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예수 소개하는 엘리야 (말라기 4:5)

예레미야 22장 - 유다 모든 왕들에 대한 경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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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제목 : 〈북방환난과 새 시대 회복〉

예언연대 : B.C. 628년∼588년경


성경 : 예레미야 22장

제목 : 유다 모든 왕들에 대한 경고


1. 회개 권고와 형벌의 선고 : 1~9


『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유다 왕의 집에 내려가서 거기서 이를 선언하여 2 이르기를 다윗의 위에 앉은 유다 왕이여 너와 네 신하와 이 문들로 들어오는 네 백성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


"왕의 집"에 내려가 예언하는 행동은 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게다가 그가 가서 증거할 예언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기에 익숙한 왕들이 들으면 반드시 격노케 될 엄한 경고의 말씀이다. 아모스와 같이 하나님만 믿어 극히 담대해지는 일이 없고서는 이와 같은 명령은 순종키가 어려운 말씀이다(아모스 7:13). 그러나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이 순종하였듯이 선지자의 사명을 가진 이 시대의 종들도 기록된 말씀을 그대로 읽어 다시 예언하는 데 있어 주저함 없이 나아가야 한다.


1절 초두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로 시작하여 2절 끝에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로 끝내는 것을 보니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힘껏 높이고 있다. 이것은 그 듣는 자들로 말씀의 앞에서 두려워 떨라는 의미이다. 기독교는 계시(啓示)의 종교로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그 백성이 100% 믿고 떨어 순종할 때에만 "기록된 대로" 축복과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종교이다.


『 3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공평과 정의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제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박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


"공평"이란 치우침 없는 판단을 의미하는데 옳고 그름을 분별함이다. 뒤에 이어 나오는 "정의를 행하라" 함은 각 사람에게 합당한 권리를 찾아주라는 것이다. 이것은 뒤에서 즉시 해설되고 있으니 곧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라"는 명령이다. "이방인""과부""고아", 이 셋은 성경에 흔하게 등장하는 약자의 대명사로서 하나님이 특히나 불쌍히 여기시는 이들이다(야고보서 1:27).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는 것은 여호야김 왕이 선지자 우리야를 잔인하게 죽인 사실을 지적하며 경고한 말씀이다(예레미야 26:20~30).


『 4 너희가 참으로 이 말을 준행하면 다윗의 위에 앉을 왕들과 신하들과 백성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집 문으로 들어오게 되리라마는 5 너희가 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 이 집이 황무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6 나 여호와가 유다 왕의 집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네가 내게 길르앗 같고 레바논의 꼭대기 같으나 내가 정녕히 너로 광야와 거민이 없는 성을 만들 것이라 7 내가 너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니 그들이 각기 손에 병기를 가지고 네 아름다운 백향목을 찍어 불에 던지리라 』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 순종할 것을 독촉하는 말씀이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형통하겠지만(4절), 그렇지 않으면 국가가 파멸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결과로 가게 되는 (시기상) 중요한 단계에서 선포된 말씀인 만큼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그들에게 확인시키는 의미에서 "내가 나로 맹세하노니"라고 말씀하셨다(히브리서 6:13).


"이 집이 황무하리라"(5절) 하셨는데, 예언을 듣지 않은 결과로 예레미야 39장에 그 결과가 기록됐다.


"네가 내게 길르앗 같고 레바논의 꼭대기 같으나 내가 정녕히 너로 광야와 거민이 없는 성을 만들 것이라"(6절) '길르앗'은 아름다운 목장으로 유명하고(길르앗=도피성, 수 20:8), '레바논'은 울창한 백향목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유다 민족이 죄를 회개치 않음으로 '광야'와 같이 되리라고 하신다.


"내가 너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니"(7절) 유다 민족을 침략하여 파괴할 짐승의 나라 바벨론의 군대를 의미한다. 빛이건 어둠이건, 선인이건 악인이건, 상급이건 보응이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장 중에서 결정되고 움직인다. 고로 예언에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이다(이사야 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 8 여러 나라 사람이 이 성으로 지나며 피차 말하기를 여호와가 이 큰 성에 이같이 행함은 어찜인고 하겠고 9 대답하기는 이는 그들이 자기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긴 연고라 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


유대인들의 마음은 너무도 강퍅하여서 바벨론의 1차 침략(B.C.606)을 당하고서도 매맞은 이유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던 상태이다. 그러니 다가올 2차 몽둥이를 예언하고 있는(B.C.599년경) 선지자 예레미야의 말을 알아들을 리가 없다. 고로 하나님은 패역한 그들에게 2차 파멸의 이유를 친히 설명해 주고 계신다. 아담의 가정이 뱀의 말에 홀려 넘어간 것과, 솔로몬 성전이 사단(우상)에게 홀려 넘어간 것처럼, 오늘날의 예수님의 피로 사신 수많은 교회들도 북방을 본부로 하여 퍼져나온 '평화공존' 궤휼정책에 완전히 홀려 넘어간 상태가 지금이니 이 시대의 성민이 다시 예언되는 예레미야서를 청종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택자는 돌아온다(거짓 평화공존에 연합된 종교인들은 100% 심판의 대상이다). ☞ 신앙문답 112번.


2. 여호아하스의 비참한 운명 : 10~12


『 10 너희는 죽은 자를 위하여 울지 말며 그를 위하여 애통하지 말고 잡혀간 자를 위하여 슬피 울라 그는 다시 돌아와서 그 고국을 보지 못할 것임이니라 11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곧 그 아비 요시야를 이어 왕이 되었다가 이 곳에서 나간 살룸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가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12 잡혀간 곳에서 죽으리니 이 땅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 』


요시야의 큰 아들 여호아하스가 애굽에 사로잡혀갈 것을 예언하면서 포로지에서 생을 마감할 것을 말씀했다.


3. 여호야김의 죄와 그 형벌 : 13~23


『 13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을 지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4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광대한 집과 광활한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15 네가 백향목으로 집 짓기를 경쟁하므로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공평과 의리를 행치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었느니라 16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


요시야 왕의 둘째 아들 여호야김을 꾸짖는 말씀이다. 그는 백성을 고용하고도 노임을 주지 않던 못된 왕이었다(약 5:4).


"네가 백향목으로 집 짓기를 경쟁하므로 왕이 될 수 있겠느냐" 자기 집을 화려하게 짓는 것에 있어 경쟁심이 발동하는 따위의 인격으로는 왕위를 유지할 수 없음을 지적하신다. 오늘날도 성도를 치리하는 많은 목자들이 교인 1명의 영혼구원(천국)과 육체구원(천년왕국) 문제보다도 <신자 등록수><화려한 건물짓기>에 경쟁적이다. 교회의 외형 통한 자존심 보존 따위로 과연 하나님이 맡겨주신 제사장의 직무를 다할 수 있겠는가?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공평과 의리를 행치 아니하였느냐" 부친 요시야의 모범된 생애를 들면서 그를 꾸짖으신다. 지금의 개신교는 16세기에 요시야와 같은 루터가 등장하여 종교개혁을 단행함으로써 축복받아 세워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개신교가 또 다시 계시록과 예언서로 종교 개혁을 단행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은 여호야김의 악행으로 떨어져 있다는 증거이다. 교회 안에 극도로 죄악이 가득 찬 때가 지금인 것을 예언서를 먹은 자가 아니고서는 알 자가 없다.


『 17 그러나 네 눈과 마음은 탐람과 무죄한 피를 흘림과 압박과 강포를 행하려 할 뿐이니라 』


부친과는 정반대로 백성에게서 착취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의인을 살해하는 악행을 저지른 것을 지적하며 여호야김 왕의 회개를 독촉하고 있다.


『 18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19 그가 끌려 예루살렘 문 밖에 던지우고 나귀같이 매장함을 당하리라 』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슬프다... 슬프다" 여호야김 왕이 북방의 적군에게 죽게 될 것과 그의 죽음을 슬퍼할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을 말씀하셨다. 왕의 죽음에 그 백성이 안타까와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잔악하고 포학이 얼마나 심했던가를 짐작케 해 준다. 오늘날도 자기 배를 채우는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북방이 내려오는 날 여호야김과 같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 20 너는 레바논에 올라 외치며 바산에서 네 소리를 높이며 아바림에서 외치라 이는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음이니라 』


높은 곳에 올라 여호야김의 비운을 외치라 하시는 건, 그의 운명이 이 예언대로 마감될 것이 확실함을 강조한 것이다. "너를 사랑하는 자"란 왕의 가족들과 그의 근친들을 가리키는데, 여호야김이 죽는 환난 날 함께 망하리라는 의미다.


『 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던 사실을 지적하며, 그로 인해 그 국가가 멸망하게 됨을 예언하신다. 건강할 때 몸 돌보고, 높아질 때 겸손하고, 달리는 말에 채찍질 할 줄 아는 것이 지혜이며 왕된 자의 도(道)이건만 그는 "평안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며 자신만을 돌보았던 것이 나라를 패망케 한 죄악이 되었던 것이다. "네 습관이라"이라 하심은 멸망 당 할 여호야김의 불순종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긴 세월을 통해 쌓여 온 고질적인 죄악이었음을 말해준다.


『 22 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키울 것이요 너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로잡혀 가리니 그 때에 네가 반드시 네 모든 악을 인하여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 23 레바논에 거하여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여 여인의 해산하는 고통 같은 고통이 네게 임할 때에 너의 가련함이 얼마나 심하랴 』


"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키울 것이요" 여호야김 밑에서 일하던 지도자들도 바람에 불려가는 연기처럼 모두 다 멸절되리라는 뜻이다. "레바논에 거하며 백향목에 깃들이는 자"란 높고 영광된 자리에 거하면서 환난의 두려움을 모른 채 교만해 날뛰며 사치했던 왕을 비유한 말씀이다. 교만자는 극도로 높아졌다가는 반드시 더럽고 가련하고 미천한 처지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이는 성경 곳곳에서 증명되는 진리이다(이사야 28:1~4, 14:5~23. 아모스 4:1~3. 6장).


4. 여호야긴의 죄와 그 형벌 : 24~30


『 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너 고니야가 나의 오른손의 인장 반지라 할지라도 내가 빼어 25 네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의 두려워하는 자의 손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갈대아인의 손에 줄 것이라 26 내가 너와 너를 낳은 어미를 너희가 나지 아니한 다른 지방에 쫓아내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고 27 너희 마음에 돌아오기를 사모하는 땅에 돌아오지 못하리라 』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혀 갈 것과 그의 모친 또한 쫓겨나 죽을 것을 예언하신다. "오른 손의 인장 반지" 이것은 그 소유자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보물로서 중요한 문서에 인을 칠 때 사용되는 도장이었다. 여호야긴(고니야)과 하나님의 관계가 이와 같이 긴밀하고 중요한 관계였다 할지라도 죄를 회개치 않는 한 (공의 법칙에 의해) 그는 사정 없이 내던져진다는 것이다.


『 28 이 사람 고니야는 천한 파기(破器)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어찌하여 그와 그 자손이 쫓겨나서 알지 못하는 땅에 들어갔는고 29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3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이 사람이 무자(無子)하겠고 그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는 그 자손 중 형통하여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니라 』


왕의 장래가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를 탄식한 예언이다. 구약 유다에 있었던 사건은 인간 종말에 교회에 있을 심판이므로 정신을 차리고 들어야 한다.


"천한 파기냐 좋아하지 아니하는 그릇이냐" 사람이 천하여 쓸모없이 된 그릇을 내어버리듯이 여호야긴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던지움을 당할 것이라 한다. 본래는 그렇게 될 일이 아닌데, 왜 변질되어 불순종함으로 이와 같은 일을 자초했느냐는 탄식조의 말씀이다. "땅이여 땅이여 땅이여 여호와의 말을 들을지니라" 유대 민족의 말로(末路)를 대표하는 여호야긴과 그 가족의 비참한 운명을 내다볼 때 느껴지는 원통함과 탄식이 배어져 있는 말씀이다.


"너희는 이 사람이 무자하겠고 그 평생에 형통치 못할 자라 기록하라" 이와 같이 인간 종말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총애를 받던 기독교회가 구약 교회가 걸어갔던 이 모든 일에 유념치 않고, 다시 예언하는 말씀을 무시하여 오메가의 미혹 앞에 끌려간다면 북방 칼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유대 왕가에 대한 예언을 어찌하여 오늘날의 교회에 적용시키느뇨?"라고 말하는 모든 이들은 사단의 자식들이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복음을 주신 궁긍적 목적은 인간 종말의 세계 역사가 계시록 10:7절처럼 되게 하시어, 계시록 11:15절의 나라를 이루기 위함에 있는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의 역사가 동일함을 깨닫고 구약 교회가 당한 이 비운을 세계적으로 선포하여 세계 교회로 하여금 이 예언의 확실성을 깨닫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다시 예언하라" 명령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가 된다. 참 종은 주인의 마음을 헤아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자이다. 예수님은 '작은 책'과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을 꿀같이 먹고 '나라와 백성과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라" 하셨으니 우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실행에 옮겨야 할 뿐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멘!"


(신앙문답) 112. 지금 세상이 평화를 부르짖는 이 때에 기독교 신자의 할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우리 기독 신자는 '평화'를 반대할 것도 없고, '평화'를 위하여 활동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기록한 말씀대로 '잠깐동안 잠잠한 때'도 있고, '홀연히 환란이 임하는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람이 애쓴다 하여도 말씀대로 되는 일을 막을 수가 없으니 우리는 말씀대로 나리는 역사를 날마다 받아야 할 것이요, 말씀대로 될 장래를 분명히 알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고, 낙심할 필요도 없이, 날마다 우리의 사는 목적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새 시대에 두고 그날의 수고에서 만족을 찾고 충성을 다할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니,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에 순종할 의무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죽을 것 같은 일이라 하더라도 주의 뜻이라면 순종해야할 것이며, 아무리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있다 하여도 주의 뜻이 아니라면 순종치 않아야 할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각을 앞세운다는 것은 교만에 가까운 일이니,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에 생각밖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과거에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라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종들은 풀무불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단 3장).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우리의 생각밖에서 나타난다는 것은 과거 성도들의 삶에서도 그러했지만, 이제 우리 시대에는 더욱 분명한 사실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를 부르짖는 세상' 속에서 말씀대로 오는 평화 왕국을 위하여 활동하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인격을 무장하는 일에 전력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인위적인 평화'라는 것은 '잠깐'인 것이니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므로) 인위적인 평화에 목적을 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진 뒤에 오는 완전한 평화 왕국에 목적을 두고 심판 날에 두려움이 없이 설 수 있는 인격과 신앙을 다지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무 것도 생각지 않고 내 인격 하나를 바로 가지기 위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을 전 생활의 목적으로 두고 싸워 나가는 것뿐입니다.


신앙문답 95

신앙문답 110

WCC 의 신앙노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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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1장 - 회개 없는 기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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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제목 : 〈북방환난과 새 시대 회복〉

예언연대 : B.C. 628년∼588년경


성경 : 예레미야 21장

제목 : 회개 없는 기도


1. 시드기야 왕에 대한 예언 : 1~7


『 1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보내어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우리를 치니 청컨대 너는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  2 여호와께서 혹시 그 모든 기사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가 우리를 떠나리라" 하던 그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


본문은 시드기야 왕이 난국을 당하여 선지자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모습이다. 이것은 15:11절에 "내가 진실로 내 대적으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대로이다. 선지자를 불신하던 왕이 선지자에게 기도원조를 부탁했으나 이 모습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실함이라고는 들어 있지 않았다. "우리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라"고 한 시드기야의 간청은 당면한 난국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 여하를 알아보려는 얄팍한 마음일 뿐, '진정으로 회개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왕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혹시 그 모든 기사로 우리를 도와 행하시면 그(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가 우리를 떠나리라"고 하였으나 이것은 왕의 오판이었다. 여호와는 죄인을 거저 구원하시는 신(神)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먼저 그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신다. 회개 없이는 절대로 구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타락한 인간을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공의(公義)이기 때문이다.


"... 하던 그 때에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왕이 보낸 자들의 말이 끝나자마자 말씀이 임한 것으로 보아, 하나님께서 왕의 기도 부탁에 대해 즉각적인 거절의 뜻을 나타내신 것이다. 임한 말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3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대답하되 너희는 시드기야에게 이같이 말하라 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너희가 성 밖에서 바벨론 왕과 또 너희를 에운 갈대아인과 싸우는 바 너희 손에 가진 병기를 내가 돌이킬 것이요 그들을 이 성 중에 모아 들이리라 5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노와 분과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


시드기야 왕이 원하던 바와는 정반대로 예루살렘이 북방 칼 앞에 멸망케 되리라는 예언만 쏟아져 나오고 있다(예레미야 37:8~10).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심은 당신의 택한 백성을 위한 사랑의 마음에서이다. 회개도 없이 육적인 도움만 바라는 그들의 사상은 깨어져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노와 분과 대노"로 가슴 아픈 징계를 행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종말의 성도들을 향한 귀한 교훈이 된다. 종말에 북방세력을 무너뜨리고 새 시대를 이루는 말씀 곧 새 일(예레미야 31:22)을 외치는 '한 제단'이 등장해 있으나, 대다수의 교권에서는 시드기야처럼 애굽(미국)의 도움만 의지하고 있는 상황이 구약 때와 꼭 닮았다. 모든 강대상에서 교세의 확장과 성도의 물권축복을 위한 기도는 홍수와 같이 터져나오고 있지만, 정작 필요한 북방문제에 대하여는 한 마디의 기도도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참되이 기도하는 제단의 부르짖음은 그 내용이 낯설고 시대착오적이라 하여 이단취급을 받고 있으니 어두운 시대이다. 그러나 정작 북방이 홍수물처럼 내려오는 그날에는 다수의 교권이 자신들의 생각이 오판이었음을 깨닫고 급한 중에 '종말론'과 '살 길'을 알아보려고 '새 일' 제단 앞에 사람을 보내어 장차 될 일을 묻겠지마는, 그것은 진실한 회개의 정신에서 비롯된 행위가 아니라 단지 급한 불을 꺼보려는 기회주의적 몸부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대노(大怒)를 피할 수가 없다는 교훈이다.


장차 아모스 8:9~13절과 같은 현실이 한국 땅과 세계교회에 임할 것이다. '새 일'을 멸시하던 포도원은 질려와 형극이 가득한 개포도밭이 된다 하셨다(이사야 5:5~8, 7:23). 그러나 가련한 자들과 진실한 자들과 참된 성도들은 북방세력으로부터 구해내시겠다 하셨으니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예레미야 16:15~23, 31:7~22). 하나님은 '새 일'이 라헬에게 최후의 소망이 될 것이라 예언하셨다(예레미야 31:17~22). 교회가 가질 최후의 소망으로 '새 일'을 주셨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장차 '새 일'을 대적하는 교권과 정권은 재앙과 칼에 죽되 조금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한 채 패망한다는 것이 다음 예언의 참뜻이다.


『 6 내가 또 이 성에 거주하는 자를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치리니 그들이 큰 염병에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7 여호와께서 또 말씀하시되 그 후에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신하들과 백성과 및 이 성읍에서 염병과 칼과 기근에서 남은 자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과 그 대적의 손과 그 생명을 찾는 자들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칼날로 그들을 치되 아끼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① 사람이나 짐승이 모두 다 염병에 죽고(6절).

② 전쟁과 염병으로 다 죽고 남은 자들이 또 다시 원수의 손에 잡히고(7절上).

③ 그 잡힌 자들이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원수의 칼에 죽게 되리라 하셨다(7절下).


이와 같은 현상은 표면적으로 볼 때는 너무나도 잔인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도 비참하여 동정을 줄 만도 한 이 재앙의 배후에는 절대로 동정할 수 없는 '깊이 숨겨진 교회의 악독'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가 당하는 형벌이 아무리 크다 한들 교회가 하나님께 지은 죄악의 크기와는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욥기 11:6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


2. 백성들의 항복을 권함 : 8~10


『 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또 이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신다 하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니 9 이 성에 거주하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운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은 노략한 것같이 얻으리라 』


유다가 살 길은 "항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하신다.


"그의 생명은 노략한 것같이 얻으리라" 전쟁에서 얻어지는 '노략물'은 근근히 얻어지는 것이며 위태한 중에 수확(收穫)되는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들의 생명이 위기에 빠져 있지만 그들이 선지자의 예언을 듣고 항복하면 그나마 근근히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유다 왕이 항복하지 않고 친애굽 노선을 취했으므로(에스겔 17장)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가 내려왔던 것을 상고할 때, 우리는 이 사실을 21세기 교회에 다시 예언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의 교회가 자기의 죄악으로 인해 내려오는 북방세력을 막아보려고 하나님을 떠나 남방 강대국을 의지한다면, 시드기야와 유대교회가 당한 황폐와 멸망을 그대로 당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예언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짧지만, 저 "한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구약 모든 예언서를 구구절절이 무장해야 하니 '진정한 파수꾼'은 1분 1초라도 무가치한 일에 시간을 낭비할 겨를이 없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에베소서 5:16) 하신 말씀은 이때를 위한 말씀이다. 예언서(기름)를 무장(예비)한 자는 이스라엘 교회가 미혹을 받아 영적으로 캄캄한 밤중이 될 때,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는 음성에 벌떡 깨어 흑암을 물리칠 예언의 등불을 밝히고 신랑을 영접해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되지만, 생명의 말씀을 주어도 이단이라 하며 핍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구약 때 그러했던 것처럼 '사망'으로밖에 나아갈 길이 없을 것이다.


『 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얼굴을 이 성으로 향함은 복을 위함이 아니요 화를 위함이라 이 성이 바벨론 왕의 손에 붙임이 될 것이요 그는 그것을 불로 사르리라 』


"나의 얼굴을 이 성으로 향함"이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진노를 내리기로 결심하셨음을 의미한다. 이제 유다 나라가 멸망케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빚어지는 철저한 심판인 것이다. 고로 유다가 하나님이 내려보내신 북방군대에 항전(抗戰)한다 함은 결국 하나님의 경영에 대항하는 꼴이 된다. 그러므로 살 길은 9절! 곧 정하신 몽둥이 앞에 항복하는 길뿐이라는 것이다(예레미야 27:6~1).


