회, 900여 명의 목사, 30만 명의 신자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71년 김일성은 북한을 방문한 도쿄도지사에게 “북한에는 예배당이 없다”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북한의 종교정책이 외형상 일관된 반종교정책으로 나타난 것만은 아니다. 북한에서는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남북회담과 상호방문이 실시된 것과 때를 맞추어서 조선기독교도연맹, 조선불교도연맹, 조선천도교회 중앙지도위원회 등 세 개의 종교단체가 등장했다. 북한내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통일전선’을 형성하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북한의 의도는 1971년 전국시군사회안전부장(경찰서장) 앞에서 한 김일성의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철없는 젊은이들이 종교에 물드는 것은 사상교육을 강화하고 종교의 허위성과 비과학적인 내용을 잘 해설해 주면 (종교는) 얼마든지 막을 수 있습니다… 적대 계층 출신자들의 경우에는 모두 수용소에 가두도록 하면 됩니다...걱정하지들 말고 머리를 쓰시오.”
김일성은 1975년 내적비밀교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 조국 남반부에 수많은 종교인들이 살고 있는데 우리가 종교인들을 다 죽인다고 생각하면 그들도 우리를 반대하는데 합세할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중앙에 불필요한 종교조직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은 1980년대 들어와 북한 종교인의 외국방문과 남북고향방문단이 평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허용했으며(1985) 봉수교회와 장충성당을 설립하는(1988) 등 외부적 변화를 과시했다. 이즈음 최고재판소 부소장을 역임하던 강영섭이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계기로 목사가 되고 조선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받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1990년대와 2000년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김일성 사후 급격히 어려워진 경제문제는 북한의 종교정책에 대한 외형상 변화와 종교단체의 활동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다.
특히 남한의 교회들이 대북 경제지원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하면서 남북간의 ‘종교교류’ 범위가 넓어졌다. 북한은 1990년대 초까지 개신교의 KNCC 등 주로 남한의 진보적 단체와 접촉했으나 1990년대 중반부터 남한 개신교의 보수교단과도 교류를 시작했다. 2003년에는 584명의 종교인이 경제지원을 명목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북한에서의 종교정책의 확립은 주체사상과 그 시기와 맥을 같이해왔다. 주체사상에서는 종교를 “사회적 인간의 지향과 염원을 환상적으로 방영하여 신성시하며 받들어 모시는 초자연적이고 초인간적인 존대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일성은 사후에도 ‘영생’과 ‘불멸’의 구호로 북한 전역에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으며 김정일은 이를 적극활용 체제강화를 모색하고 있다. 김정일은 체제유지를 위해 주체사상을 포기할 수 없으며 이 같은 상황에서 남북’종교’교류나 북한 종교인들의 활동은 제한될 수 밖에 없고 북한체제의 우월성을 강변하는 도구로 남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한편 통일교와의 긴밀한 관계형성도 김정일체제 하에서 드러나고 있는 부분이다. 김일성 사후 당시 박보희 세계일보의 사장은 북한을 방문했고 문선명도 특별보좌관의 조전이라는 형식을 빌려 김정일에게 호의를 보였다. 현재 문선명의 생가인 평북 정주는 관광지로 꾸며지고 있으며 통일교는 자동차·관광사업 등 각종 경제사업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김범수기자 2004-07-17 오전 10: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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