3. 왕가(王家)와 백성에 대한 심판 선고 : 11~14


『 11 유다 왕의 집에 대한 여호와의 말을 들으라 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공평히 판결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내 노가 불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


이 말씀은 유다 왕가(王家)의 집권자(執權者)들을 향하여 주신 예언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표현이 두 차례 연거푸 나왔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힘주어 말씀하고 계심을 뜻한다. "다윗의 집"은 다윗과 같은 의(義)로운 임금이 세운 기반(基盤)에서 의로운 통치(統治)를 행할 왕가(王家)이다. 이러한 지위에 앉아서 불의(不義)를 행한다는 것은 너무도 모순된 일이다. 고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집이여"라 부르시면서 불의한 집권자들이 의롭게 될 것을 권고(勸告)하고 계신다.


『 13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골짜기와 평원 반석의 거민아 보라 너희가 말하기를 누가 내려와서 우리를 치리요 누가 우리의 거처에 들어오리요 하거니와 나는 네 대적이라 14 내가 너희 행위대로 벌할 것이요 내가 또 수풀에 불을 놓아 그 사경을 사르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골짜기와 평원 반석"은 작은 산들로 골짜기를 이루고 또 여러 평원(平原)을 갖고 있는 유대 땅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이러한 지리적 환경을 믿고 자신들의 나라를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요, 반석 같은 땅으로 알 때 그들은 자연히 하나님 대신에 다른 것으로 마음 든든해 하는 범죄를 행케 된 것이다. 하나님 아닌 것으로 든든해 하는 것! 그것이 곧 우상숭배이다.


"내가 너희 행위대로 벌할 것이요" 하나님을 거역하여 재앙을 당하게 된 유다가 하나님 아닌 것을 의지하여 안일한 대비태세를 보이고 있으니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대로 벌하시겠다 말씀하신 것이다. "수풀에 불을 놓아 그 사경을 사르리라" 하심은 장차 유다 땅이 바벨론 군대의 공격으로 인해 환난의 불길에 휩싸일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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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20장 - 파수꾼의 시련과 역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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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제목 : 〈북방환난과 새 시대 회복〉

예언연대 : B.C. 628년∼588년경


성경 : 예레미야 20장

제목 : 파수꾼의 시련과 역사


1. 바스훌의 박해와 선지자의 예언 : 1~6


『 1 제사장 임멜의 아들 바스훌은 여호와의 집 유사장(有司長)이라 그가 예레미야의 이 일 예언함을 들은지라 2 이에 바스훌이 선지자 예레미야를 때리고 여호와의 집 베냐민의 윗문에 있는 착고에 채웠더니 3 다음날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착고에서 놓아 주매 예레미야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


선지자는 언제나 자기 민족에게 임할 환난 재앙을 예언하고도 핍박을 받는 존재이다(미가서 7장 참조). 본문은 참 선지자가 유사장(성전의 질서유지 책임자)에게 매를 맞고 수금 당하는 모습이다. 유사장 곧 제사장의 두목이 폭행을 했다는 것은 당대의 종교가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알려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형식과 외식적인 교회활동을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러한 교계적 부패를 현실감 있게 증거라도 하라는 듯, 예레미야서 집필 중인 2003년 5월 25일 주일날 아침, 선지자들이 기록한 모든 말씀을 가감치 않고 이 시대에 다시 예언하는 본 제단을 교인수 1위를 자랑하는 대형화된 거대교권이 폭언과 폭행으로 핍박하는 일이 발생했다. 다음 주소를 통하여 내용을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http://goo.gl/kiEecy).음성파일


통화로서 끝인 줄 알았으나 저들은 통화 중에 했던 말인 "너희 교회 어디야? 가서 확 뒤집어버릴테니까... 죽고싶냐?"는 말을 실행에 옮기려는 듯, 통화 후 정확히 4시간 만에 우리 교회(스룹바벨선교회)에 도착하더니 검은 승용차 2대로부터 안전부장(교회의 질서유지와 안전을 담당하는 직책)과 그가 거느리는 키 180cm 이상되는 건장한 남자 4~5명과 무술 유단자로 보이는 험상궂게 생긴 무표정의 장정이 하차하여 교회의 오후 예배 준비성가 시간을 방해하였다. '계시록을 읽고 듣고 지키지 않으면 교회가 북방세력으로부터 화를 당한다'는 전도지를 자기네 교회 장로들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하여 그 여집사를 손봐주러 온 것이다. 오자마자 문을 부수듯 두드리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무슨 일로 찾아오셨느냐'고 물으러 나간 청년의 멱살을 잡고 주먹질을 해대는 모습이란 도저히 성령의 열매로 볼 수 없는 흑암 덮인 행위였다.


교회의 신앙생활의 요점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다. 요한복음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3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예레미야는 자기를 "놓아주는 바스훌" 앞에서도 그 예언의 내용을 굽히지 않고 초지일관(初志一貫)하여 전하므로 앞으로 임할 재앙에 대해 분명하고도 견고하게 예언했다. 이렇듯 참 선지자는 자기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동행할 뿐이다. "여호와께서 네 이름을 바스훌이라 아니하시고 마골밋사빕이라 하시느니라" '바스훌'이란 '권세를 확장하는 자'란 뜻인데 이제부터는 그가 "마골밋사빕" 곧 '사방에 두려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 우게 되리라 한다. 이 이름은 종말에 북방환난이 내려오는 날 '권세 있는 교회가 처하게 될 모습'을 예표한 것이다.


『 4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그 원수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네 눈은 그것을 볼 것이며 내가 온 유다를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그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겨 칼로 죽이리라 5 내가 또 이 성의 모든 부와 그 모든 소득과 그 모든 귀물과 유다 왕들의 모든 보물을 그 원수의 손에 붙이리니 그들이 그것을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가리라 6 바스훌아 너와 네 집에 거하는 모든 자가 포로되어 옮기우리니 네가 바벨론에 이르러 거기서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너와 네가 거짓 예언을 하여 들린 네 모든 친구도 일반이리라 하셨느니라 』


4~6절은 예루살렘과 바스훌에게 임할 환난의 내용이다.


① 그가 그의 친구들이 칼에 죽는 것을 보게 됨(4절).

② 모든 소유와 보물이 원수에게 탈취당하게 됨(5절).

③ 그의 가족들과 그 자신도 바벨론에 사로잡혀가게 됨(6절).


지금은 예레미야서를 다시 읽어 전하는 시대이다. 이 때 '다시 예언하는 말씀'을 멸시하며 압박하는 교회의 권세자들은 바스훌과 같이 모두 '후 3년 반'으로 들어가 기록된 저주의 예언을 통과하게 될 것이다.


2. 예레미야의 기도와 확신 : 7~13


『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선지자의 직분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시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신명기 12:32) 하셨다. 계시록 22:18~19절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선지자는 주께 받은 사명으로 괴롭지만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11) 하신 말씀을 기억하자.


『 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


선지가 말할 때마다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는다" 함은 입을 열 때마다 북방환난과 재앙의 내용을 선포했다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1장에서부터 '가마솥이 북에서부터 끓고 있으며 북방 모든 나라가 유다와 이 땅 모든 거민을 치러 내려온다'는 묵시를 받았다(예레미야 1:13~). 그러나 유다 정권과 교회는 듣고도 끝까지 불순종하였기에 결국 바벨론의 세 번째 침략을 당하므로 완전한 붕괴를 맞이하게 된다(예레미야 39장). 그러나 그들은 붕괴를 당하기까지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고 참 선지를 모욕하고 괴롭히기만 했던 것이다.


『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 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


동족이 가하던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괴로움 중에 다시는 여호와의 뜻을 선포하지도 그 이름으로 말하지도 아니하겠다 하여도 선지자는 곧 "중심이 불 붙는 것같이" 뜨거워지게 되므로 다시 뛰쳐나가 예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강권역사이다. 인간의 힘이 못당하는 성령의 역사이다(스가랴 4:6~ ). 이렇게 되는 이유는...


①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온 말씀임이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이고 ② 말씀의 내용이 너무도 참되기 때문이며 ③ 성령께서 그로 하여금 그것을 전하지 않고는 못 견디도록 그 마음을 뜨겁게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곳에는 마귀의 참소도 강한 법인데, 오늘날 예레미야를 다시 예언하는 종들도 다음과 같은 대적들의 훼방을 통과케 될 것이다.


『  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의 두려움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나의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피차 이르기를 그가 혹시 유혹을 받으리니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


선지자는 자기가 당하는 모든 위험스러운 일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는데, 곧 비방하는 일과 해하려는 음모들이다.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이 말은 원수들끼리 주고 받는 말인데, 예레미야에게서 무슨 허물을 찾으면 알려 달라는 말이며, 고소할 때는 함께 힘이 되어주겠다는 말이다. 이들의 공동 목적은 예레미야를 잡아 죽이려는 것 한 가지뿐이다. "친한 벗도 다 나의 타락하기를 기다리며" 친한 친구들까지도 예레미야가 죄를 범하고 거꾸러지기를 원하리만큼 참 선지자의 길은 외롭고 고독하며 범인(凡人)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시편 55:1~16).


『 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는 고로 나를 박해하는 자가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치 못하므로 큰 수욕을 당하오리니 그 수욕은 영영히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


본절에서는 예레미야가 10절까지에서 고백한 힘겨운 역경 중에서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원수들이 산더미같이 일어나 예레미야를 휘두르는 장면들에서는 마치 하나님조차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의 긴박함과 위기감이 조성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자기와 함께 하여 주시는 "두려운 용사"로 알았으며 원수들이 자신을 이기지 못할 것을 내다 보았다. "그들은... 큰 수욕을 당하오리니" 예레미야는 자신을 박해하는 모든 자가 실패할 것을 확신하였는데, 이는 말세의 종들에게 큰 위안이 된다. 종말의 파수꾼들이 예레미야서를 들고 나갈 때 대적의 무리들이 죽일 듯 달려들테지만 그들은 큰 수욕을 당하게 되고 예레미야와 같은 144,000명의 용서들은 "두려운 용사" 하나님의 완전보호를 받게 될 예언이다.


『 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수하심을 나로 보게 하옵소서 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


예레미야의 신앙을 드러내주는 구절이다. 그는 자기의 심사(心思)에 불의함이 없다는 사실과, 그것을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안도감을 갖는다. 13~ 극도로 위험한 때이지만 하나님을 노래하며 찬양하는 모습은 하박국 3:16~18절에 나타난 말세 종의 자세이다. 말세 종들은 세상 권세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들은 마음이 가난하다.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는 과거형 문투의 신앙고백은 마귀로부터 권세 받은 악한 종들이 말세 종들을 핍박하고 나올 때 큰 위로의 말씀이 될 것이다. 과거형 문투 예언은 이미 그렇게 이루어진 줄 믿고 나아가라는 강한 권고의 말씀이다. 우리는 "구원하셨음이니라" 이 한 말씀으로 인해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소망의 열매는 이처럼 달다. 하지만 인내의 과정은 쓰다는 진리가 다음의 말씀에서 확인된다.


3. 선지자가 자기 생일을 저주함 : 14~18


『 14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15 나의 아비에게 소식을 전하여 이르기를 네가 생남하였다 하여 아비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를 받았더면, 16 그 사람은 여호와께서 훼파하시고 후회치 아니하신 성읍같이 되었더면,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17 이는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나의 어미로 내 무덤이 되게 하지 아니하셨으며 그 배로 항상 부르게 하지 아니하신 연고로다 18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나와서 고생과 슬픔을 보며 나의 날을 수욕으로 보내는고 』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이라고 말함과 동시에 그의 출생 소식을 아버지에게 전한 자까지도 저주를 받았더면 좋았으리라고 하고 있으니(14~15)... 선지자 예레미야의 연약한 체질이 감당키 어려운 얼마나 커다란 고통과 핍박이 덮쳐왔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이러한 저주의 탄식은 선지자의 믿음이 하급이어서가 아니라, 고통이 너무 강하므로 나오는 탄식인 것이다. '출생하지 않았더면 더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들 만큼 괴로운 환경은 말세 종 144,000명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올 것이다. 이 예언이 기록된 것은 참 선지의 가는 길이 얼마나 험한가를 알리는 데 있지 누군가를 저주하는 데 있지 않다.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원한 바 있다(열왕기상 19:4).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대항할 말세 종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이러한 환경을 거쳐가야 할 것이다.


"그로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 낮에는 떠드는 소리를 듣게 하였더면" 이것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모든 공포의 소리를 의미한다.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아니하셨으며" 여기서 "그" 는 하나님이시다. 원망하는 말이 아니고 선지자의 길이 이러한 말이 나올 만큼 험하다는 뜻이다.


선지자는 그의 삶 전체가 사단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되는 만큼 그 인생에서는 기가 막힌 일들이 수없이 발생케 된다. 욥기 3:1~26절에서도 기가 막힌 말을 많이 함을 볼 수 있다. 이사야 29:1~4절에도 말세 종은 "네 목소리가 신접한 자의 목소리같이 땅에서 나며 네 말소리가 티끌에서 지껄거리리라" 하신 상태가 된다고 예언돼 있다. 우리가 비껴 갈 수 없는 필수관문의 예언들이다.


이사야 48:10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 이시야 119:67~72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신데, 왜 택한 종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고난의 풀무를 지나게 하시는 것일까? 그것은 사랑하는 종들에게 세세 왕권을 주시기 위함이다. 세세 왕권을 주시되 강한 마귀와 싸움을 붙여 이기는 자에게 준다는 것이 '공의'(公義)이므로 "고난"이 필요한 것이다. 고난은 주님의 '모략적 사랑'이다. 그러므로 이사야 49:2~ 종을 "마광한 살"같이 아프게 갈아 전통에 감추고 꼼짝 못하게 하시는 것도 다 원수 마귀를 이기게 하기 위한 주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임하는 모든 핍박과 고통을 도리어 축복으로 알고 감사만 하자! 그것이 진정한 파수꾼의 인격이요, 그가 걸어야 할 신앙의 정로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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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9장 - 멸망의 상징인 파기(破器).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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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제목 : 〈북방환난과 새 시대 회복〉

예언연대 : B.C. 628년∼588년경


성경 : 예레미야 19장

제목 : 멸망의 상징인 파기(破器)


1. 힌놈 골짜기의 심판 경고 : 1~9


『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가서 토기장이의 오지병을 사고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을 데리고 2 하시드문 어귀 곁에 있는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거기서 내가 네게 이른 말을 선포하여 』


"오지병"은 목이 좁은 병으로서 속에 담긴 액체를 쏟을 때에 "박뿍 박뿍" 하고 소리가 난다. 이 병은 토기로 만들었으며 오짓물을 발라 구어 윤이 나게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병의 깨어짐과 같이 유다 나라(현 교회)가 깨어질 것을 실물교훈(實物敎訓)으로 보이신 것이다. "백성의 어른들과 제사장의 어른 몇 사람"을 데리고 가라 하심은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는 어른들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하시드 문"은 '태양의 문' 혹은 '질그릇 조각의 문'이라고 하는 예루살렘 동편 문을 뜻한다. '힌놈의 아들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편 골짜기인데, 하시드 문을 통해서 내려가면 '힌놈의 아들 골짜기'가 나온다 하니 하시드 문의 정확한 위치는 예루살렘 성 남동쪽 모퉁이쯤 된다. 이 문은 바로 느헤미야서에 기록된 분문(糞門=똥문)과 동일시된다(2:13). 이 문이 '질그릇 조각의 문'이라 불리우는 것은 근처에 토기장이의 집들이 밀집된 관계로 많은 질그릇 조각 파편이 이 문 부근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선지자가 유다 어른들을 데리고 이곳으로 가는 이유는 앞으로 유다 땅이 '도벳'과 같이 저주 받은 땅이 될 것을 실천적으로 예언하기 위함이다. 유다 백성이 하나님이 주신 땅을 우상숭배로 더럽혔으므로 이제 하나님께서도 유다 땅에 살육을 베푸시어 '도벳'과 같은 피비린내 나는 골짜기가 되게 하겠다는 것이다.


< ※ 하시드 문 가까이에 있는 토기장이의 밭은 도벳=기드론 골짜기=힌놈 골짜기=살육의 골짜기 등으로 불리운다. 여기서 불법적인 우상제의가 행해졌으며 바알, 몰렉 등에게 어린아이를 잡아 바치는 악습이 자행되었다. 렘 32:35. 대하 28:3, 33:6. 예레미야 7:32). 이러한 예언을 읽고도 무심하여 계속 가증한 행동을 하게 되면 다시 예언되는 종말! 바로 지금 저 심판의 골짜기에 매장될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


이사야 30:33 "대저 도벳은 이미 설립되었고 또 왕을 위하여 예비된 것이라 깊고 넓게 하였고 거기 불과 많은 나무가 있은즉 여호와의 호흡이 유황 개천 같아서 이를 사르시리라" 이 심판을 벗어나는 방법은 3절부터 펼쳐지는 예레미야의 예언에 귀를 기울이는 것 뿐이다.


『 3 이르기를 너희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거민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곳에 재앙을 내릴 것이라 무릇 그것을 듣는 자의 귀가 진동하리니 』


"유다 왕들과 예루살렘 거민아" 유다 나라가 망하게 된 그 죄책(罪責)이 "왕들""거민들" 양쪽에 다 있다는 말씀이시다. 도벳과 같이 더러워진 "이곳" 유다 땅에 전쟁의 화를 보내시겠다고 하신다. 이때 "듣는 자의 귀가 진동"한다고 하신 것은 엄청난 살육심판의 환난이 임한다는 소식을 듣는 자마다 놀라리라는 뜻이다.


『 4 이는 그들이 나를 버리고 이곳을 불결케 하며 이곳에서 자기와 자기 열조와 유다 왕들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무죄한 자의 피로 이곳에 채웠음이며 5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바알에게 번제로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내가 명하거나 말하거나 뜻한 바가 아니니라 』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린 죄"는 하나님이 그들을 버려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시는 원인이 된다.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이란 '우상'이다. 하나님의 말씀 이외의 길은 모두 다 우상의 길이다. "무죄한 자의 피로 이곳에 채웠다" 함은 선지자 시대에 참된 종들이 많은 핍박을 받아 죽임 당한 사실을 가리킨다(예레미야 2:34, 7:6, 22:3,17). 언제나 종교가 부패해 갈 때는 의인의 피에 주린 불의한 자들이 많아진다(시편 14:4~6). 앞으로 예레미야서를 들고 나가는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많아진다면 우리는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이니 더욱 힘을 낼 일이다.


"또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산당을 건축하고 자기 아들들을 불살라 드렸나니" 이는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인 율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헛된 미신으로 떨어졌을까? 아들을 불살라 바침은 사람이 한 번 미혹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는 수렁으로 빠지게 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예언서 어디를 보나 구약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사단의 꾀임에 끌려간 흔적뿐이다. 이는 아담 이후의 인간 중 뼛골속 선악과의 질을 이기고 사단의 미혹을 받지 않을 자가 없다는 결론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긴 자"가 되는 길은 오직 사단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피와 새 일의 말씀에 연합하는 그것뿐이다. 영육이 누릴 지상 천년의 축복은 사단이 들어쓰는 거짓 선지자의 궤휼(오메가의 미혹)을 이겨야만 준다는 것이 종말의 법이다. 거짓 선지자는 교회를 살육심판의 도벳 골짜기로 몰아넣기 위해 존재하고, 144,000명은 교회를 도벳 골짜기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존재한다.


『 6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다시는 이 곳을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칭하지 아니하고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는 날이 이를 것이라 7 내가 이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계(謀計)를 무효케 하여 그들로 그 대적 앞과 생명을 찾는 자의 손의 칼에 엎드러지게 하고 그 시체를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게 하며 8 이 성으로 놀람과 모욕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모든 재앙을 인하여 지나는 자마다 놀라며 모욕할 것이며 9 그들이 그 대적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에게 둘러싸여 곤핍을 당할 때에 내가 그들로 그 아들의 고기, 딸의 고기를 먹게 하고 또 각기 친구의 고기를 먹게 하리라 하셨다 하고 』


죄 값으로 받을 재앙의 선포이다.


① 교회가 "도벳이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의 악행을 버리지 않았으므로 그곳은 "살육의 골짜기"가 되며(6절).

② 현세적, 육체적인 복을 바라며 행하던 유다인의 모계(謀計:계책을 꾀하는 일)는 실패할 것이며(7절).

③ 예루살렘 성이 황폐해져 지나가는 행인들의 놀람과 모욕거리가 될 것이며(8절).

④ 유다인이 적군에게 포위될 때 극도의 식량난으로 서로의 고기를 뜯어먹는 일이 있을 것이라 하셨다(9절) : 이 일은 바로 '후 3년 반'에 떨어진 기독교인들에게 이루어질 일이다(신명기 28:52~57. 열왕기하 6:28~30. 예레미야애가 2:20, 4:10 참조).


우리는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유다 백성이 당할 환난의 비참함이 곧 그들이 행한 죄악의 비참함과 동질동량(同質同量)임을 깨달아야 한다. 21C 종말에 기독교가 무서운 '3대 화'를 통과하게 되는 것은 교회의 죄악이 그만큼 무섭다는 뜻이다.


2. 파기(破器)로 멸망을 경고함 : 10~13


『 10 너는 함께 가는 자의 목전에서 그 오지병을 깨뜨리고 11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을 파하리니 그들을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하리라 』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동행자들의 앞에서 "오지병을 깨뜨려"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실물교훈(實物敎訓)를 행하라 하신다. 21C의 교회는 이 살아 움직이는 예언을 경청해야 한다. 사랑과 온유의 예수님이 무서운 심판주로 다시 오실 때 촛대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회들이 바로 이처럼 깨어지고는 다시 회복될 수 없는 형편에 처할 것임을 알려주신 예언이기 때문이다.


『 1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 곳과 그 중 거민에게 이같이 행하여 이 성으로 도벳 같게 할 것이라 13 예루살렘 집들과 유다 왕들의 집들 곧 그 집들이 그 집 위에서 하늘의 만상에 분향하고 다른 신들에게 전제를 부음으로 더러워졌은즉 도벳 땅처럼 되리라 하셨다 하라 』


예루살렘은 이제 "도벳"과 같이 시체들로 더러워진 땅이 될 것인데, 성지(聖地)가 이렇게 시체들로 더럽게 되는 원인은 <우상숭배>이다. 에스겔 9장에서도 성소에서 어른들 곧 장로들로부터 시체가 될 것을 예언하셨는데, 그 원인 또한 성읍(교회)에서 행해지는 <가증한 일> 곧 '우상숭배' 때문이라고 알려주셨다(이사야 43:28, 66:6~ , ☞ 에스겔 9장 설교를 참조하라).


3.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예언함 : 14~15


『 14 예레미야가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예언하게 하신 도벳에서 돌아와 여호와의 집 뜰에 서서 모든 백성에게 말하되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이 성에 대하여 선언한 모든 재앙을 이 성과 그 모든 촌락에 내리리니 이는 그 목을 곧게 하여 내 말을 듣지 아니함이니라 하셨다 하라 』


선지자는 성전 뜰에서 다시 예언하였다. 내용은 유다 민족이 받을 재앙에 관한 말씀이다. 종말에도 선지자 사명을 가진 파수꾼들은 예수님께서 "교회와 종들"에게(계시록 22:6~,16~) "이후에 마땅히 될 일"(계시록 4:1~)에 관하여 계시하신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그대로 외쳐 예언해야 한다. 인봉개시(印封開始)된 이 말씀을 가감하면 누구든지 이 책에 기록된 재앙이 임하리라고 예언하셨으니(계시록 22:18~19) 이 시대의 성도는 두려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고 듣고 지켜야 한다(계시록 1:3). 우리는 예레미야와 같이 이 시대에 다시 예언할 자들이다. 그러나 이 일에는 엄청난 시련이 따르는 것이니 20장을 통하여 교훈받지 않고서는 다가올 시련을 이길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 예레미야서를 읽는 우리 모두가 형님 예레미야가 걸어간 길을 묵상할 때 크게 깨닫고 각성하므로 큰 시련이 다가오는 그날에 더욱 담대히 나아가 예언할 수 있는 인격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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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제목 : 〈북방환난과 새 시대 회복〉

예언연대 : B.C. 628년∼588년경


성경 : 예레미야 18장

제목 : 하나님의 절대 권력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로마서 9:21)


예레미야는 토기장이 집의 비유와 레바논 눈(雪)의 비유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유다의 변절을 강조한다. 그 동안 선지자는 여러 각도로 유다의 패역에 대해서 외쳤지만 유다 민족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계속하여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동족백성에게 실생활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토기장이 비유와 레바논 눈의 비유를 베풂으로써 그들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걸 실감나게 깨닫도록 영감적인 교훈을 던져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반응은 더욱 더 포악해질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선지자는 하나님께 공의의 심판을 호소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 심판호소 역시 선지자의 개인적 감정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대로 인도함을 받은 결과일 뿐이었다.


1. 토기장이의 비유와 하나님의 큰 권세 : 1~10


『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가라사대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서 내 말을 네게 들리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


하나님께서는 당신 뜻을 인간 세계에 드러내실 때 실물로 비유하며 가르치시는 경우가 많다. 우리로 하여금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깨달아 교훈받도록 하기 위함이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동떨어진 그 무엇이 아니다. 말씀이란 '생명'으로 인간의 생활과 역사(歷史)를 떠나서는 그 본질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은 영적 존재인 인간들이 몸담고 있는 실생활 속의 비유를 통해 당신의 뜻 드러내기를 즐기신다.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내재(內在)하시는 주님은 융통성 있는 교재(敎材)들로써 우리들을 깨우치시는데, 세상에 가득한 피조물은 모두 다 택민들을 교훈하기 위한 교보재 역할을 한다. 피조물을 통하여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자연계시'라 한다.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하신 것은 그저 이론으로 말씀하시는 것보다 그로 하여금 실제 견학(見學)하여 강한 인상과 교훈을 받아 여호와의 뜻을 대언케 하려는 데 목적을 두신 것이다.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보든지, 그것을 하나님의 교육재료로 여기며 자세히 견학할 줄 알아야 한다. "녹로"는 진흙으로 오지 그릇을 만들 때에 사용되는 도구(틀)이다.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하나님의 종은 하라면 해야 한다. 종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에만 하늘의 역사는 이루어진다.


예레미야 13:1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예레미야 19:1 "토기장이의 오지병을 사고..."

이사야 20:2 "이사야에게 일러 가라사대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예레미야 33:2~3 "일을 행하는 여호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가 가 보았더니 토기장이가 녹로를 돌리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발걸음을 옮기는 순종을 통해서만 교훈 얻을 장소에 도달할 수 있음을 배우게 된다. 요나는 주의 뜻에 불순종하여 '욥바'로 내려갔다가(요나 1:3) 물고기 뱃속에서 뜨거운 맛을 본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권세 앞에 굴복하여(요나 2장) 주님이 명하신 '니느웨 성'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주님의 뜻은 언제나 인간의 순종과 더불어 계시되는 법이다. 매맞고 코 꿰어 끌려와 일하는 것보다 능동적으로 괴롭고 힘든 일에 맞서 기쁘고 즐거운 태도로 순종한다면 순종자에게도 큰 축복이 임하는 법이요 하나님께도 영광이 돌려지는 법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한복음 15:14) 하셨고, 바울은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사도행전 26:19)라 말함으로써 순종하였다. 바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참된 종들은 언제나 하늘의 명령에 빨리 순종, 기쁘게 순종, 절대 순종하였던 것이다.


『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파상하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


"자기 의견에 선한 대로" 하나님의 창조 역사는 때를 따라 이루어지되 만대를 명정하신 대로 이루어진다(이사야 41:4).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그 피를 이어받아 태어나는 모든 혈통이 죄인으로 출생하게 되었지만(시편 51:5), 예수님 보혈의 피(새 언약)로써 타락한 인간의 영혼을 신창조해 주시므로 영혼구원은 기독교의 1차적 본질이 되었다(고린도후서 5:17, 4:16. 베드로전서 1:9,24). 그러나 자범죄를 덮이움 받고 영혼의 소성을 얻어도 육체가 썩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창세기 3:19)만은 아직도 모든 인류에게 역사하고 있다. 중생받은 자들에게도 말이다! 그러나 육적 사망도 범죄로 말미암아 온 것이 확실하므로 기독교 종말에는 원죄(=패역)까지 뿌리 뽑아 그 육체를 예수님과 같이 죽지 않는 몸으로 만들어주는 새 일의 역사가 있게 된다(이사야 42:9), 이 일(새 일)이 다 고해지고 그 말씀으로 척량을 받게 되면 척량받은 자의 육체가 신창조되어(이사야 43:1) "땅에서 구속받아 처음 익은 열매"인 144,000명이 나타나고(계시록 7:1~8) 이들이 철장권세로 역사하여 세계를 돌아 북진하면 능히 셀 수 없는 흰무리가 딸려 나와 촛대교회의 구원 역사가 마무리된다(계시록 7:9~13). 그 후 세계는 짐승 손에 붙여져 42달이 지나가며, 그 끝에 주님과 144,000명이 지상에 강림하여 아마겟돈 전쟁으로 666을 몰아내므로 이 땅의 악(惡)은 제해지고 선(善)만 남아 저주가 물러 간 새 하늘, 새 땅 천년왕국이 창조되는 것이다(계시록 11:15. 이사야 65:17~24. ※ 예언서에는 2가지의 '새 하늘 새 땅'이 있는데, 요한계시록 21장의 '새 하늘 새 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천년안식세계를 의미한다) . 144,000과 예비처 백성은 비록 몸의 형질과 영광은 다르더라도 영혼구원 위에 '몸의 변화', '몸의 구속'까지 이루어지므로 기독교 역사가 마무리된다는 것을 증명케 될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시대마다 종들을 통해 말씀을 기록케 하신 궁극적 목적은 사망과 저주가 사라진 <에덴동산의 회복>이다. 지금은 영혼의 안식을 위해 해산수고할 때가 아니라 이 "땅" 위에서 펼쳐질 지상안식의 성취를 위해 해산수고할 시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간에 이루어지는 협력의 역사(로마서 8:28)도 지상안식(천년왕국)을 목적으로 기도하는 이들에게 강력히 역사한다.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이다(에베소서 2:3). 3위 하나님의 완전한 구속 역사가 아니고서는 구원을 이룰 수가 없다(이사야 42:1~4 메시야 유월절 역사 / :5~8 성령의 오순절 역사 / :9~25 성부의 초막절 역사). 하나님은 길가의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무소불능하신 분이다(마 3:9). 이러한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인간이란 거리의 진흙과 같은 존재일 뿐이다(욥기 10:9, 33:6. 이사야 29:16, 45:9, 64:8. 로마서 9:21). 그러므로 진토(塵土)인 인간은 평안할 때에 교만치 말아야 하며, 환난이 오더라도 절망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하나님 손에 들려 있는 진흙인 줄을 깨닫고 절대적인 겸비와, 주님만 앙망하는 절개있는 신앙을 파수할 따름이다(이사야 40:31). 그것이 토기장이(하나님) 앞에서 취할 진흙(인간)의 마땅한 태도이다.


『 5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 것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


"토기장이""진흙"을 마음대로 주무를 주권(主權)을 가진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과 모든 국가들에 대해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일러주신다(아모스 5:4, 6~). 우리는 여기 토기장이의 일하는 모습에서 깨달을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종들에게 꿀 같은 교훈을 주어 먹게 하시며 창조목적(창세기 1:28)을 달성해 나가실 때 우리가 말없이 우리의 심신을 내어드려야 한다는 점이다. 피조물이 제 생각을 버리고 복종하는 것을 재료로 하여 조물주께서도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행사하시기 때문이다(이사야 43:13). 그분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어 놓으셨으며(마태복음 10:30), 국가의 흥망성쇠를 친히 주장하고 계시나(이사야 51:2) 성도의 순종과 복종이 밑거름 될 때에 즐겨 축복을 내리신다. 오병이어(五餠二魚) 없이도 먹고 남게 하실 수 있지만, 어린아이가 들고 나온 오병이어 위에 축복하시는 신이 하나님이시다. 이사야 40: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절대 주권자의 말씀이시다. 우리 종된 피조물은 이 분을 두려워해야 하며, 온유하게 순종해야 하며, 그분만 신뢰하는 겸손을 가져야 한다. 엄마 품에 매달린 갓난아기처럼 자신을 그분께 완전히 내어 맡겨야 한다. 여호와는 우리의 아버지라 하셨으며(이사야 64:8. 시편 68:5, 89:26), 주의 권세는 영원하다 하셨다(다니엘 4:34). 이러한 주(主)님께서 지금도 세상 만사와 모든 인간과, 이 글을 읽는 '나 자신'을 당신의 선하신 뜻대로 빚어가고 계신다. 아멘!


『 7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파하거나 멸하리라 한다고 하자 8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


백성이 회개할 때에만 소망이 있다는 것을 밝혀주신다. 유다 백성은 불원장래에 벌을 받으리라 선고(宣告) 받은 처지에 있지만, 그들이 회개만 하면 용서받을 소망도 있다고 하신다. "돌이키면"이란 말씀은 매우 중요하다. '진정한 회개'를 하라는 뜻인데, 단지 말뿐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 생활과 행동적 시정(是正)이 뒤따라오도록 돌이키라는 뜻이다. "나는 인간의 근본적인 돌이킴을 기뻐하는 신이라"는 의미에서 재앙 내릴 뜻이 작정돼 있더라도 얼마든지 "돌이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시며 백성에게 소망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은 진정으로 자기 죄를 깨닫고 마음을 찢어 통회하는 자에게는 들려도, 패역한 자들에게는 들릴 리 만무하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들을 교훈하실 때 거저가 아니라 "네가 악(惡)에서 돌이키려는 의지를 확정할 때 하나님인 나도 재앙 내릴 뜻을 거두겠다"고 말씀하신다. 신인(神人) 간의 관계가 계약적이고 상호교류적이고 대응적 관계임을 뜻하는 것이다. 인간 없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얼마든지 당신 홀로의 능력으로 새 시대를 창조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범죄한 인간의 기도를 받으시겠다 하신다. 능력은 홀로 갖고 계시나 그대로 이루어 달라고 청하는 성도의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에스겔 36:3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고로 기도란 망하게 된 인간이 전능자시요, 구원자이신 여호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요, 축복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된다.


『 9 내가 언제든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리라 한다고 하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惡)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케 하리라 한 선(善)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


주님께서 어떤 국가를 건설하기로 작정하셨을지라도 그들이 악(惡)을 행한다면 그 계획을 철회하겠다고 하신다. 이것을 볼 때 주님은 죄악과 타협하지 않는 신(神)이시다(시편 5:4). 악(惡)이란 "주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는 모든 것"이다(10절). 청종치 아니함이 멸망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사무엘상 15:22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거역하는 것은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악(惡)을 행하는 자는 '긍휼과 사랑의 약속'에서 철저히 제외된다(시편 125:5. 에스겔 18:24, 33:18).


2. 하나님의 권고와 백성의 강퍅 : 11~17


『 11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베풀어 너희를 치려 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 길과 행위를 선(善)하게 하라 하셨다 하라 』


하나님께서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늘 항상 동일하시다. 죄악 행하는 자를 벌한다는 것은 알파 때부터 내려오는 만고불변의 진리다. 그러나 오늘의 경고는 "너희가 죄악을 행치 않을 수 없는 것을 내가 아노니, 다만 회개하라!" 하시는 사랑 어린 경고인 것이다. 선을 행할 수 없는 우리에게 회개하라는 말씀보다 귀한 말씀이 또 있을까?(마태복음 4:17). 메시야 사명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첫 번째로 입술을 여실 때 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였다. 이미 망하기로 작정된 죄악을 쌓아놓은 인간이 회개하기를 거부(拒否)할 때에는 멸망밖에 준비된 것이 없다.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잠언 16:20)라 하였고,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언 28:13) 하셨다. 하나님은 죄인이 돌이켜 돌아올 때에 기뻐함으로 그 배역을 고쳐주시는 신이시다(예레미야 3:22, 7:3. 이사야 55:7).


『 12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된 말이라 우리는 우리의 도모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 』


유대인들은 "회개하라"는 사랑의 경고를 헛된 말씀으로 여겼다. 이와 같은 악질적인 죄는 21C 교회 내부에도 뿌리 박혀 있는 고질적 죄악이다. 회개하면 살려주기 위하여 선지자를 보내셨건만 선지자의 외침에 "이는 헛된 말이라"고 조소하는 패역한 백성들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구약의 패역을 살펴보고 오늘날의 패역을 깨달아 보자!


예레미야 2:25 "오직 너는 말하기를 아니라 이는 헛된 말이라 내가 이방신을 사랑하였은즉 그를 따라 가겠노라 하도다"

열왕기하 6:33 "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이사야 57:9~10 "네가 기름을 가지고 몰렉에게 나아가되... 또 사신을 원방에 보내고 음부까지 스스로 낮추었으며 네가 길이 멀어서 피곤할지라도 헛되다 아니함은 네 힘이 소성(蘇醒)되었으므로 쇠약하여 가지 아니함이니라"


이렇게 패역한 자들은 여호와를 기다리지 않고 우상 따르기에 힘을 내며 말하길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리라" 한다(12). 등을 하나님께로 향하고(예레미야 7:24~) , 주를 청종치 아니하며(예레미야 11:8~), 마음이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습이 고발되었다(예레미야 23:17~ ). 이 같은 반역죄를 범한 자들은 북방 칼에 죽는다(이사야 1:19~20). 오늘날도 저 북방에 무신론 핵강대국 공산당 세력이 등장해 있는 이유는 기독교 안에 존재하는 위와 같은 패역을 심판하기 위함이다. 만일 11절처럼 "돌이켜 선하게" 하지 아니하면 기독교는 3대 화가 지나갈 때 살 길이 없다. 기독교는 가장 살쪘을 때를 조심해야 한다(신명기 32:15. 호세아 13:6).


다음은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이다.


다음

조용기 목사 "성경과 불경 가르침은 하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말씀이나 ‘마음이 곧 부처(心是佛)’라는 말씀은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말입니다”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당회장인 조용기(趙鏞基·사진) 목사가 12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동 앰배서더호텔에서 열린 동국대 불교대학원 최고위과정에서 특강을 했다. 조 목사는 스님 불자 등 70여명의 청중 앞에서 50분간 강연했다. 개신교 보수교단의 핵심인물인 조 목사가 불교 관련 모임에서 강연한 것이 처음인 데다 강연내용도 파격적이어서 주목된다. 조 목사는 “동국대의 제의를 받고 무척 망설였으나 <종교간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승낙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선(禪)불교를 신봉해 장남인 자신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불교문화 속에 살았다고 털어놨다. “1953년 폐병을 앓아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우연히 누님 친구의 소개로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게 됐습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예수와 인연이 닿은 것이지요.”


그는 <불교가 한국의 장자 종교>로서 포용력을 갖고 타 종교를 대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했다. “저는 케이블 불교TV를 자주 봅니다. 기독교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 깨닫지 못하는 것을 불교 강의를 들으며 깨닫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특히 정병조 교수(동국대 윤리문화학과)의 강의는 쉽고 재미있어 빼놓지 않고 봅니다.”


내년에 정년(70세)을 맞는 조 목사는 은퇴 후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밖으로는 해외선교에 주력하고 안으로는 <종교간 대화>를 통해 상호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2004.5.12 >



신명기 32:15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호세아 13:6 "저희가 먹이운 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



이것이 교계적으로 파장을 일으키자 조 목사는 주일 설교에서 나름대로의 해명을 하였으며, K.N.C.C. 대변지인 국민일보에는 다음과 같이 기사가 실렸다.


“구원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존재”…불교대학원 강의 조용기목사<2004.05.16>


16일 주일예배 설교에 앞서 "불교경영자 최고위과정에서의 특강 발언 중 사실과 다르게 알려진 부분이 있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이 있음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는 최근 동국대 불교대학원 불교경영자 최고위과정 초청 특강내용과 관련,강연내용 중 일부가 사실과 다르게 보도됐다면서 16일 주일예배 설교에 앞서 진실을 밝혔다.


조 목사는 “내가 마치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식으로 언론에 비쳐졌는데, 결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며, 그들 앞에서 예수께 기도해 마음의 평안과 병고침받은 것을 전했다”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을 뿐이며,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곳에 갔다”고 밝혔다. 조 목사는 또 “처음에 참석을 상당히 주저하면서 기도하다가 ‘무엇을 주저하느냐. 그곳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라’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결정을 내렸다”며 “불교의 가장 중심부에 가서 그들에게 예수께 기도해 마음의 평안과 병고침받은 내용을 들려준 후,예수 안에서만 소망이 있고 소망을 얻으면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살게돼 축복을 받게 된다고 증거했다”고 설명했다.


조 목사는 “사람의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고 하는 불교와, 천국이 우리 마음속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믿는 기독교가 모두 마음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유사점이 있다고 말했다”며 “그런데 그것을 마치 불교도 구원이 있다고 말한 것처럼 보도됨으로써 진실이 잘못 전달됐다”고 말했다. 조 목사는 전 교인을 향해 거듭 “구원은 죽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 이외는 천하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진 적이 없다”고 강조했고, 교인들은 ‘아멘’으로 화답하며 조 목사에게 신뢰의 박수를 보냈다.


한편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부목사는 “비유를 통해 불교와 기독교의 유사점을 설명한 것은 ‘구원의 도’가 아니라 ‘형식적 유사성’에 관한 것이었다”면서 “이를 두고 ‘종교다원주의’ 등의 극단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강연의 원뜻을 바로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고 강조했다.


유영대기자 ydyoo@kmib.co.kr



우리는 조용기 목사의 강연내용을 접했을 때, 이것이 꿈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기사가 교계적인 물의를 일으킨 후 조 목사는 설교를 통해(사도행전 4:12) 오해에 대한 해명을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조 목사와 함께 초대받은 김수환 추기경과 강원룡 목사는 사도행전 4:12절을 인정하지 않는 가증한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봉에 선 자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편 1:1~2). 조 목사는 이 말씀 앞에 두려워 떨어야 한다. 또한 발람의 교훈을 추억해야 할 것이다(계시록 2:14. 민수기 22~24, 31:8). 귀신의 소굴 불교계, 그것도 불교경영자 최고위과정에서 왜 김수환 추기경, 강원룡 목사와 더불어 조용기 목사 자신을 초대하였는가를 잊지 말아야 한다. 75만 성도의 대표인 조 목사는 자신이 귀신의 초대에 휘말린 것인지, 진정 복음 전파를 위하여 바울과 같은 정신(고린도전서 9:19~23)으로 그 자리에 간 것인지를 분별하고 후자가 아니었다면 회개해야 한다. 귀신의 초대에 응하는 것자체가 발람의 길인 것을 왜 모르는가?


조 목사는 설교를 통해 즉시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해명함으로써 이 문제를 가라앉혔지만, 문제는 K.N.C.C.의 여러 교단들과 천주교는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독선과 배타성을 버리고 타 종교와 대화하며 화해와 협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에큐메니칼적인 입장에 서 있기 때문이다. 국민일보는 K.N.C.C.의 대변지이고, K.N.C.C.는 무신론 공산당이 장악한 W.C.C.의 산하단체임을 볼 때, 이번 동국대 강연 관련 발언은 어물쩍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종교간 대화를 통해 상호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고 한 조용기 목사의 발언은 K.N.C.C.의 정신과 일맥상통하며, 이는 W.C.C.가 수십년간 주장해 온 바이다. 조 목사 자신은 해명을 통해서 책임을 회피하였다 하여도 자신이 몸담은 K.N.C.C.와 천주교의 행보는 조 목사의 해명과 정 반대의 입장일 것인데, 조 목사는 과연 가증한 K.N.C.C.를 탈퇴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 묻고 싶은 바이다.


『 13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누가 이러한 일을 들었는가 열방 중에 물어보라 처녀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하였도다 』


주께서는 자기 백성의 범죄를 가리켜 너무 이상하다고 하신다. 이스라엘은 열방 중에 어느 나라도 받지 못한 은혜와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버렸다. 첫 아담이 저지른 것과 똑같은 죄악이다. "처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적 신부로 정(定)해진 바, 정결함을 간직해야 할 '영적 처녀'이다. 이토록 귀한 선택과 사랑을 받은 처지에서 늘 항상 감사로 할렐루야를 돌리지는 못하고 도리어 택함받은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은 너무나도 모순되며 가증스럽다. 고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괴악(怪惡)한 행태를 지적하시기 위해 자연계(自然界)의 사리(事理)를 들어 꾸짖으신다. 종 예레미야가 기록한 이 자연계시는 일곱 나팔이 이루어지는 기독교 종말의 성도들에게 다시 예언될 교훈이다(계시록 10:7,11).


『 14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반석을 떠나겠으며 원방에서 흘러 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


"레바논의 눈이 들의 반석을 떠나지 않는다" 함은 늘 항상 변함없이 레바논산 꼭대기를 뒤덮고 있는 흰 눈의 모습을 말함이다. "들의 반석"이란 말은 레바논산의 별명(別名)이다. 이렇게 레바논산의 눈은 사시절(四時節) 그 자리를 뜨지 않으나, 이스라엘 민족은 너무도 쉽사리 하나님 앞을 떠나 우상과 이방 강대국가에게로 붙어버린다(에스겔 17:12~16). 소위 선민(選民)이라 불리우는 백성이 자연만도 못하게 변질된 것은 뼛골 속에 박혀 있는 원죄 악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6,000년 묵은 이 악질적인 패역(구약선민과 오늘날 기독교는 거울과 실물 관계)을 새 일 교훈으로 고쳐서 그 근본을 개조시켜 놓겠다고 약속하셨다(이사야 19:19~22, 42:9~, 43:1~3, 57:18. 예레미야 31:21~22. 호세아 14:3~4).


이 일은 계시록 10:7~11, 11:1~12절 말씀과 같이 1,260일(전 3년 반)간 다시 예언하고 증거마친 자들(144,000)이 3일반 죽었다가 생기를 받고 공중으로 들림받을 때 비로소 성취되는데, 이들이 곧 6,000년 만에 원죄의 패역까지 제함받는 최초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바울, 베드로와는 분명 다른 계통의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하였지만(로마서 8:23), 몸의 구속을 보지 못하고 흙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사도요한은 144,000 명에 대하여 묵시받아 분명하게 기록하기를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라 표현하였다. 자신도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요, 같은 사도 계통인 베드로, 바울도 거듭난 자들임을 너무도 잘 아는 요한이 어찌하여 그 노년에 "사람 가운데서 구속 받아 처음 익은 열매"가 훗날 등장하리라는 계시를 받았겠는가? 이는 이 예언의 주인공들은 분명 사도단체인 그들과는 다른 형질을 가진 자들이요, 영혼의 구원 위에 그 육체까지 구속 받은 자들이라는 걸 암시해주는 대목이다(계시록 14:1~5).


기독교 오메가의 역사에서 <육체구원>을 빼놓으면 할 말이 없다. 그러한데도 육체구원만 말하면 자칭 장자총회라 이름하는 교단에서는 '이단'이라고 정죄하기에 바쁘다. 진짜 이단은 육체구원이 이루어질 때 그것을 반대하다가 환난에서 육체를 심판당하는 세력일 것이다. 이미 육체구원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 단체는 이단이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몸의 구속' 곧 3대화로부터의 육체보호, 몸의 개조를 144,000명의 역사와 승천, 예비처에서의 흰 무리 보호 등의 성경적 증거로 외치는 자들은 진리의 종들이지 이단이 아니다. 이 역사는 영혼과는 별개의 '육체'와 관련된 사건들이다. 기록된 축복을 놓치지 말자 하는 것은 이단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태복음 24: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예수님께서 땅에 계실 때 친히 '육체구원'을 강조하신만큼, 이러한 일이 성취될 때를 사는 우리는 '영혼구원' 위에 '육체구원'이 있다는 것을 부지런히, 그리고 담대히 전해야 한다.


『 15 대저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이러한 것들은 그들로 그 길 곧 그 옛 길에서 넘어지게 하며 곁길 곧 닦지 아니한 길로 행케 하여 』


"그 옛 길"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바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지돼 온 참된 신앙정로를 가리킨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모세의 율법과 시편과 선지서에 기록된 진리를 버리고 "곁길" 곧, 우상숭배의 도(道)를 따라갔다. 우상의 길은 "닦지 아니한 길" 같아서 사람을 허무한 데로 인도할 뿐이다. 사람이 '닦지 아니한 길' 곧 '우상의 길'을 걷는 것은 탐심 때문인데(골로세서 3:5), 인간의 맘 속에 주님을 경외함이 없을 때에 이 길을 가게 된다(예레미야 2:19). 시편 91:14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인정할 때 주님은 우리를 곁길로 빠지지 않게 보호해 주신다. '우상의 길'로 가는 것은 자기 길을 굽게 함이요(예레미야 3:21), 거짓된 것을 신뢰함이다(예레미야 13:25). 예레미야 14:10절에서는 이 길을 "어그러진 길"이라고 표현하셨다. 우상은 망령되이 만든 것이므로(예레미야 10:15, 16:19) 부어 만든 우상을 일컬어 '바람'이라 하셨다(이사야 41:29. 호세아 4:17~19, 12:1). 하나님은 주(主)를 버리고 우상을 섬긴 시일대로 벌을 내리겠다 하셨다(호세아 2:13).


백성이 멸망의 이 길을 가게 되는 또 다른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거짓 지도자'이다. 탐심을 쳐서 예언해 주어도 부족할 판에, 백성을 율법의 정도(正道)로 인도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의 다닐 길을 훼파하며 미혹케 함으로서 멸망당하게 하는 자들이 바로 거짓 선지자와 지도자들이다(이사야 3:12). 이사야 9:16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 오늘날 K.N.C.C.나 천주교의 머리된 목사들의 입에서 나오는 에큐메니칼적인 설교는 이방종교인들에게는 환영 받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 설교는 분별력 없는 양 떼들을 사망으로 떨어뜨리는 쑥물인 것이다. 말라기 2:8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만일 오늘날의 기독교가 이 다시 예언하는 말씀을 듣고도 회개치 않는다면 심판하러 내려오는 원수의 칼 앞에 쓰러지게 될 것이다.


『 16 그들의 땅으로 놀랍고 영영한 치소가 되게 하리니 그리로 지나는 자마다 놀라서 그 머리를 흔들리라 17 내가 그들을 그 원수 앞에서 흩기를 동풍으로 함같이 할 것이며 그들의 재난의 날에는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


본 구절은 선민이 범한 죄의 결과(16절)로 받을 벌에 대한 예언이다.


"그들의 땅으로 놀랍고 영영한 치소가 되게 하리라"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다운 땅인데도 불구하고(민수기 13:27), 이 땅이 놀랄 만큼 황폐하여 행인들의 "치소거리"가 되는 것은 그 땅에 거주하던 선민들의 죄값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좋던 땅이 그렇게 비참하게 된 것을 그밖의 어떤 원인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원수 앞에서 흩으리라"고 하셨는데 이는 바벨론이 유다를 침략케 하심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새 언약이 성취되므로 펼쳐진 은혜시대에 예수님의 '피로 사신 교회'는 자범죄를 사함 받고 성령의 은사 곧 단비를 받아 (영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말을 맞이하여 예언의 법을 범하니 바벨론 통치와 같은 후 3년 반에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그 땅을 주실 때에도 인간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기적, 곧 하나님의 간섭으로 된 것이었고, 그들이 범죄하여 그 땅을 도로 빼앗기는 것도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으로 되는 것이다. 주시는 이도, 빼앗는 이도, 행하시는 이도 살아 계신 하나님뿐이시다(욥기 1:21).


사무엘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예루살렘이 망하는 모습을 말씀하실 때


무더기가 되고(예레미야 9:11)

지나가는 자마다 모욕하며(예레미야 19:8)

놀램과 치소가 되고(예레미야 25:9)

원수 앞에서 흩어질 것이라 말씀하셨다(예레미야 13:24. 신명기 28:25, 64~).


"내가 그들에게 등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지 아니하리라" 돌이키는 기간을 주어도 돌아오지 않던 백성들을 '재난의 날'에 결코 돕지 않겠다는 말씀이시다(17절). 그 이유는 ① 백성이 등을 하나님께로 향하고(예레미야 2:27), ② 교훈을 하여도 듣지 않았기 때문이다(예레미야 32:33). 그러므로 하나님 역시 전쟁의 환난이 올 때 백성이 아무리 부르짖어도 외면(外面)하시겠다는 선포이다. 백성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 청종하기를 거부하였으나 주님은 길이 참으사 용서하시며 돌아오기를 고대하셨어도, 백성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조롱뿐이었다. 그래도 하나님은 긍휼로 대하사 또 한 번 살려주시기 위해 종을 통해 마지막 경고를 하신 것이나, 그 최종적인 경고의 말씀조차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백성을 버리겠다고 선포하신 것이다.


구약 종말의 이 원리는 인간 종말인 지금도 동일하다. 현재의 피로 사신 교회들이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 곧 "다시 예언하라"(계시록 10:7~11)는 말씀을 들은 체 만 체하며 등지게 될 때, 필경 예수님께서도 그들을 등지시리라는 것이 오늘의 말씀이 교훈하는 바다. 예레미야와 같은 종말의 선지 144,000명의 슬픈 경고를 무시하는 교회는 3대 화가 올 때에 아무리 부르짖어도 예수님께 버림을 받고야 말 것이다.


스가랴 7:11 "청종하기를 싫어하며 등으로 향하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12 그 마음을 금강석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신(神)으로 이전 선지자를 빙자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노(怒)가 나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나왔도다 13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었노라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은즉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고 14 회리바람으로 그들을 그 알지 못하던 모든 열국에 헤치리라 한 후로 이 땅이 황무하여 왕래하는 사람이 없었나니 이는 그들이 아름다운 땅으로 황무하게 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다음 구절들도 참조해 보시라 ☞ 역대하 12:5. 레위기 26:23~24. 말라기 2:9. 이사야 65:12, 66:3~4. 예레미야 11:10~12, 25:4~9, 44:4~6. 에스겔 8:16~18).


3. 모살자(謀殺者)를 위한 선지자의 기도 : 18~23


『 18 그들이 말하기를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제사장에게서 율법이, 지혜로운 자에게서 모략이, 선지자에게서 말씀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오라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그의 아무 말에도 주의치 말자 하나이다 』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할 뿐 아니라 선지자의 예언 활동을 저지(沮止)시키려고 대중까지 충동질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운동은 오늘날에도 벌어질 것이다.


① 하나님보다 인간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들이 서로 "오라"고 한 것은 타락한 인간들의 힘을 모아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사단의 궤휼인 인본주의요, 협상주의이다.


② 제도적(制度的) 종교장치 속에서 부패한 "제사장과 소위 지혜자들과 거짓 선지자"의 말을 빌어서, 참 선지자인 예레미야의 예언 운동을 제지하고자 하는 것이다(예레미야 28장). 시대마다 선민이 타락할 때는 하나님의 참된 종을 부패한 기성 교권(敎權)의 지도자들이 가로막았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기성 지도자층(旣成 指導者層)은 무조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어떤 때에는 그들이 거짓 스승의 운동을 막아주는 일도 있었고, 참 종들을 위기에서 살려준 적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혀로 그를 치고" 외식자들은 신앙과 의리로 형통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간사한 말로서 의인을 훼방하여 이기고자 한다(시편 12:4). 심판기에는 참 선지자가 많은 박해를 당하는데, 원인은 악마의 득세이다. 악의 종들은 먼저 악의 도모를 이루기 위한 거짓단체를 만들고(예레미야 11:19. 시편 21:11. 이사야 32:7) 그 단체의 힘을 입어 악한 꾀를 도모한다(시편 1: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특자의 계교를 패하게 하시므로(욥기 5:13) 최종적인 승리가 참 종들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는 언제나 참 선지자를 죽이려 하며(예레미야 26:11), 그 혀로 심한 악을 꾀한다(시편 52:2. 스가랴 14:12).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 있음을 깨닫고 주님 주신 혀를 생명의 길에만 사용하자(잠언 18:21. 이사야 11:3~5. 계시록 11:5~6).


『 19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로 더불어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보옵소서 20 어찌 악으로 선을 갚으리이까마는 그들이 나의 생명을 해하려고 구덩이를 팠나이다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려 하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선한 말씀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


지금부터는 대적들을 처벌해 주시기를 청하는 예레미야의 기도이다. 이것은 기도인 동시에 예언이다. 선지자의 기도 중에는 하나님의 뜻 아닌 것이 끼어 있는 법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만대를 정하셨다(이사야 41:4).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들을 처벌하시겠다고 하신 것은 알파 때부터 이미 있어 온 예언이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그러나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벌하시려는 분노를 돌이켜 주실 것을 기도한 바가 있었다(20절 하반).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대적들(유대인들)이 끝까지 회개치 않고 도리어 "악으로 선을 갚고자 하여" 그를 모해(謀害)할 운동을 전개함에 따라(18절), 예레미야는 이제 하나님이 선포하신 그 본래의 예고(豫告)대로 그들을 벌하여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선지자의 기도를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 예언할 수 있다. 하나님은 늘 참 선지자를 돌아보신다.


의인을 시험하사 폐부를 살펴 보신다 하셨고(예레미야 20:12)

주께서 탄식을 들으신다 하셨으며(시편 55:16~17)

생명을 보존해 주시겠다 하셨다(시편 64:1).


예레미야와 더불어 다투는 이 백성은 악으로 선을 갚는 백성들이다(시편 35:12, 38:20. 잠언 17:13. 요한복음 15:25). 백성들은 이토록 반역하였지만, 예레미야는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하였다(예레미야 7:16, 14:9. 시편 106:23. 에스겔 22:30~31).


『 21 그러하온즉 그들의 자녀를 기근에 내어주시며 그들을 칼의 세력에 붙이시며 그들의 아내들은 자녀를 잃고 과부가 되며 그 장정은 사망을 당하며 그 청년은 전장에서 칼을 맞게 하시며 22 주께서 군대로 졸지에 그들에게 임하게 하사 그들의 집에서 부르짖음이 들리게 하옵소서 이는 그들이 나를 취하려고 구덩이를 팠고 내 발을 빠치려고 올무를 베풀었음이니이다 』


어느 시대에나 참 선지자를 대적함은 곧 하나님을 대적함이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언자(代言者)로서 만전(萬全)을 기(期)하는 사역을 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적인 사감(私感)을 발하여 원수를 맺는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선지자는 대적들의 구원을 위하여까지 기도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예레미야를 대적했으니, 그것은 악으로 선을 갚는 행동이었다. 그들의 행위를 볼 때,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된 자들로서 죄악이 노골화(露骨化)된 자들이다(이사야 3:8~9). 이런 때 참 선지가 할 수 있는 기도는 본래 작정하셨던 바대로 "저희를 벌하시옵소서" 하는 기도밖에 없다. 이 기도대로 하나님은 움직이셨고 이 재앙 곧 "기근""전장"으로 인하여 그들의 자녀들은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이다(예레미야 39:1~). 이것은 참으로 비참한 형벌이다. 그들이 이러한 형벌을 받게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분신인 선지자를 죽이려 한 죄악 때문이다. 어느 시대이건 선지자를 대적한 죄는 결코 면죄받을 수가 없는 법이다(계시록 11:5). 하나님은 당신의 원수된 자들의 가정은 반드시 멸망시키겠다고 말씀하셨다(예레미야 11:23. 계시록 2:20~23. 말라기 4:1).


『 23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죽이려 하는 계략을 주께서 다 아시오니 그 악을 사하지 마시며 그 죄를 주의 목전에서 도말치 마시고 그들로 주의 앞에 넘어지게 하시되 주의 노하시는 때에 이같이 그들에게 행하옵소서 』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종인 자신을 죽이려 하는 유다 민족을 공도(公道)로써 징책해 주실 것을 간구하고 있다. 예레미야 입으로 이러한 기도를 시키신 것은 돌이키면 살겠지만 회개치 않고 끝까지 대적할 때는 그 악을 사할 수 없는 결론으로 가게 됨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다(느헤미야 4:5. 시편 35:4, 59:5). 언제나 불택자들에게는 예언의 말씀(선지서)이 걸림돌이 되었으니, 오늘날도 그러할 것이다. 예수님 초림 시 불택자들에게는 '새 언약'이 심한 걸림돌이 되었었다. 바울과 베드로가 예언서를 짝 맞추어 '십자가의 도(道)'를 아무리 잘 전해도 불택된 자들은 도리어 사도들을 못박거나 목베어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 시에도 불택자들에게는 '새 일의 교훈'(사도들이 증거하고 남은 모든 예언)이 심한 걸림돌이 되니 이 도(道) 전하는 자들을 죽이기에 이를 것이다. 가증한 것들의 어미인 음녀의 손에 피가 묻은 것(계시록 17:6)은 거짓된 교권이 총동원되어 짐승의 힘을 빌어 참 종들(144,000)의 피를 흘릴 것을 예언한 것이다.


본 제단에는 수 많은 전화가 걸려 온다. 감사와 격려의 전화, 상담 및 문의전화, 훼방과 저주의 전화 등이다. 그 중 훼방하는 이들이 말하는 주된 내용인즉 "구약은 지나간 역사인데, 왜 구약 예언서를 이 시대에 들먹이냐"는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용감한 발언을 할 수 있는 것은 마태복음 11:13절을 크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1: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율법과 선지서는 요한까지이니 이 시대에 율법과 선지서를 들먹이는 것은 100% 이단이라는 것이다. 크게 오해한 데서 비롯된 잘못된 결론이다. 마태복음 11:13절의 참뜻은 짝이 되는 다음 말씀을 통해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누가복음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요한을 마지막으로 율법과 선지자의 시대가 마무리되고, 예수님의 때로부터는 이전 선지자들이 고한 모든 예언이 성취되는 시대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고로 "율법과 시편과 선지서의 글"은 요한 때에 끝났으니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는 글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 초림 때부터 예수님 재림 때까지 쉬지 않고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성도의 나라' 곧 아름다운 '천년왕국'이 이루어지기까지 율법과 시편과 예언서의 말씀은 계시록과 더불어 쉴 새 없이 이루어진다.


같은 성경 말씀을 놓고도 누구는 오해하여 소경이 됨을 볼 때 두려움을 느끼며, 누구는 참 뜻을 깨달아 주의 사업에 매진하게 됨을 볼 때 감사함을 느끼게 된다. 오직 택자만이 삼위 일체의 하나님이 주시는 큰 긍휼을 받아서 영, 육 간에 완전한 구원을 얻게 되고, 또한 큰 환난에서 가족까지 구원을 얻어 세세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은 지극히 성경적이다. 성경에 기록된 축복을 차지할 자는 기록된 모든 예언이 주 재림의 날까지 쉬지 않고 이루어진다는 것을 굳게 믿는 자들일 것이다. 아멘!


예레미야 23:20 "나 여호와의 노는 내 마음의 뜻하는 바를 행하여 이루기까지는 쉬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말일에 그것을 완전히 깨달으리라" (예레미야 30:24).


다니엘 10:14 "이제 내가 말일에 네 백성의 당할 일을 네게 깨닫게 하러 왔노라 대저 이 이상은 오래 후의 일이니라"


미가서 4:1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갈 것이라" (이사야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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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제목 : 〈북방환난과 새 시대 회복〉

예언연대 : B.C. 628년∼588년경


성경 : 예레미야 17장

제목 : 유일로 신뢰할 하나님


1. 범죄의 결과로 국외에 이송 : 1~4


『 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


죄를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하라는 것은 유다의 죄가 간과할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죄임을 의미한다. 지울 수 없으니 심판을 돌이킬 수 없다. 이렇게 심판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죄가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기 때문인데, 이는...


마음속 양심이 그들의 죄를 항상 지적하고 있음과,

그들이 예배 드리는 제단 뿔도 그들을 정죄하며 심판하고 있음을 뜻한다. 본래 "제단 뿔"은 죄인의 속죄를 위한 것이지만(출애굽기 27:2~, 29:12, 30:1~3, 10) 그것이 사람을 정죄하고 또 심판하게 되기까지 한 것은 그들이 끝내 회개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사야 30:8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영히 있게 하라 9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모든 선지자가 공통적으로 '인간의 패역'에 대해 기록한 것은, 종말의 교회도 이와 같은 죄악으로 망하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살 길은 이사야와 예레미야서 및 모든 선지자들의 말씀을 꿀같이 먹어 '패역'을 고침받는 길 뿐이다(이사야 57:17~18. 예레미야 3:22. 호세아 14:4. 스가랴 3:9).


『 2 그들의 자녀가 높은 메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 』


조상들의 아세라 우상 숭배 전통은 자손들에게까지 미쳤는데(사사기 3:7. 시편 78:58. 이사야 1:29), 이렇게 어른들의 우상숭배 죄는 자신은 물론이려니와 그 자녀들과 가정을 몰살시키는 죄악이 된다. 이 시대에도 종말의 우상숭배가 횡행할 것인데, 곧 이세벨(음녀)을 용납하는 '협상죄'가 기독교계에 관영케 될 것이다. 이러한 교회와 성도들의 가정은 단체적인 멸망을 받게 된다(계 2:20~23). 합법적인 솔로몬 성전이 있었음에도, 우상이 있는 '골짜기'와 '산'으로 기어들어가 망한 것! 이것이 바로 '패역'이다. 종말에도 예언서를 햇빛같이 밝히는 '해를 입은 한 여자', '애굽 땅 중앙제단', 재림 주님이 '영광으로 충만케 할 제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대 교권 속에서 안주하는 무리들은 자신들이 알지도 못했고 원치도 않았던 '후 3년 반'의 세계로 들어가 전멸하게 된다는 교훈이다.


『 3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지경의 죄로 인하여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4 내가 네게 준 네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또 내가 너로 너의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대적을 섬기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내 노로 맹렬케 하여 영영히 타는 불을 일으켰음이니라 』


죄로 인하여 시온산이 북방 바벨론 세력에게 멸망당할 것을 진술하고 있다. "들에 있는 나의 산"이란 시온산성인 다윗성 곧 '예루살렘'을 뜻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부르시는 호칭이다(사무엘하 5:4~10. 역대하 3:1~17).


백성들이 하나님 대신 그들의 재산과 보물과 산당들을 소중히 여겼으므로 하나님은 그것들을 모두 적군에게 노략 당하게 하신다(예레미야 15:13. 열왕기하 24:13. 이사야 39:6. 예레미야 39:1~10).


또한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의 땅 가나안(기업)을 우상들로 가득차게 하여 더럽혔으므로 주께서도 더 이상 그들로 그 땅에서 거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공의와 질투의 신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도 없이 자신의 탐욕을 좇아 하나님의 가장 미워하시는 우상을 섬겨 하나님의 노를 일으킨 만큼, 이제 하나님도 그들이 원치 않는 북방 원수의 압제 하에 그들을 던져 넣어 "잘 한 번 섬겨 보라" 하신다(예레미야 5:29, 7:20, 12:12, 16:13, 25:9, 27:12. 레위기 26:30. 에스겔 6:3. 신명기 4:27, 28:48, 이사야 5:25 참조).


예레미야 13:21 "너의 친구 삼았던 자를 그가 네 위에 수령으로 세우실 때에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너의 고통에 잡힘이 구로하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 기독교는 지금 누가 신랑이며 누가 사기꾼인지를 분간치 못하고 든든해 보이면 아무나 신랑 삼고, 믿을 만해 보인다고 아무나 친구를 삼는 행위를 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심히 망령된 행위로 본다.


2. 인간의 무위(無爲)와 인심의 사곡(邪曲) : 5~10


『 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


"혈육"이란 말은 영(靈)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이사야 31:3) 인간은 다 헛되며 결국 없어지고 말 존재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전도서 1:2, 12:13~14. 이사야 66:15~17). "권력을 삼는다" 함은 강한 인간의 세력에 기대어 보려는 모든 행위로서 한 마디로 '협상죄'이다. 마땅히 하나님만 믿어야 할 유다 나라가 이방 강대국가를 의지하였던 것이다(에스겔 17:7~10). 구약 교회와 같이 오늘날의 교회도 세속주의와 인본주의로 기울어져만 가고 있다. 하나님만 의지해야 할 예수의 피로 산 교회(사도행전 20:28)가 하나님이 없다 하는 초강대국 북방 공산주의 사상에서 나오는 거짓선지자의 미혹(쑥물)에 크게 속아 형성된 것이 오늘날의 W.C.C.(세계교회협의회)라고 하는 단체이다. 계시록 17:1~16 짐승과 음녀가 심판 받는 원인이 무엇인가? 짐승은 신랑 예수를 대적했기 때문이고, 음녀는 그러한 짐승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북방 짐승 정권을 따라가는 기독교(여자)는 현재 자신이 음녀의 노선을 걷는 줄을 꿈에도 모르고 있다.

☞ 새일성가 18장 4절


『 6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


"사막의 떨기나무"는 열매가 없다. 사람에게 유익이 없는 나무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생도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즉 ①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므로 소망이 없고, ②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므로 쓸쓸하여 위로와 기쁨이 없게 된다(시편 39:5~7, 1:4, 92:7. 예레미야 48:6).


『 7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


시편 1:1~3절과 같은 내용이다.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 역설체(力說體)로서 하나님을 믿되 참으로 의뢰하는 믿음을 요구하시는 말씀이다(시편 2:12, 시편 34:8). 오늘날의 교인 중에서도 구약 때와 같은 모습이 많이 발견된다. 예수님을 의지한다고는 하지만 참되이 의지하지 않는 자가 많다. 참되이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욕심과 관련하여 열심을 내는 신앙을 배격하고도 기쁨이 있어야 한다. 내 통장이 넉넉해야 입가에 웃음이 돌며, 자녀가 좋은 대학에 합격할 때라야 비로소 이웃집에 '간증한답시고' 가슴 펴고 건너가 떵떵거릴 수 있는 정도라면, 감사예배를 드려도 가증한 것이요, 예수님의 권위를 세상 복락과 바꿔치기 한 도적의 신앙을 가진 자가 될 것이다.


어떤 목사님은 아예 이렇게 설교한다. <예수 믿고도 부자가 못되고, 예수 믿고도 병을 못 고치는 것은 뭔가 잘못 믿어 그렇소>.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설교이다. 매년 12월이 되면 나타나는 재미 있는 현상도 있다. 아주 당당하게 <수험생을 위한 특별기도회>라는 현수막을 내걸며, 수많은 학부형들은 그 현수막 밑으로 몰려든다. 여느 달과는 달리 12월에는 성령의 역사가 강한 것일까? 어느 때보다 뜨겁고, 어느 때보다 많은 헌금이 올라오지만 주님이 원하신 바는 아닐 것이다. 주님의 원하시는 바는 이러하다. 하박국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이것이 진정한 의뢰이다(다니엘 3: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본받자). 이러한 자에게는 생수 같은 성령의 역사가 끊기지 않게 된다.


『 8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


① 참 교인이라 함은 물가 근처에 뿌리내린 나무가 계절변화와 관계없이 착실히 수분을 공급받는 것처럼, 때를 따라 내리는 하나님의 말씀양식을 성실히 받아 먹는 자이다.

② 그래야만이 지속적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 시편 1: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마태복음 3:8. 요한복음 15:5. 갈라디아서 5:22. 에베소서 5:9 참조).


『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 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


"심히 부패한 것"이란 치료될 수 없는 상태까지 썩었다는 뜻이다. 사람은 자기의 마음의 거짓됨을 알지 못하므로 언제나 스스로 속게 된다(예레미야 16:12, 11:20, 20:12. 창세기 8:21. 시편 51:5, 139:2). 인간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바로 판단하시니 우리 각자는 '내 생각'을 버리고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만 신뢰해야 한다(예레미야 17:5~11. 이사야 40:31~ ). 인간들이 자기의 판단을 믿고 행하는 일은 모두가 실패로 돌아간다. 비유하자면, 자고새가 낳지 않은 알, 나와 상관없는 알을 품음과 같다.


3. 불의의 축재(蓄財)와 선지자의 고백 : 11~18


『 11 불의로 치부하는 자는 자고새가 낳지 아니한 알을 품음 같아서 그 중년에 그것이 떠나겠고 필경은 어리석은 자가 되리라 』


이 예언은 여호야김 왕이 그의 중년 곧 왕위에 오른 지 11년째에 성취되었다(BC 598). 그는 어리석은 왕이었고 그의 동생 시드기야는 더욱 어리석은 왕으로서 이 사람도 왕된 지 11년 만에 포로가 되어 잡혀갔다(B.C.587). 예레미야 39장을 보니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의 자식들을 칼로 도륙했고, 그것을 목도하게 한 뒤에는 눈알을 뽑았고, 그의 왕국과 성전을 다 소멸시키고 백성도 포로로 잡아갔다.

"불의로 치부하는 것"은 ① 도적질이다(말 3:8). ② 부정직한 사업이다(잠언 21:6). ③ 송사를 공정케 아니함이다(예레미야 5:28, 22:13. 잠언 1:19. 디모데전서 6:9). "자고새"는 불의한 재물을 모으는 자가 필경 그 재물을 다 빼앗기고 말 것을 비유하고자 기록됐다(잠언 10:2, 13:11, 20:21, 28:22).


『 12 영화로우신 보좌여 원시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13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 』


여호와를 잘못 섬기는 자를 이 땅에서 완전히 제하여 버리실 것을 말씀하셨다(시편 37:9, 22, 34).


『 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


예레미야의 기도 대목이다.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예레미야는 우상을 배격했으며 하나님만을 찬송하였다.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오직 여호와만이 구원자이시며 치료자이심을 고백하고 있다(출애굽기 15:26. 이사야 19:22, 57:18. 예레미야 3:22, 33:6. 호세아 14:4. 말라기 4:2). "나를 구원하소서" 참 구원자는 여호와이심을 믿으니 대적의 손에 둘린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을 지켜 달라는 기도이다(예레미야 31:15~22, 5:20. 시편 60:5. 이사야 57:18,).


『 15 그들이 내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뇨 이제 임하게 할지어다 하나이다 』


"여호와의 말씀이 어디 있느뇨" 선지자를 향한 백성의 조롱이다(예레미야 20:7). 이러한 말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하는 악독한 자들 곧 뱀의 후손들이 늘상 지껄이는 말이다(이사야 5:19. 에스겔 12:22). ☞ 참조 (시편 42:3,10, 79:10.  요한복음 8:19. 베드로후서 3:4). 그러나 하나님은 조롱하는 자는 망하게 하시고, 조롱받는 자의 손을 높이 들어주신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대언함으로 뱀의 후손들에게 조롱을 받고 있는가?


미가서 7:8~10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 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목도하리로다" (이사야 51:1~3. 시편 51:5~18. 스가랴 3:1~8절도 참조하시오).


『 16 나는 목자의 직분에서 물러가지 아니하고 주를 좇았사오며 재앙의 날도 내가 원치 아니하였음을 주께서 아시는 바라 내 입술에서 나온 것이 주의 목전에 있나이다 』


예레미야가 선지자가 된 것은 자의(自意)로서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그를 어미 복중에서부터 택하신 것뿐이다. 그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다 하심은 그의 입술에서 나가는 말에 여호와 신의 정당성과 권위를 부여해주고 있다(예레미야 1:5, 20:9~. 에스겔 3:17. 아모스 7:15).


『 17 주는 내게 두려움이 되지 마옵소서 재앙의 날에 주는 나의 피난처시니이다 18 나를 박해하는 자로 수욕을 당케 하시고 나로 수욕을 당케 마옵소서 그들로 놀라게 하시고 나로 놀라게 마시옵소서 재앙의 날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시며 배나 되는 멸망으로 그들을 멸하소서 』


"재앙의 날"이 반드시 올 것을 예언하였다. 이것은 구약종말과 신약종말에 대한 2중 예언이 된다. 이러한 심판의 날이 임하는 것은 교회가 회개치 않기 때문이다. 회개치 않을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 양>에서 <공의의 심판주>로 돌아서시게 된다. 그러므로 심판기로 들어서면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된 그들의 죄악에 대해 그 죄목대로 징벌하시게 되는 것이다. 즉 예수 피로 거듭난 기독교 성도라도 '3대 화'가 지나가는 심판기에는 구약 예언서에 기록된 죄목에 걸리는 대로 심판의 대상이 되고 만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종말의 법은 <믿음의 법>이 아니라 <예언의 법>인 것이요, 이것이 중생 얻은 교회에게 계시록을 주시며 1:3, 22:18~19절을 기록케 하신 이유이다.


은혜 때는 일반적인 비를 내려 주셨으나, 예레미야서가 읽혀지는 종말에는 진실한 신뢰자들에게만 당신도 진실한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것이다(예레미야 16:9. 시편 41:1, 59:16).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배나 되는 멸망"을 주시는 이유는 그들이 회개치 않는 죄 위에 하나님의 말씀을 조롱하는 죄까지 범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똑같다. 기독교가 새 언약(예레미야 31:31~34)은 믿으면서 새 언약과 명백히 구분되어 '5회'나 기록된 새 일을 전하면 이단시하고 조롱하는 현실이 그것이다(민수기 16:30. 이사야 42:9, 43:19, 48:6. 예레미야 31:22). 만일 이 시대의 교회가 주께서 기록하신 예레미야서를 다시 예언하는 자들을 함부로 이단이라 정죄하고, 핍박하는 일이 있다면 자신이 받을 형벌을 배나 더 자초하는 어리석음이 될 것이다(예레미야 20:11. 시편 35:4, 40:14).


『 19 여호와께서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는 가서 유다 왕들의 출입하는 평민의 문과 예루살렘 모든 문에 서서 20 무리에게 이르기를 이 문으로 들어오는 유다 왕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을 가르치신 말씀이다. 안식일은 새 생명을 주신 날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안식일 곧 지킬 수도 없는 저주의 안식일(토요일)을 무덤 속에 묻어 놓으시고 제8요일인 '주의 날'(일요일)에 부활하셨다(죽음을 이긴 생명과 부활의 안식일). 죽었던 영혼이 주님의 부활로 새 사람이 된 만큼 이제 안식일은 "지키라" 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요 성령의 법에 의해 자동적으로 지켜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심령에 만족이 있는 은혜의 안식일이다(이사야 58:13 참조). 안식일 하루를 멸시하는 자가 천년간 지속되는 안식세계(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없음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일 것이다. 민수기 15:32~를 보면 안식일날 나무를 주워 떡을 구워먹다가 돌에 맞아 죽은 일이 기록되어 있다. 안식일을 범하다가 안식세계(가나안)에 못 들어간 일은 종말을 사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이 된다. 주일날 장사하고, 주일날 여행하고, 주일날 온갖 오락을 즐겨 행하는 기독교인들은 안식일날 나무를 주워 떡을 해먹은 자를 "쳐죽이라" 하신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정죄를 받게 될 것이다. 안식의 땅 가나안까지 백성을 인도해준 것은 유월절 피가 아니라 법궤 곧 '말씀'이었으니, 천년안식의 땅까지 우리를 인도해 줄 계시록과 예언서를 따라가는 것이 곧 '안식일을 참되이 지키는 행위'가 된다.


• 19~20절 : "예루살렘 모든 문에서 외쳐라" 예레미야 7:2, 19:2, 26:2절을 참조하라. 선지자가 백성에게 여호와의 말씀으로 경고할 때 ① 스스로 낮추어 앉으라 하였으며(예레미야 13:18), ② 재앙 내릴 것을 선포하였으며(예레미야 19:3), ③ 주를 대신하여 주의 말씀으로 깨우쳤다(에스겔 3:17).


『 2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지 말며 22 안식일에 너희 집에서 짐을 내지 말며 아무 일이든지 하지 말아서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함같이 안식일을 거룩히 할지어다 』


• 21절 : "스스로 삼가라" ① 모세를 통해서도 "스스로 삼가며 네 마음을 힘써 지키라" 하셨으며(신명기 4:9). ②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니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하셨다(잠언 4:23).

• 22절 : "안식일을 지켜라" ① 이는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신 날이며(창세기 2:3. 출애굽기 20:10), ② 하나님이 표징으로 주신 것이니 인간이 재해석할 수 없다(에스겔 20:12. 출애굽기 23:12). 이것은 안식교인처럼 토요일을 지키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 23 그들은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그 목을 곧게 하여 듣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 』


• 23절 : "백성이 청종하기를 싫어하므로" ① 선조의 죄악으로 돌아갔으며(예레미야 11:10), ②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게 되었다(예레미야 16:12). ③ 백성의 이 패역한 속성에 대해서는 이미 이사야 선지자도 외친 바 있다.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이사야 48:4).


『 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만일 삼가 나를 청종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하며 안식일을 거룩히 하여 아무 일이든지 하지 아니하면 25 다윗의 위에 앉는 왕들과 방백들이 병거와 말을 타고 이 성문으로 들어오되 그들과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거민들이 함께 그리할 것이요 이 성은 영영히 있을 것이며 26 사람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에 둘린 곳들과 베냐민 땅과 평지와 산지와 남방에서 이르러서 번제와 희생과 소제와 유향과 감사의 희생을 가지고 여호와의 집으로 오려니와 』


"주께서 제시하시는 조건"은 주를 청종해야 하며(출애굽기 15:26), 주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신명기 11:13).

• 25~26절 : 그리하면 "정치적인 안정"이 유지되며 "종교적 활동"이 지속될 것을 약속하셨다(시편 107:22. 히브리서 13:15. 베드로전서2:5). 그러나 24절 말씀대로 청종치 못할 때에는 정치적 불안이 일되 ① 지도자들로 잔뜩 취하게 하여 멸하신다 하였으며(예레미야 13:13~), ② 무자(無子)하고 형통치 못하여 유다를 다스릴 자가 끊긴다 하셨다(예레미야 22:30). 인간 종말에도 천년안식세계를 소망하며 그곳에 들어갈 소망을 가졌던 자들은 저주의 짐승통치시대인 '후 3년 반'이 도래해도 예비처에서 '한때 두때 반때'를 양육받으므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며 피의 정결함까지 받게 되니(계시록 12:6,14. 이사야 4:3~4) 주님의 말씀은 얼마나 진실한 말씀인가!


『 27 너희가 나를 청종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거룩케 아니하여 안식일에 짐을 지고 예루살렘 문으로 들어오면 내가 성문에 불을 놓아 예루살렘 궁전을 삼키게 하리니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


"청종치 아니할 때"엔 꺼지지 않는 불에 삼키게 되리라 하셨는데, 과연 청종치 않으므로 ① 왕궁과 백성의 집이 불에 탔고(예레미야 39:8), ② 여호와의 전이 소화되었으며(열왕기하 25:9), ③ 성전의 모든 귀한 기명이 훼파되었다(역대하 36:19). 구약교회가 당한 종말의 모양은 기독교 종말에도 그대로 적용되되 누구든지 주님의 영원한 복음(계 14:6)인 새 일의 말씀(예레미야 31:22)을 청종치 않은 자들은 '3대 화'에서 전부 망하되 마지막 화인 7째 나팔(7곱 대접)의 아마겟돈 때에는 불순종한 지구전체가 주님의 진노의 불에 소화된다. 구약이건 종말이건 청종만이 살 길이다! (스가랴 6:15).


◈ 청종하여 얻는 안식에는 4가지가 있다.


1. 영혼의 안식 - 누가복음 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성도의 마음 안에 있다(베드로전서 1:9~. 히브리서 10:39. 로마서 8:10).


2. 육체의 안식 - 마태복음 24:21~22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육체와 관계된 커다란 환난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한다 말씀하신 것이다. 계시록 11:1~12 예언의 증거를 마치고 3일 반 죽었다가 생기받고 하늘로 휴거하는 자들(왕권)은 그 몸이 사망을 이긴 변화체이므로 안식을 얻게 되고(데살로니가전서 4:16~17), 계시록 12:6~ 예비처에 보호받는 자들(백성)은 3년 반 동안 물과 양식을 공급 받으며 피를 정결케 함으로써 천년간 죽음없는 육체의 안식을 누린다(이사야 4:1~6). 성경에는 영혼의 구원을 받은 자들이 백보좌 심판의 부활로 나와 영생에 들어가는 것 이외에, 중생받은 자의 그 몸까지 구속해주심으로 전인적인 구원을 이루어 줄 것을 소망한 말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로마서 8:11, 8:23. 에베소서 4:30. 빌립보서 3:21. 계시록 14:1~5).


3. 지상안식 - 말 그대로 이 땅 위에 아담이 빼앗긴 에덴의 영광이 회복되는 때이다. 새 천년 동안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예수님의 의롭고 완전한 통치시대이다. 다음 성구는 모두가 땅에서 이루어질 말씀들이다(이사야 1:19~20, 2:3~4, 7:15, 9:6~7, 11:6~16, 14:1~5, 32:1~20, 35:1~10, 43:19~, 54:11~13, 65:17~25)


4. 무궁안식 - 중생받은 성도들이 2,000년간 소망해 온 '천국'은 바로 천년안식 세계가 끝나고 펼쳐지는 무궁안식 시대를 말한다(계시록 21:1~. 고린도전서 15:22~24). 그러나 이곳은 천년왕국이 마쳐지고 새로운 신천신지로 창조되는 곳이므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상 천년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인격을 갖추느냐 못 갖추느냐 하는 문제이다. 무궁안식은 예수의 피를 믿으므로 들어갈 자격을 얻고(새 언약=천국복음=백마1차승리), 지상안식은 계시록과 예언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새 일=영원한복음=백마2차승리).


백마가 2번 이김으로써(계시록 6:2) 이상에서 설명한 4가지 안식이 완전 성취되며, 이곳을 차지할 자들에게 주신 책이 주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이다.


. 유월절 양의 피로 자범죄를 용서받고 영혼이 구원을 얻지만 육체는 원죄 값으로 말미암아 흙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이다(이사야 40:6~8. 창세기 3:19).

. 그러나 이제 초막절기가 성취될 때를 맞아 예언의 말씀인 새 일 교훈으로 원죄의 열매인 패역까지 제해 주시면(스가랴 3:9. 이사야 25:6~8, 57:18) 사망이 사라진 몸으로 신창조 받아서(이사야 42:9~, 43:1~) 예수님과 함께 지상에서 1,000년을 살고서 무궁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주고 싶은 사랑'을 가지신 그분이 주시고자 하는데, 인간들은 '천국'가는 것만을 전부로 알고, 그 이전에 펼쳐지는 '지상천년안식' 세계 가기를 원치 않고 있다. 사실 이 좋은 세계를 원치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사단의 미혹이 문제인 것이다. 예수 피로 거듭나 하늘 시민권(빌립보서 3:21)을 확보하는 복음이 전파될 때에는 기득권층인 유대교권이 반대하더니, 이제 피로 산 말씀까지 순종하여 육체가 천년간 죽지 않고 사는 새 시대에 들어가자 하니 놀랍게도 하늘의 시민된 자들이 반대하고 있다. 몸의 구속 즉 '육체구원' 따위는 이단들의 얘기이니 귀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상안식세계'은 아담이 빼앗긴 에덴을 예수께서 다시 찾아 돌려주시는 땅으로서 결코 허구가 아니다. 본래 우리의 것이었던 것을 우리가 다시 받자는데 그것이 왜 이단인가? 자기 것을 찾아주겠다는데도 "싫다" 하는 자가 바보 아닌가? 지금 교회 안에는 바보와 어리석은 자들이 참 많다. 그래서 지혜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여종'을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잠언 9:3~6) 말하게 하신 것이다. 이 여종에 대해서는 예언서의 곳곳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여종이 바로


1) "해를 입은 한 여자"요(계시록 12:1),

2) "남자(144,000)를 안는(두르는) 여자"요(예레미야 31:22),

3) 애굽 땅 중앙에 있는 "여호와를 위한 한 제단"이요(이사야 19:19),

4) 만국의 보배가 임하실 때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하신 9.24 제단이요(학개서 2:7),

5) '순'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건축할 "여호와의 전"이요(스가랴 6:12),

6) 열 처녀가 졸며 잘 때 홀로 깨어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외치는 충성스런 '밤중의 소리'이다(마태복음 25:6).


'여종'으로 표현된 이 '한 제단'은 예수 믿고 영혼구원 받으라 외치는 제단이 아니다. 예수 믿고 영혼구원 얻은 기독교가 신랑이 더디 오므로 흑암 중에 졸며 잘 때 스가랴 4장의 순금등대의 역사로 그들을 깨워 "3대 화"를 면하고 '지상안식세계'에 "육체로 들어가라"는 메시지를 외치는 사명의 제단이다. 그 곳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신혼살림의 낙(樂)을 기쁘게 누리라 외치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제단이다.


인간이 "싫다" 하여도 하나님은 무소불능하신 당신의 절대권력으로 뜻한바를 이루신다. 절대권력 앞에 순종하여 땅의 소산을 먹겠는가? 절대권력자의 뜻을 거절하여 북방 칼에 삼키움을 당하겠는가?(이사야 1:19~20).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은 농부의 바라는 바는 변치 않는 포도 열매이다. 이제 18장을 통하여 토기장이로 등장하신 "하나님의 절대권력"을 깨닫고 그 앞에 순종하므로 '지상안식'의 기업을 받는 "우리"가 되자! 아멘...


(신앙문답) 안식일과 주일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인 말씀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답) 안식일이라는 것은 흙에서 지음 받은 아담의 몸에 축복한 날입니다. 그 축복이라는 것은 네가 이 땅에서 충만하고 다스리며 세계를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행함이 있는 조건에 의한 축복이 아니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내고 이르시기를 "네가 네 사명을 이제부터 충실히 하면 복을 받으리라"는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인간이 완전한 데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완전해 질 수 있는 사명으로 받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완전으로 갈 수 있는 <공의의 시험>에서 "뱀에게 말씀을 도둑맞아"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말미암아 지상의 축복을 빼앗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다시 찾아 주마" 하시며 맺어주신 것이 하나님의 언약인데,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가진 민족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에 이것은 하나님께서 '완전한 축복'으로써 부어준 계명이 아니라, 축복을 주기 위하여 다시 언약을 세울 때에 "죄가 무엇이냐?"를 가르쳐 주는 몽학적 교훈 차원에서 주신 것입니다. 즉 안식이 들어있는 십계명으로 말미암아 안식을 이룬다는 것이 아니고, 안식을 찾아가는데 필요한 '속죄'의 큰 뜻을 이루고자 하여 먼저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이냐를 가르친 것입니다. 공의를 분명히 알려주지 않고 무조건 죄를 사한다는 것은 <완전한 공의>를 폐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그 안식일을 사람이 지킴으로써 안식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안식의 축복을 받으면 그날은 평안히 쉬는 날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전히 이루어질 것을 목적하여 가르친 말씀이지,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될 말씀이 처음부터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안식일 날(토요일) 무덤에 들어가서 완전히 하루간 죽어 계셨던 것은 첫째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안식의 축복을 빼앗긴 것을 되찾아주기 위하여 그 죄의 대가를 걸머진 몸으로 자신을 내어주셨던 것이고, 이레 중 첫날(주일)에 사망을 뚫고 부활하셨던 것은 잃어버렸던 안식을 새로이 개척한 날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것은 당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위해 창조한 것인데, 사람의 범죄로 만물이 다 저주를 받았으니 마지막 아담(사람) 예수가 완전한 승리의 부활을 하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이루어지는 '새 날'을 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날'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중생 받은 '영적 이스라엘'은 육적 이스라엘이 지키던 안식일이 우리와 하등 관계가 없다는 것과, 그 율법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주님의 부활날이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는 날임을 알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안식의 축복을 받는 동시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령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날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법 아래서 다스림을 받는 신앙적 양심에서 그날을 "지킴으로써" 복을 받는 것이 아니요, 이미 복을 받은 우리들이 그날에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동시에 복 받은 사람으로서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의 은총을 힘입어 새롭게 되므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동시에 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이 부활한 안식의 날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은총을 크게 입음으로써 안식의 축복을 거저 받은 자가 되어 날마다 자라나는 과정에서 예배하며 말씀을 배우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안식일 계명>에 연합한 자의 참된 신앙노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날을 지켜서 복을 받는다든지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무시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는 우리가 "지킴으로써" 된다는 조건이 끼어들 틈이 없고, 오직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복을 주신 주님을 경배하며 섬긴다는 것밖에는 아무런 진리도 담겨 있지 않습니다. 율법이 안식을 주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마침(로마서 10:4)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안식을 주시는 것이니,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서 부어지는 은혜를 더 받기 위한 마음에서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바친다는 사상이 안식에 연합한 신앙사상입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의식'이 아니요, 은혜 가운데서 (사모하는) 마음이 더 간절해짐으로써 세상의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신령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므로 그날을 지키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억지로 지키는 법적인 행위가 아니고 은혜 속에서 자동적으로 하루를 지내게 되는 성령의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세계에서는 모든 것 전부가 우리 자체의 행위로는 이룰 수 없는 것들뿐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신 부활을 통하여 흘러오는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 인간이 새로워지는 동시에 몸으로 실천하는 일까지 발생하므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 "주일을 지켜야 된다" 하는 말은 사도 바울 서신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고 오직 "모이기를 힘쓰라"고 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주일을 지키기 위해 모이는 것이 아니고 거룩한 예배를 사모해서 모이게 되므로 그날을 거룩히 지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성도라면 누구든지 "주일을 지켜야 된다"는 생각보다 "은혜를 받지 못하면 안 된다. 반드시 은혜를 받아야 된다"는 사상이 앞서야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되려면 성령의 역사가 떠나지 않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니 성령의 역사 아래서 입도, 생활도, 몸도, 그 전체가 그날에 바쳐지는 예배(산 제사)가 될 때에 그날 하루 받은 은총 속에서 세상에 나가 무엇을 하든지 활발하게 승리의 길을 걸어나가는 열매가 주어지는 것이며, 이로써 주일 하루가 거룩하게 흘러가므로 안식일을 성령 안에서 자동적으로 지키게 되는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일날을 우리에게 축복하실 때에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고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로 만세 전에 이미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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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6장 - 임박한 형벌과 장래 회복.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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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제목 : 〈북방환난과 새 시대 회복〉

예언연대 : B.C. 628년∼588년경


성경 : 예레미야 16장

제목 : 임박한 형벌과 장래 회복


심판을 앞두고 쓰이는 종들은 하나님께서 그 생활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간섭하신다. 선지자의 삶이 실천적 예언이 되도록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것을 예표로 보이시기 위해 대선지자 이사야를 벗은 몸, 벗은 발로 3년간 행하게 하셨고(이사야 20:2~3), 사랑하던 예루살렘의 심판을 보이시기 위해서 어여쁜 에스겔의 부인을 즉각 죽여버린 하나님이시며(겔 24:18), 다니엘의 식생활을 간섭하셨고(다니엘 1:8~16), 당신의 종 호세아를 창녀와 결혼시키신 하나님이시다(호세아 1:2). 하나님은 영락없이 예레미야의 생활에도 철저히 간섭하신다. 사명자에게는 언제나 세상과 하나될 수 없는 생활의 도전이 있게 된다. 순종한 선배들의 삶은 곧 승리였다. 우리도 어떠한 환경이 오더라도 주만 앙망하며 나아가면 승리하게 될 것이다(사 40:31).


1. 결혼을 하지 말라고 권고함 : 1~4


『 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2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 』


“아내를 취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 머지 않아 끓는 가마솥 북방으로부터 엄청난 재앙이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13~16). 심판기를 앞둔 대표 사명자 예레미야에게는 결혼과 육아 문제보다도 환난을 피하는 일을 전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 이다 . 바벨론 환난을 앞둔 선지자의 시대나 러시아 환난을 앞둔 오늘날의 시대나 모두 "노아의 때"와 같다(마태복음 24:37). 마태복음 24:38~39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예수님의 말씀이시다. 예언서에 순종하는 가정은 노아 가정같이 보호를 받겠지만, 예언서를 무시하는 종말의 가정들은 다음과 같은 환난을 면할 수 없게 된다(창세기 19:14. 마태복음 24:19~. 누가복음 23:29. 예레미야 14:16~, 예레미야 8:2, 9:22. 시 78:63~72).


『 3 이 곳에서 생산한 자녀와 이 땅에서 그들을 해산한 어미와 그들을 낳은 아비에 대하여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4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고 슬퍼함을 입지 못하며 매장함을 얻지 못하여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리라 』


“독한 병”“기근”은 전쟁의 부산물이다. “매장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은 전쟁에 죽는 사람 수가 엄청나므로 매장지는 커녕 매장해 줄 사람조차 없는 기(氣)가 막힌 상황을 예언한 것이다.


2. 초상집, 잔치집에도 들어가지 말 것 : 5~9


『 5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상가(喪家)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痛哭)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哀哭)하지 말라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긍휼을 제함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6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매장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겠고 자기 몸을 베거나 대머리 되게 하는 자도 없을 것이며 』


환난의 성격을 더욱 자세히 진술하고 있다. 유대인의 죽음은 안타까운 죽음이 아니고 죄값으로 인한 당연한 죽음임을 설명하셨다. 큰 무더기 죽음의 이면에는 그만한 재앙을 자초할 만한 커다란 죄악이 숨어 있었음을 알리려는 것이다.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하나님의 교회가 미혹시켜보려고 내보낸 거짓 선지자들의 '평강'을 택했으니 이제 '평강'과는 상관 없는 '전쟁'에 죽게 됨이 마땅하다.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17)는 말씀 위에 굳게 서지 못하면 먹고 죽는 일밖에는 당할 일이 없는 이치와 같다. 평강의 왕은 예수님뿐이시다(미가서 5:5).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단과 그의 졸개들(짐승, 거짓선지자)이 잡혀 무저갱에 갇히기 전까지는 '평강'이 있을 수 없는데(계시록 19:20~20:3), 거짓 선지자는 제 사명이 그러하니 밤낮 '거짓 평화'만을 외쳐댄다(예레미야 6:14~, 8:11~). 인류 종말에 이루어진 계시록 8:7~12절 예언은 무신론 공산주의 세력이 성경대로 땅 삼분의 일을 때려부수고 평강을 없애버린 역사적 사실이 증거해 준다(계시록 6:3~ 붉은말이 큰 칼로 화평을 제한 역사).


이런 일이 있고 나면 계시록 9:1~12절과 같이 무저갱에서 연기가 나오고 연기 중에서 황충떼가 나와 하나님의 인(印)을 소유하지 못한 종들을 해하게 된다(첫째 화). '연기'는 해(하나님말씀)와 공기(성령역사-기도)를 가리우는 마귀의 사상으로서 멸망할 자들은 '전 3년 반'까지 이 연기에 취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후 3년 반'에 떨어지게 된다. 20세기 종말(1958.3.18)에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에 의해 등장한 평화공존 궤휼정책은 교회와 자유세계를 속이는 마귀의 사상의 출발점이다. 이 사상적인 연기가 전 세계의 정권과 교권 속에 침투함으로써 세계는 46년간 영적으로 캄캄한 밤중이 되고 말았다(누가복음 21:25~ 일월성신에 징조). 지금은 변장하여 자취를 쏙 감춰 버린 붉은말 스탈린의 타도정치가 '뱀의 뿌리'라면, 뱀의 뿌리에서는 '독사'가 나오고(흐루시초프의 궤휼정치), 그 열매는 '나는 불뱀'이 되리라 하신 예언대로 세계는 흘러가고 있다. '나는 불뱀'은 흐루시초프의 궤휼적 정권을 등에 업고 아시아뿐 아니라 온 세계를 궤휼로 친합시킬 자인데, 이 자가 세 뿔을 뽑고 내려와 극동에서 그 군대를 잃게 되므로(요엘 2:20. 이사야 37:36) 나아가서 많은 무리를 도륙(다니엘 11:44)하게 되는 마지막 '북방 왕'인데, 이 자는  모든 황충이 떼의 임금으로서(계시록 9;11) 세계를 어지럽히고, 결국 144,000명과 싸워 이기고(계시록 11:7), 중동 3차 대전(계시록 9:14~)에서 패권을 장악하여 '후 3년 반' 동안 세계를 지배할 최후의 '작은 뿔'이 된다(에피파네스, 네로와 같은 자). 이 자 옆에는 그를 보필하여 여러 가지 이적을 행하여 온 세계 사람들로 표를 받게 하고 '작은 뿔'의 우상 앞에 경배하게 만드는 '거짓 선지자'가 존재하는데(계시록 13:11), 음녀의 대표자이다. 지금 세상은 이 사망의 세계를 향하여 무섭게 돌진하고 있는데, 이것이 다 '연기'의 위력이다. 이러한 흑암의 시대 속에서 살아남는 길은 스룹바벨의 손에 있는 하나님의 인을 소유하는 것뿐이다(학개서 2:6~23. 스가랴 4:7~10). 우리는 택자들의 잠을 깨워 '후 3년 반'에 빠지지 않도록 밤낮으로 파수하며 다시 예언하고 있다(마태복음 25:5~6. 이사야 40:9~11. 새일성가 37장1절).


“인자와 긍휼을 제함이니라"(5절下) : 이들이 먼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다. 겔 9: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 아이와 부녀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바로 교회심판의 정경이다. 6절에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라는 말씀은 이사야 24:2~ 백성과 제사장이 일반이 된다는 예언과 같다. “몸을 베거나 대머리 되게 하는 자도 없을 것이며” 이방인이 바알 신을 섬길 때 애통함을 표시하기 위해 취하던 풍속인데, 하나님은 이런 어리석고 가증한 행위를 금하셨다(레위기 19:27~28. 신명기 23:1~. 열왕기상 18:28). 바벨론이 내려오면 바알을 섬기던 자들은 전멸한다는 뜻이다. 오늘날도 협상주의 노선에 있던 자들은 북방 왕이 내려오는 날 모조리 도륙된다.


『 7 슬플 때에 떡을 떼며 그 죽은 자를 인하여 그들을 위로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그들의 아비나 어미의 상사(喪事)를 위하여 위로의 잔을 그들에게 마시울 자가 없으리라 』


죽은 자의 유족을 위로할 필요조차 없는 환난이라 하신다. 모두 다 죽고 유족들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고(에스겔 24:17), 죽음이 죄값으로 인한 마땅한 결과이므로 사실 울 자격도 없다는 것이다.


인간 종말에 생각밖에 북방환난이 들이닥치면 한국은 '10일 환난' 세계는 '5개월 환난'의 혼란을 거쳐 3차 전쟁으로 돌입하여 '후 3년 반'으로 들어가는데, 이 때 죽는 죽음은 누가 누구를 위로할 만한 죽음이 못 되는 불순종으로 인한 개죽음이라는 뜻이다. 짐승의 악한 통치를 보는 그날에 사람들은 기가 막힐 것이다. 요엘 2:6 "그 앞에서 만민이 송구하여 하며 무리의 낯빛이 하얘졌도다"


『 8 너는 잔치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 9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내가 네 목전, 네 시대에 이곳에서 끊어지게 하리라 』


예레미야에게 잔칫집에 들어가 즐거워하는 것이나, 상가집에 들어가 슬퍼하는 행동을 아예 하지 말라 하심과, 에스겔에게 행구를 준비하여 대낮에 이사하는 행동을 하라(에스겔 12:3) 하심은, 모두가 환난을 당할 백성들의 미래상을 보이기 위함이다(실천적 예언). 말로가 아니라 생활로써까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 보여야 했던 것이 구약 선지자들의 삶이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아에게 기뻐하는 집회(잔칫집)에 동참하지 말라고 하심은(예레미야 15:17. 시편 26:4~5) 그들이 회개치 않는 자들이며, 이미 멸하기로 작정한 패역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스바냐 3:18 "내가 대회로 인하여 근심하는 자를 모으리니 그들은 네게 속한 자라 너의 치욕이 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느니라 19 그 때에 내가 너를 괴롭게 하는 자를 다 벌하고 저는 자를 구원하며 쫓겨난 자를 모으며 온 세상에서 수욕받는 자로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리라" 아멘!


3. 현재는 포로가 되나 장래에는 회복됨 : 10~15


『 10 네가 이 모든 말로 백성에게 고할 때에 그들이 네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큰 재앙을 광포하심은 어찜이며 우리의 죄악은 무엇이며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한 죄는 무엇이뇨 하거든 』


백성들의 질문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무지와 어두움” 속에 있음이 폭로되고 있다(예레미야 2:35, 5:19~, 13:22).


『 11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열조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12 너희가 너희 열조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강퍅함을 따라 행하고 나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13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 내어 너희와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 』


“알지 못하던 땅”이란 말은 바벨론 제국을 말한다. 거기서 "다른 신들을 섬기는 기간" 즉 버림받는 기간은 '70년'이다(예레미야 25:11, 29:10. 다니엘 9:1~3. 대하 36:21). 주께서 저희를 고토에서 쫓아내신 것이다(예레미야 6:15, 15:4. 레위기 18:27~28. 예레미야 14:8, 17:4, 22:28). "알지 못하던 땅"으로 끌려가 포로가 되는 원인은 그들이 "선조 때부터 하나님을 버린 까닭"이라 하신다. 원죄의 유전으로 인하여 후손들도 조상의 죄를 본받고 있는 것인데(예레미야애가 5:7), 인간의 힘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아시고(로마서 5:12,14) 예수님이 친히 해결코자 먼저 새 언약 유월절 양으로 오시어 예레미야 31:31~34절 예언대로 당신 피로써 모든 자범죄를 용서하셨다(여전히 죄는 짓지만 '믿는 자'라면 그의 죄를 간과하시고 아들로 삼아주시는 시대이다). 그 후 이 천국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될 때 즈음 백마 2차승리를 위하여 예레미야 31:22~ 예언대로 새 일을 창조하시어 뼛골 속 원죄까지 제거해 주시면 이제 죄를 간과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정 죄를 짓지 않으며, 죄 지을 생각조차 나지 않는 성결한 사람으로 우리를 재창조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로 이루어진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천년왕국'이다. 이 세계는 모든 죄악이 소멸된 에덴이므로(계시록 11:15) 더 이상 창세기 3:19절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일반 교회나 신학계에서는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모든 죄'를 사함받았다고 주장한다. 이 '모든 죄'에 '원죄'까지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어림없는 소리다. '모든 죄'란 예수 피에 녹아지는 모든 '자범 죄'들을 뜻하지, '원죄'까지 사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범죄를 범케 하는 죄의 뿌리가 원죄인데, 이는 사하는(간과하고 용서해주는) 대상이 아니라 뽑아 버려야 할 대상이다. 원죄가 소멸받으면 자범죄를 지을 수 없다. 예수 피는 유월절 양의 피로 예표되었으며, 예수님의 피로 산 말씀은 출애굽하여 받은 십계명으로 예표되었다. 문설주에 피를 바름으로 죽음의 신이 건너 뛴 것은 마지막 부활 때 예수님을 믿은 영혼들이 사망의 심판을 면함을 뜻했고, 출애굽한 모세총회가 (여호수아, 갈렙과 광야 2세들을 제외하고) 모두 광야의 시체가 되어 쓰러진 것은 아무리 예수님의 피로 영적 구원을 받은 성도라도 가나안으로 표상된 '천년왕국' 들어갈 때는 두 증인(144,000)과 흰무리만 살아남게 된다는 것을 뜻했다.


중생받은 자라도 '법궤'(계시록)에 불순종하므로, '3대 화'에 걸려 그 육체가 사망을 당하게 되는게 종말이다. 기독교인이 예수님의 피로 원죄까지 용서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보좌에서 받은 책의 봉인을 떼어 요한에게 계시하시며 읽고 듣고 지키라고 하실 이유가 없게 되며, 지금까지 예수 믿은 모든 이들은 이사야 40:6~8절의 예언처럼 풀과 같이 쓰러진 일도 설명할 수 없게 된다(=베드로전서 1:24~25 / 아담 이래로 930억이 사망함). 그래도 지금껏 기독교가 소망의 종교일 수 있었던 건, 지금까지 믿고 죽은 자들이 이 물질계를 폐하시고 '영체의 세계 천국'을 창조하실 때 다시는 썩지 않는 몸으로 부활을 받게 된다는 점에서다. 사망을 당하게 된 인간으로서 이 부활에 연합되는 일이야말로 썩을 인간의 최고의 소망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 2,000년간의 '은혜시대' 역사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제껏 가리워져 왔던 '천년왕국'을 계시록을 통하여 열어주신 만큼, 영혼구원과 그로 말미암는 마지막 부활에 연합하는 일에 덧붙여 전쟁, 질병, 슬픔, 사망이 없는 '땅의 축복'과 '몸의 안식'까지 누리라는 것이다. '지상 천년안식' 말이다. 마태복음부터 유다서까지는 비록 몸은 썩어져도 그 영이 부활의 몸을 받으므로 '천국'에 합당한 자로 다시 살게 하는 말씀들이라면, 작은 책 '요한계시록'은 인간의 몸에 온 저주, 땅에 내린 저주를 완전히 멸하고 '천국'보다 앞서 있는 '지상안식' 시대에 들어가 온전한 육체로 할렐루야를 돌리며 더 이상 풀과 같이 쓰러지지 않고 천년을 살게 해주는 말씀이다. 고로 영혼구원은 '천국복음'으로(새 언약) 모든 자범죄를 간과하여 주시는 시대이고, 지상안식과 몸의 구속은 '영원한 복음'으로(새 일) 믿는 이들의 패역, 곧 원죄까지 소멸시켜주는 시대에 될 일이라는 이 단순한 진리를 말세의 기독교계는 혼선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교파나 인학화된 신학을 강조하지 말고, 모든 선지자들이 받은 말씀대로 순종하면 될 일이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죄 문제는 결코 인간 스스로 해결치 못할 일이므로, 예수님은 친히 찾아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새 언약'과 '새 일'로 '이기고 또 이기시므로' 지구 땅과 그 위의 인간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다.


모든 죄가 나쁘지만, 죄 중에서도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는 우상숭배이다. 아담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는 십계명의 제1~2계명을 범하므로 매맞아온 역사이다(예레미야 2:8, 5:7, 8:2, 9:14). 그 중 제2계명은 십계명 중 가장 긴 내용으로서 우상과 관련하여 행하지 말아야 할 행위들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신 계명이다. 그런데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제2계명을 범하는 차원을 넘어 아예 삭제해 버렸다. 가톨릭에서 제작, 출판되는 모든 기도서나 십계명 판에는 제2계명이 삭제된 것이 확인 가능하다 ( ① 하나이신 천주를 흠숭하라. ② 천주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③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십계명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친히 새겨주신 것이지 사람이 기록한 것이 아니다(출애굽기 24:12). 그러나 그들은 인간이 제 생각을 섞어 성경을 맘대로 칼질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제2계명을 삭제하므로 아홉 개가 된 십계명을 다시 열 개로 맞추기 위하여 열 번째 계명을 두 개로 쪼개 놓았다. 신명기 5:21절을 근거로 들며 아내와 재물을 분리시켰다고 변명하고 있다. 이것이 이유가 될 수 없는 것은 처음 주신 말씀 출애굽기 20:17절을 보면 아내나 남종, 여종, 소, 나귀 등은 하나의 계명 안에 들어있는 내용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대로 아내 즉 여성을 물권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서 10번째 계명을 2개로 쪼개놓았다고 치자! 그렇다 해도 2계명은 보존 되어야 하며 10계명을 분리시켜 11개의 계명을 지키면 될 문제이다. 2계명을 삭제한 죄악을 가리우려고 10번째 계명을 2개로 쪼개놓고서는 변명하는 행위란..... 미혹의 영이 들어간 행위이다. 거짓말은 하나님 앞에 결코 통과될 수 없는 망령된 행위이다. 인간은 속여도 하나님은 못 속인다.


'가톨릭대사전'이라는 홈페이지를 참조해 보라! 교묘한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군색하기 그지 없다. 2계명을 삭제한 건, 가톨릭이 많은 우상들을 제작하여 판매하는 대금으로 큰 수익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돈을 포기할 수 없어 계명을 포기한 것이다!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씀을 삭제한 죄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 1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15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


과거 모세 때의 출애굽 역사도 귀했으나, 이제는 그보다 큰 출바벨론 역사가 있을 것을 예언하셨다. 성경에 등장하는 두 개의 큰 연대를 이해하면 성경 전체를 깨닫는데 큰 도움을 받는다. 430년 만의 출애굽 역사는 예수님이 (말라기 때 성전문을 닫고) 430년 만에 유월절 양으로 오시어 피를 흘리시고 이 죄악 세상 애굽으로부터(계시록 11:8. 이사야 19:1~,19~) 우리를 구해내심으로써(영혼구원) 완전 성취되었다. 그런데 이 일도 귀하지만 이와 같이 구약 70년 회복이 다시금 영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더 귀하다는 것이다. 종말의 출바벨론 역사 곧 영적 유다를 노하신 지 70년 만에(스가랴 1:12) 초막절기를 통하여 온 세상의 피로 산 백성들의 영,육을 3대 화로부터 보호하여 새 시대로 이전시키는 역사는 더욱 더 <큰 구원>이요 귀한 역사라는 뜻이다(예레미야 23:7~8, 31:1~8. 이사야 42:9~, 43:19, 예레미야 3:18, 24:6, 시편 106:47).


구약은 표면적 절기로서 종말을 보여주시는 것일 뿐이고, 때가 되어 이 절기들이 이면적으로 한차원 발전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신약의 역사이다(로마서 2:28). 성부와 성자와 성신은 당신이 정하신 3대 절기의 이면적 성취를 위해서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을 이루시고야 말 신이시며, 이를 통해서 당신 백성의 영, 육을 원수의 손으로부터 완전히 속량하여 주신다. 이 일을 구분지어 보이신 것이 '400년'과 '70년'의 연대이다. 지금 우리는 십자가 유월절의 성취를 통하여 영적 400년에 연합된 성도들로서, 남은 초막절기의 이면적 성취를 향하여 약속의 땅 시온산(천년왕국)으로 인도받고 있는 중에 있다. 이 일에 있어 수두(首頭)로 앞장 선 '유다 지파'가 바로 동방 땅 끝에 위치한 선지 국가, 제사장 국가(출 19:5~6. 대하 31:14)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이 '70년 회복'(스가랴 1:12)을 깨닫고 일어나 외칠 때 세계 민족이 70 이레로 완성되는 그리스도의 나라로 들어가게 된다(다니엘 9:25~27, 2:44~45, 7:14. 계시록 11:15. 이사야 11:6~9, 35장, 65:17~25).


4. 악의 징치와 백성의 구원 : 16~21


『 1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며 그 후에 많은 포수를 불러다가 그들을 모든 산과 모든 작은 산과 암혈에서 사냥하게 하리니 17 이는 내 눈이 그들의 행위를 감찰하므로 그들이 내 얼굴 앞에서 숨김을 얻지 못하며 그들의 죄악이 내 목전에서 은폐되지 못함이라 18 내가 위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그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 그들의 가증한 것으로 내 산업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니라 』


북방 군대를 총동원시켜 “어부”가 고기 떼를 잡듯, “포수”가 사냥감을 잡듯 예루살렘을 잡아 삼키도록 하시겠다는 예언이다. 이 같은 일이 우리 시대에 성취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언서에 깜깜하니 깨닫는 자가 적다.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라 하심은 유대민족이 이방 강대국들의 가증한 우상들을 수입하여 섬기므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심히 더럽혔다는 것이다(다니엘 9:27. 마태복음 24:15~ 참조). 구약을 보면 종말을 알 수 있다. 1천 번제를 드리고 3천 지혜를 받는 등 하나님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솔로몬이 어찌하여 거룩한 시온산 터 위에 우상의 산당을 세웠을까? ....... 기름부음 받은 그에게도 원죄악을 틈타 들어오는 사단의 역사를 이길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원죄악의 고리를 물기 위해 틈을 보는 사단에게는 '작은 일'로만 협상해 주어도, 그로 인해 선민이 이미 받은 모든 축복은 단숨에 날아가게 되어 있다. 여자인 왕비들의 간청을 노년을 맞이한 솔로몬이 '작은 일'로 알고 허락해 주었을 때 통일국가 12지파는 찢어지게 된 것이다(열왕기상 11:1~8. 느헤미야 13:26. 시편 78:58~64, 23:27). 정욕 때문에도 이쁜여자는 다 끌어 왔겠지만, 또한 솔로몬의 부귀와 명성으로 인하여 이방 왕들이 딸들을 시집 보낸 것도 사실이다. 세상 고리들(정욕, 돈, 명예)에 걸려들면 사단은 반드시 그 고리를 이용해 말씀을 범케 하니, 왕비들이 제 나라의 우상을 섬기도록 해달라고 꾀일 때 노년의 솔로몬은 그만 망령되이 이를 허락했던 것이다. 원죄악의 눈이 밝아지면 하나님의 계명에 대하여 눈이 감기운다. 선악과가 먹음직, 보암직, 탐스러워 보일 때(창세기 3:6), 창세기 2:17절의 말씀은 온데 간데 없게 된 이치와 같다. 이렇게 연약한 여자를 통한 사단의 계략이 먹혀 들어갈 때, 솔로몬 성전 안에는 이방 우상의 산당이 들어서게 되었고, 이것은 사마리아 열 지파가 찢어져 나가게 된 원인이 된 것이다(열왕기상 11:1~13, 30~36).


시돈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 신 '그모스'와 암몬 신 '밀곰'이 이스라엘의 성소 안에 들어서게 됐다는 것(포도원 변질=이사야 5장)은 종말의 기독교 성도가 정신차려서 교훈 받을 일이다. 구약은 무조건 종말의 그림자이니 이 역사 그대로 지금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말씀을 가벼이 해석하는 신신학자들이 교회 안에 독버섯처럼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하나 범하게 하고 있다. W.C.C.나 로마가톨릭과 같은 거대 교단들을 통하여 시행되고 있는 음녀적인 인본주의 신학, 세속주의 신학, 에큐메니칼 운동을 보라. 이 '사랑'과 '평화'와 '대화'와 '타협'이라는 사상 조류가 유일신 종교인 기독교의 성경말씀들을 하나하나 범하게 함으로써 결국 은혜받은 기독교회(초기의 솔로몬)가 협상주의 기독교회(노년의 솔로몬)로 타락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가증한 미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으라" 하신 종말을 살고 있으므로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고 마는" 심판기의 백성인 것이다. 이제 3대 화가 지나가므로 하나님을 섬기던 참 이스라엘과 쭉정이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 19 여호와 나의 힘, 나의 보장, 환난 날의 피난처시여 열방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열조의 계승한 바는 허무하고 망탄(妄誕)하고 무익한 것뿐이라 20 인생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 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


예레미야의 기도 내용이다(예레미야 17:17, 시편 119:14, 시편 27:5, 시편 46:1). 우상을 섬기던 구약 유다 나라가 우상국가에 잡혀가 고생을 하였지만, 죄값의 기간 70년을 마칠 때 메데 바사국의 고레스 역사로 회복받았듯이, "다시 예언하는 우리에게" 이면적 유다의 70년 회복이 이루어짐에 있어 동방 고레스가 나타나서 21세기의 바벨론 왕 벨사살을 하룻밤에 죽이고(다니엘 5:25~30, 이사야 45:1~4) 유다와 온 세계 이스라엘을 회복시킨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수레바퀴는 예레미야로부터 2,600년을 굴러왔으며 지금은 그 종점에 이르러 있다. 다니엘 9:24절에 시온산성을 위하여 70 이레로 기한을 정하셨는데, 69 이레째에 예수님께서 기름부음 받은 자로 오셔서는 돌아가시고, 이제는 마지막 1 이레의 성취만을 남겨 놓고 있다.


예언은 영적 흑암을 뚫는 등불이다. 모든 예언서를 밝혀야만 21세기의 바벨세계를 영안으로 볼 수 있는 참 선지자 단체가 된다. 우리가 예언의 등불을 높이 들면 열방이 주께로 돌아온다 하셨다. 시편 22:27, 이사야 2:3~, 18:7~, 45:14~15, 49:22~23, 60:1~14절에 유다를 중심으로 하여 머릿돌, 심판의 다림줄 말씀이 나아가면 세계의 알곡이 유다에 연합되어 창세기 49:8~ 예언이 성취되고, 계시록 11:15~, 20:4~6절같이 이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므로 인류와 모든 피조물이 그렇게도 바라던 천년왕국이 도래하게 된다. '천년왕국'을 못 가게 하려는 마귀의 미혹을 예언으로 물리쳐서 그 땅을 차지하면 천년 끝의 미혹을 무난히 이기고 더 좋은 '천국'으로 이전하게 되지만, 아무리 예수 피로 '천국'을 확보해 놓은 자라도 예수님의 피로 사신 말씀인 계시록에 불순종하면 얼마든지 '천년왕국'에서 탈락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제단은 예수 믿고 '천국티켓' 따 놓은 자들 중에 "울며 탄식하는 자들"(에스겔 9:4)과 "우리 하나님의 종들"이라 이름하는 자들을 찾아내어 그 이마에 인을 치고, 거대한 군대를 이루어 적기독세력과 싸워 승리하고 3일 반 죽었다가(계시록 11:7), 하늘로 들림을 받아(계시록 11:12) 모든 선지자들과 성도의 피값을 갚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지상강림하여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세력을 완전 섬멸하고 새 땅에서 왕노릇 할 자들을 불러 일으킬 제1번지 제단이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는 말세 사명자들을 찾을 수도, 만날 수도 없으니 우리는 단지 미약한 야곱으로서 이 말씀을 전심으로 다시 예언할 뿐이다. 단지 순종할 때 소망없이 뼈가 된 '이스라엘'(에스겔 37:11)이 하나하나 모여들어 '극히 큰 군대'를 형성하게 된다(에스겔 37:10). 주님이 하실 일이다.


주님은 이 군대가 될 자들에게는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만이 유일로 신뢰할 분>이라는 사상을 심어주시어 승리케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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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5장 - 면할 수 없는 재앙과 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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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제목 : 〈북방환난과 새 시대 회복〉

예언연대 : B.C. 628년∼588년경


성경 : 예레미야 15장

제목 : 면할 수 없는 재앙과 벌


1. 재화(災禍)는 기정 방침 : 1~9


『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 내치라 』


"내 앞에서 쫓아 내치라" 하나님은 강하게 진노하셨다. 재림 예수님이 이와 같은 상태로 오신다는 것을 교회는 알까?

"모세와 사무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 중보기도한 가장 대표적인 선지자들이었다(이시야 99:6).


◈ 모세 : 자기 백성의 죄를 사해주시기를 간구했던 모세의 기도를 보자! 출애굽기 32:32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모세는 자기 민족을 위하여 대신 죽겠다는 희생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출애굽기 17:11절에도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긴 사실이 기록되었다. 또한 모세는 40일 금식을 두 번씩이나 하고 율법과 십계명을 받았다(신명기 9:9,18). 모세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주 앞에 "엎드렸음"이 민수기에서만도 다섯 번 기록되었다. 이는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린 지도자였음을 뜻한다. 신명기 34:10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이처럼 위대한 모세가 기도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듣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당신의 마음이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다"는 선언이시다. 도대체 교회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가? 범죄 때문이다. 회개치 않는 강퍅함 때문이다. 범죄하고도 회개치 않는 자는 하나님 앞에 "쫓겨남"을 당해 망한다는 교훈이다.


◈ 사무엘 : 사무엘 선지자도 민족을 위하여 기도함에 최선의 열심을 내었던 참 종이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하였다(사무엘상 12:23).


하나님께서 이런 위대한 지도자들이 주 앞에 서서 예레미야 당시의 백성을 위하여 기도한다 할지라도 들어주시지 않겠다 하시는 이유는 예레미야 당시의 유대 민족이 모세나 사무엘 당시의 열조(烈祖)보다도 더욱 악하였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6:12). 예레미야 때의 백성들은 원죄의 악이 극도로 발동하여 강퍅해진 상태이므로 회개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의 문제이기도 하겠지만, 3대 화를 앞에 놓은 종말의 기독교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100% 버림을 당하게 된다는 교훈이다.


주님의 강한 진노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①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너를 듣지 아니하리라"(예레미야 7:16). ②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곤액을 인하여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예레미야 11:14). ③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예레미야 14:11).


구약 시대의 모든 예언은 종말의 참형상을 위한 그림자이다(로마서 15:4, 히브리서 10:1, 이사야 46:10). 따라서 본 예레미야 15장의 말씀도 주 재림 때에 될 일들이 분명하다. 계시록 6:12~17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 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사마리아가 3차에 걸쳐서 앗수르에게 잡혀갔듯이, 주님의 심판선고를 받은 유다도 영락없이 3차례나 바벨론에 잡혀가게 되었다(예레미야 7:15, 23:39~, 52:3). 1차는 BC 606년 여호야김 4년(역대하 36:6~. 예레미야 22:18), 2차는 BC 598년 여호야긴 석 달째(열왕기하 24:8. 역대하 36:8~), 3차는  BC 587~ 시드기야 11년 째이다(열왕기하 25:1. 역대하 36:15).


『 2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될 자는 포로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환난을 당하여 불평하는 유대인들의 원성이다. 이처럼 평소의 신앙생활이 외식적이던 자들은 환난 때를 당하여서는 필경 원망과 불평의 소리를 내게 된다. 원망 섞인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그들이 원치 않는 모든 재앙 가운데로 떨어지리라 하심이다. 망할 자는 가룟 유다와 같이 어두움으로 나아간다(요한복음 13:30~). 아노스 5:18~20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 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


심판의 방법들이 나왔다. 이에 대해 구약을 상고해 보면 ①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때 들짐승을 보내신다 하셨고(레위기 26:22). ② 그 시체를 짐승들의 밥으로 준다 하셨으며(신명기 28:26). ③ 또 들과 삼림 중의 짐승들의 삼킴에 내어준다 하셨고(이사야 56:9). ④ 네 가지 중벌(칼,기근,짐승,온역)을 내리신다 하신 말씀들이 있다(에스겔 14:21).


유대인들은 자신이 저지른 죄악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여, 회개도 할 수조차 없는 '짐승'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이 백성을 '짐승'에게 붙여 버리신다는 것이다. 네 가지 재앙 "죽이는 칼""찢는 개""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땅의 짐승"의 역할은 시대마다 7머리 짐승이 담당해 왔고, 오늘날에는 북방 러시아와 그 연합군이 담당할 것이다.


네 가지 재앙의 의미는 이렇다. 유다(교회)가 하나님이 원치 않는 우상숭배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주시는 많은 기회를 버리며 끝까지 회개치 않았으니, 이제 그들도 그들이 원치 않는 들짐승의 세력에게 원치 않는 통치를 당해보라는 것이다. 재앙을 '네 가지'로 말씀하심은 유다가 완전히 소멸되기까지 주어질 재앙이라는 뜻이다. 또한 모든 피조물을 다 동원해서 내리시는 재앙이므로 유다에게는 '피난처'가 없게 되리라는 뜻도 포함한다. '후 3년 반'에 떨어진 기독교 성도들에게는 피난처가 없다. 피난처의 문이 마지막 회개시기인 '5개월 환난' 끝에 닫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최종적인 재앙은 이처럼 무자비하고 무서운 것이다. 회개할 많은 기회를 주면서 기다리시셨던 만큼 그가 재앙을 내리기로 작정하셨을 때는 누구도 피난처를 찾을 수 없다. 앞으로 전 세계에 계시록 13장 같은 대 환난이 온다. 그 세계가 바로 예레미야 15장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짐승 손에 넘겨진 자들에게는 '피난처'가 없다. 반면에 '거짓평화'와 '에큐메니칼' 거짓 연합운동을 반대한 자들은 새 시대를 차지할 '남은 자'로 인정받아 예비처 안에서 '3년 반' 동안 보호받게 된다(계시록 12:6).


『 4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 』


히스기야 왕은 유대의 부패한 종교를 개혁했으나, 그의 아들 므낫세는 그 부친의 선한 개혁을 뒤집어 엎었다. 이와 같은 행위는 말할 수 없이 큰 죄이다. 이는 종교적으로 하나님을 반역한 죄일 뿐만 아니라, 인륜적(人倫的)으로도 부친을 반역한 죄이기 때문이다. 므낫세 왕의 반역적 정치를 따라간 모든 백성을 "세계 각국에 흩으리라"고 하신다. 자, 영적 유다인 우리 나라의 현실은 어떠한가? 이사야 8:4~8절을 읽고 상고하면 깨닫게 되리라! (☞ 관련자료). 진리를 거스르는 정권을 열방 중에 흩어버리리라 하심은 예레미야 9:16~, 29:18, 34:17절에서도 증거되었다.. 므낫세의 죄악은 열왕기하 21:11, :13~, 23:26절을 참조하라. 그러나 그는 바벨론 환난을 경험한 후 크게 회개하여 그제야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줄 깨닫고 주 앞에 겸비하여 우상들을 철폐했음이 성경에 기록돼 있다(역대하 33:12~19).


『 5 예루살렘아 너를 불쌍히 여길 자 누구며 너를 곡할 자 누구며 돌이켜 네 평안을 물을 자 누구뇨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나를 버렸고 내게서 물러갔으므로 네게로 내 손을 펴서 너를 멸하였노니 이는 내가 뜻을 돌이키기에 염증이 났음이로다 7 내가 그들을 그 땅의 여러 성문에서 키로 까불러 그 자식을 끊어서 내 백성을 멸하였나니 이는 그들이 그 길에서 돌이키지 아니하였음이라 8 그들의 과부가 내 앞에 바다 모래보다 더 많아졌느니라 내가 대낮에 훼멸할 자를 그들에게로 데려다가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를 쳐서 놀람과 두려움을 그들에게 졸지에 임하게 하였으며 9 일곱 자식을 생산한 여인으로는 쇠약하여 기절하게 하며 오히려 백주에 그의 해로 떨어져서 그로 수치와 근심을 당케 하였느니라 그 남은 자는 그 대적의 칼에 붙이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유다가 받을 벌의 내용들이다. ① 불쌍히 여길 자가 없고(15절), ②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가고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 죄악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았으므로 하나님도 심판작정을 "돌이키지 않겠다" 하셨고(6~7절), ③ 전쟁으로 인한 남자들의 사망으로 과부가 많아질 것과 전쟁의 공포로 두려워하는 모습, 기절하는 모습들이 예언되어 있다(8~9절).


"그들과 청년들의 어미를 쳐서" 남편이 희생된 과부들과 아들을 잃은 모친들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하여 상처를 입게 되리라는 뜻이다(이사야 3:25~26). "일곱 자식"은 많은 자식을 의미한다. 전쟁으로 인해 아들을 잃은 모친들의 절망이 묘사되었다. "수치"는 멸망(滅亡)을 의미한다(이사야 13:12). 이와 같은 전화(戰禍)는 과부가 바다 모래보다 많아진다는 표현을 보아 인정 사정이 없으며, 엎친 데 덮친 듯이 임하는 강도높은 재앙이다(이사야 24:6~, 47:9~. 예레미야애가 1:1). "내가 대낮에 훼멸할 자를 데려다가"란 북방환난이 비밀스럽게 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내보내시는 몽둥이인 만큼 자신 있고 당돌하게 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태해지고 강퍅해진 백성에게는 "졸지에" 갑작스럽게 닥쳐온 환난이라는 것이다. "백주에... 해가 떨어짐"은 심각한 절망상태를 뜻한다(아모스 8:9~10. 미가서 3:6). 환난과 관련한 이 모든 표현들은 유대 민족의 죄악이 그처럼 당돌하고, 무섭고, 하나님의 마음을 절망케 하는 죄악들이었음을 암시해 준다. 예레미야는 예언을 통해 백성이 자신들의 과거 죄를 회상(回想)하여 회개토록 유도하고 있다.


이 예언대로 구약 교회에 바벨론 재화가 임했다면, 다시 예언함에 의해(계시록 10:7~11) 21세기 종말에도 기독교가 북방 재앙을 당케 될 것이다. 이미 세계 땅 1/3의 교회는 파괴되었고, 이제는 세계적인 멸망을 앞두고 있다.  양의 피(구약)로 세워진 유대 민족이 범죄할 때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셨으나(예레미야 25:3~4) 백성은 듣지 않았고(마태복음 21:34~44) 그 결과 북방 칼이 임하였다. 하지만 약속한 70년이 찰 때(예레미야 25:11, 29:10) 스룹바벨 총독을 앞세워 고토로의 회복을 허락하셨다. 인간 종말에 예수 피(신약)로 세워진 기독교회가 범죄할 때 다시 예언하는 제단이 나타나 신랑이 온다고 외치므로(마태복음 25:5~6. 이사야 40:9~11. 계시록 1:7. 이사야 19:1~) 택한 종들이 일어나 예언의 등불을 밝히게 되나(144,000) 미련한 처녀들은 '무익하고 악한 종'의 행실을 하면서 기름 준비가 없었으므로 뒤늦게 깨닫긴 해도 혼인예식(1차부활)에 참여하지 못하고 바깥 어두운 데(후 3년 반)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다가 죽게 된다(마태복음 25:30. 새일성가 23장3절).


사명 국가 유다(한국)가 일제시대 신사 참배의 우상숭배를 회개치 못할 때, 6.25 공산당 몽둥이를 얻어맞는 것이며, 그러고도 회개치 않을 때 이 죄악이 쌓여 붉은 짐승을 탄 음녀(W.C.C. / K.N.C.C.)의 악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계시록 17:3~5). 이와 같이 회개치 않으면 북방 7째 머리 러시아를 들어서 심판하신다는 것이 예언서 전체의 뜻이다.


에스겔 38:1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옛적에 내 종 이스라엘 선지자들을 빙자하여 말한 사람이 네가 아니냐 그들이 그때에 여러 해  동안 예언하기를 내가 너를 이끌어다가 그들을 치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라"


하나님이 한 번 정하신 일이므로(예레미야 44:27~, 42:16, 에스겔 5:12) 우상숭배(협상죄)한 자들은 재앙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한반도의 쭉정이가 심판받으면, 내려왔던 북방군대는 '동해', '서해'로 수장되고(요엘 2:20), 대한민국은 제사장국가(출애굽기 19:5~6)가 되어 스룹바벨의 '머릿돌'과 '하나님의 인'과 '다림줄'의 권세를 자랑하게 된다. 이 때 세계의 알곡들이 '은총, 은총'을 외치며 모여들 게 되 며(스가랴 4:7~10. 학개서 2:21~23), 전 세계적인 추수가 강권으로 시행되어 1,260일 순금등대 촛대역사가 마무리된다. 우리가 다시 예언하는 이 내용으로 인해 우리는 한국 교회에서 판찍은 이단이 되었고, 저주와 조롱거리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2. 선지자의 탄식과 하나님의 응답 : 10~14


『 10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모친이여 모친이 나를 온 세계에게 다툼과 침을 당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뀌어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뀌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


선지자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아무런 연고 없이 자기와 다투며 핍박하는 것에 대하여 원통히 여기고 있다. 선지자는 그들과 금전 관계로 피차간 틀어진 일도 없었다. "뀌어주지도" "뀌이지도" 아니하였다. 준 것이 있다면 다만 그들이 구원받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뿐이다. 그런데도 백성과 지도자들이 하나되어 예레미야를 저주하는 배은망덕을 보이는 것은 유대인들이 사단의 지배아래 끌려들어갔기 때문이다. 시대를 막론하고 사단은 선민 속으로 들어와 진리를 거역케 한다. 기독교는 현재의 종교이다. 기독교에만 유일한 생명이 있고, 생명은 현재이기 때문이다. 사단은 역사적, 교리적 연구의 대상이 아니다. 바로 지금 내가 피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투쟁의 대상이다(히브리서 12:4. 야고보서 4:7).


"내게 재앙이로다" 다툼과 침(때림)을 당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19). 사람마다 종일토록 예레미야를 조롱한 사실(예레미야 20:7)은 인간(人間)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예레미야 20:7). 그러나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다(시편 126:5~6). 땅의 사람은 예레미야를 조롱하고 저주했지만 주님께서는 주의 종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시편 109:28). 그들이 예레미야와 다투며 그를 때려도 주의 종인 예레미야를 이길 수 없고, 까닭도 없이 내뱉은 그 저주는 결코 예레미야에게 임할 수 없는 것이다.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의 떠도는 것과 제비의 날아가는 것같이 이르지 아니하느니라"(잠언 26:2). 잘못 배달된 짜장면은 중국집으로 돌아가는 법이다.


『 1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로 복을 얻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대적으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로 복을 얻게 할 것이며"

① 하나님은 주의 남은 백성의 모든 일이 결국 잘 되게 하실 것이다(이사야 30:18~).

② 고난이 유익이 되도록 말이다(이시야 119:67~72, 이사야 48:10, 이사야 29:1~4).

③ 선지자가 복을 받게 되는 이유는 전심으로 하나님만 찾았기 때문이다(예레미야 29:13).

④ 북방 바벨론이 예레미야를 선대하고 해하지 아니한 것은(예레미야 39:11~12, 40:4) 선지자가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한 결과이다(계시록 2:10).


◈ 그러나 선지자의 생애에는 고독이 많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비와 긍휼 베풀어주실 것을 호소하였으나(예레미야 14:19~22) 이 중보기도에 대한 응답은 보다 더 확실히 이스라엘을 심판하리라는 내용으로 임했다(예레미야 15:1~9). 예레미야는 진실히 살려보려는 기도를 하였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선지자를 조롱하고 미워하였다. 요한일서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조롱과 핍박중에 예레미야는 좌절에 빠져 욥이 그러했던 것처럼(욥기 3:1)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기까지 하였다(예레미야 20:14~18). 예레미야는 모든 대상으로부터 고립되었음을 느끼고 극심한 고독감에 시달렸다. 동족과 교회로부터 버림받는다는 것은 심히 괴로운 일이다. 가는 곳마다 비방거리, 저주거리가 되는 것이 얼마나 감내하기 힘든 일일까? 게다가 하나님이 시켜서 그렇게 한 것뿐인데, 전하면 전할 수록 생명의 위협만 가중될 때 인간으로서는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보며 예레미야를 잡아 죽이려고 했으니, 이러한 극심한 상황들이 결국 예레미야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게까지 만들었던 것이다(예레미야 15:10).


때때로 하나님의 종들은 "내가 버림받았구나" 하는 느낌에 떨어질 때가 있다(이사야 49:1~5). 이때가 바로 영적으로 심히 고독한 시련기이다. 이 기간이 바로 계시록 9:1~12절의 때인데, 왕권받을 종들에게만 임하는 특별한 시련기간이다. 계시록 9장의 제목은 "악마득세"요, 다섯째 나팔의 제목은 "시련기"인데 이로 인해 참 종들에게는 혀가 마를 딱한 사정이 오고(이사야 41:17)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는 일이 발생하는 것이다(하박국 1:1~8). 이 과정을 겪어야만 원수를 이길 수 있는 최고 영계까지 자라나게 된다.


『 12 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13 그러나 네 모든 죄로 인하여 네 사경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 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14 너로 네 대적과 함께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리니 이는 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너희를 사르려 함이니라 』


"철과 놋"은 북방 바벨론을 비유한다. 다니엘 2:41~ 발가락이 철과 진흙인데 철은 공산주의 국가요 진흙은 자본주의 국가이다. 철과 진흙이 서로 섞여 있지만, 철은 단단하여 물렁물렁한 진흙을 부서뜨리게 된다. 그러나 공중에 뜬 돌(머릿돌 말씀 심판)이 우상의 발을 쳐서 없이 하고, 우상을 친 돌이 온 세계에 가득하여 새 시대를 이룬다고 약속하셨다(다니엘 2:34~35, 44~45). 하나님은 구약 유대민족을 통해 지금의 기독교회가 회개치 않으면 북방 바벨론 세력으로 어떤 모양으로 파멸당 할 것 인지를 미리 보여 주신 것이다. 2,600년 후에 나타날 우리들을 위해서 말이다.


① "재산과 보물로... 탈취를 당케 하며 ② "알지 못하는 땅으로 끌려가게 하리니" -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을 좇아왔는데(창세기 12:4) 후손들은 선지자가 대언하는 축복의 말씀을 배반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결국 아브라함이 건너왔던 유브라데강을 다시 건너가서 첫 아담과 같이 육체가 썩어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종말에도 세계교회가 계시록과 모든 선지서의 말씀을 무시하면 계시록 9:14~ 유브라데 강가에서 벌어지는 전쟁으로 20억이 죽고, 곧이어 계시록 13장같이 '후 3년 반' 대 환난으로 들어가 짐승통치 밑에서 창세이래로 없던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많은 수가 죽고, 표 받은 자들은 예수님의 지상강림 때 계시록 16:12~19:21절까지의 아마겟돈 전쟁으로 전멸당하게 된다.


심판사건의 주 무대는 알파 때나 오메가 때나 매일반 유브라데 강이다(강 길이=2,700Km). 이와 같은 비극은 우연한 일이 아니고 교회의 죄악과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 인류사나 교회사에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이사야 41:4 "이 일을 누가 행하였느냐 누가 이루었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를 명정하였느냐 나 여호와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태초부터 종말까지의 모든 사건을 명정하셨다. 인류역사는 그분이 정하신 대로 행해질 뿐이(이사야 43:13).


미리 깨달으면 유익될 일들은 다음과 같다.


① 욕심으로 쌓아 놓았던 자신의 재산이 북방환난 때 다 탈취당할 것을 미리 내다 보아야 한다. 그것이 보인다면 재산에 대한 욕심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범죄치 않게 될 것이다(13절).


② 죽음보다 못한 포로 생활(예레미야 22:10)이 자신들이 받을 분깃임을 내다 보아야 한다. 그러면 생명에 대한 애착 때문에라도 범죄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들려줘도 이 문제를 해결치 못하는 것은 원죄의 패역(이사야 57:18)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패역을 없애는 제단으로 이사야 19:19~ 애굽땅 중앙제단을 세우셨다(5대강국 때 등장). 이는 학개서 2:10~23 예언대로 다리오 왕 2년 9월 24일에 지대놓은 스룹바벨 머릿돌 제단, 순금등대 제단이다. 하나님은 이 제단을 통하여 새겨야 할 말씀을 다 새겨서 하루에 죄악을 제하시고 사망을 영원히 멸하신다 예언하셨다(스가랴 3:8~10, 이사야 25:6~8). 사망이 멸함받은 '새 천년 안식세계'는 이 제단의 '인(印)의 권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인쳐서 택한 144,000명과 그에 딸려 나오는 흰 무리를 제외하면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소멸하게 된다.


"진노의 맹렬한 불" 맹렬한 불은 인정사정을 보지 않는다. 그것은 일단 무엇엔가 붙으면 다 소각하기 전까지는 꺼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노 역시 이같이 두려운 것이다. 사단은 실재로 존재하는 '불심판'을 비유로 왜곡함으로써 단 한 사람이라도 더 불탈 세상에서 소망을 끊지 못하도록 유도한다. 참고하라.


◈ "불"에 대하여


① 불로 비유된 말씀.

• 예레미야 5:14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

• 계시록 11: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 신명기 33:2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 같은 율법이 있도다" 심판하실 말씀을 강한 불로 비유하신 예언들이다. 그러나 성경에 있는 불에 관련된 단어 전체가 '말씀의 불'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② 실제 불 - 소돔성은 유황불로 심판받았는데, 다음 예언들은 바로 이 같은 태워버리는 불을 가리킨다.

• 이사야 33:11~12 "너희가 겨를 잉태하고 짚을 해산할 것이며 너희의 호흡은 불이 되어 너희를 삼킬 것이며 민족들은 불에 굽는 횟돌 같겠고 베어서 불에 사르는 가시나무 같으리로다"

• 이사야 24:6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 중에 거하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거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으며..." 이 불은 심판 때 계시록 16:12~19장 내용같이 임할 아마겟돈의 심판의 불이다.

• 누가복음 17:28~30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에스겔 38:22~ , 말라기 4:1~ 의 유황불이나 풀무불은 핵전쟁의 불을 예언함이다. 사단은 언제나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고 인간 생각으로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데, 이는 옛 뱀이 선악과를 먹으면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 하며 하와를 꾀었던 것과 같은 모양이다. 지금도 많은 이단들이 성경을 왜곡시키고 있다. 그들은 핵무기 심판의 불에 관한 말씀이 성경에 분명하게 존재함에도 이것이 비유라 하고, 성경에 나오는 '불'은 전부가 '말씀의 불'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유대인이나 현 교회가 하나님의 맹렬한 말씀의 불을 외면한다면 3차 전쟁(계시록 9:14~21)과 아마겟돈(계시록 16:12~21) 전쟁에서 횃돌같이 불에 탐으로 한줌의 재가 될 것이다. 이렇게 피조세계가 주님의 진노가 담긴 맹렬한 불에 살라짐은 백성의 행악을 인한 주님의 분노 때문이다(예레미야 4:4). 온 땅이 불에 타서 다시는 심지도 못하는 소돔, 고모라 땅과 같이 되는 것은 언약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까닭이라고 3,500년 전에 미리 알려주셨다(신명기 29:23~26). 시편 21:9) "네(예수)가 노할 때에 저희로 풀무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로 저희를 삼키시리니 불이 저희를 소멸하리로다"


『 15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오니 원컨대 주는 나를 기억하시며 권고하사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보복하시고 주의 오래 참으심을 인하여 나로 멸망치 말게 하옵시며 주를 위하여 내가 치욕 당하는 줄을 아시옵소서 』


선지자가 개인 감정으로써 사적인 원수를 심판해 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이 아니다. 그는 대언자인 자신을 죽이려 하는 하나님의 원수들로부터 치욕당하는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붉은 용(600)의 감화를 받은 정치-종교세력 66을 한없이 오래 참아 살려두시면, 예레미야는 사명을 다하기 전에 일찍 죽어 하나님의 일을 완수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시편 26:9, 시편 3:1~ ). 선지자의 이러한 간청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 당신의 공의을 이루어 달라는 기도일 뿐, 사감(私感)은 아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구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이 처한 상황을 종보다도 더 잘 아심은... ① 주님은 언제나 당신을 향한 종의 마음을 감찰하고 계시며(예레미야 12:3), ② 종의 입술에서 나온 모든 것이 주 앞에 기억돼 있기 때문이다(예레미야 17:16).


예레미야에게 이러한 환경을 주시는 것은 종의 마음을 살피시고 시험하사 그 종을 연단하시기 위함이다(시편 17:3, 26:2).


『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 거짓 종들이 득실거리는 가운데 자신의 직위(職位)가 주님께로부터 말미암은 것을 상기하며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라 말한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다.


① "얻어먹었다"고 한 것은 그가 계획한 바도 없고 구한 바도 없이 뜻밖에 선지자의 사명과 그 전할 말씀을 받게 되었다는 고백이다(예레미야 1:5~10).

② "내게 기쁨, 내 마음의 즐거움" 달고도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을 체험하였다는 것이다. "얻어 먹는다"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말씀의 떡을 맛있게 받아 먹었다는 어린아이와 같은 표현이다.

③ 죄인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었다는 것은 그의 속에 신령한 말씀이 깊이 새겨지므로 그것을 전할 때마다 옛 사람 예레미야는 없어지고 그 말씀에 화합한 하늘 사람이 진실히, 힘껏 전하게 됨을 의미한다. 욥기 23:12, 시편 19:10, 시편 119:72, :97~ 의 내용들도 예레미야와 같이 말씀의 꿀을 체험한 자들의 고백이다.   


『 17 내가 기뻐하는 자의 회에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을 인하여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


"내가 기뻐하는 자의 회에 앉지 아니하며..." 기뻐하는 자의 회(會)라는 뜻은 '진리를 조롱하는 자들의 화합'이란 뜻이다. W.C.C.나 K.N.C.C. 단체는 예언서의 반대편에 서서 인위적인 평화를 소망하며 따라가는 음녀적 노선의 단체들이다. 가증한 모든 종교단체들은 앞으로 '음녀'로 대통합될 것이며, 이 일이 성취되기 위하여 마귀는 지금 '에큐메니칼 운동' 곧 '종교통합운동'을 조종하는 것이다. 앞으로 '개신교연합단체'와 '로마가톨릭'의 융합이 어떠한 모양으로 진행될지 그 귀추(歸趨)가 주목된다. 성경의 종말은 오직 큰 전쟁으로써 '짐승'을 이기는 것뿐인데, 신랑 예수님을 대적하는 짐승 사상을 따라가며 그의 손을 잡아주는 것은 음녀적 사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사상을 가진 교회들을 분노로 치시는 것은 "공의의 심판"일뿐, 무자비가 아니다.


"주의 손을 인하여"란 말은 "주의 손 때문에"란 뜻이다. 이것은 주님의 능력의 손이 선지자를 붙들어 영적 감동 속에 이끌어 가심을 가리킨다(예레미야 20:7~, 이사야 8:11~, 에스겔 1:3~ ). 이 영감(靈感)은 회개치 않는 백성을 치겠다는 주의 진노적인 영감이니(17절) 이 영감을 받은 선지자는 악도들과 타협할 수 없고, 접촉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홀로 앉았다고 한다(이사야 49:21). 이는 염세주의(厭世主義) 생활이 아니다. 혼탁하고 바벨화된 세상에서 진리 사상을 목숨 바쳐 지켜내려 하는 자가 처하게 되는 생활이다. <고독한 순종의 길> 예레미야와 같이 이 길을 가지 않겠는가?


『 18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찜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


선지자는 계속적으로 백성들의 미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계속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뜻인즉 이렇다. 흐르는 시내인 줄 알고 찾아와 보았더니 메말라 있어 물을 얻기는 커녕 절망감만 안고 돌아가는 자의 심정처럼 예레미야 마음이 하나님 앞에 그렇다는 것이다(욥기 6:15~20). 선지자는 하나님을 구원자로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늘 유대인들의 미움을 받도록 방치하시기만 하는가 말이다! 나는 약한 종인데 하늘의 위로가 조금은 있어야 될 것이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일찌감치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예레미야 1:10) 말씀하시고는 어째서 속이는 이처럼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방치해 두시는가 말이다!


이 불평 담긴 말은 원죄(패역) 때문에 나오게 된 좋지 못한 말이다. 요나가 했던 항변과 비슷한 종류이다(요나 4:1~9). 이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회개를 독촉하신다.


『 19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서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너는 내 입같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


예레미야가 회개하면(돌아오면) 그를 계속해서 선지자로 쓰시겠다고 하신다. "천한 것에서 귀한 것을 취할 것 같으면..." 예레미야가 예언사역(豫言使役)을 하는 중에 사람들에게 아첨하지 말고, 선악간 취사선택(取捨選擇)을 잘하며, 강직(剛直)하게 외치면... 즉 강퍅한 자들에게 맞서 아낌없이 곧은 말로 경고할 것이며, 아무리 입장이 곤란하여도 가치 있는 일을 변호하며 의(義)로운 자들을 변호해 준다면... "너는 내 입같이 될 것이라" 버리지 않고 사명감당을 허락하겠다는 뜻이다. "그들은 네게로 돌아 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백성(교회)들이 예레미야가 지도하는 대로 돌아와야 함은 마땅한 일이나 그가 낙심하여 하나님께 항변하거나 변심하여 백성(교회)의 수준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다. 진리를 따라 순종한다는 종들에게 있어서 '협상'은 쑥물이요 사망이다.


회개를 독촉받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권고와 책망을 통해 크게 깨닫고 각성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체질이 연약함을 아시므로 사명자가 말씀 받고도 흔들려 혹 약해졌을지라도 다시금 깨우치며 일으켜 주신다. 시편 145:14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


『 20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21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속하리라 』


흔들렸던 종에게 예레미야 1:18절의 말씀을 기억시켜 주시는 사랑이다. 선지자는 잠시 약해졌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굳세게 붙드시며 원수라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과 악한 자, 무서운 자라도 그를 범하지 못할 것을 약속해 주셨다. 유대인의 핍박을 근절시키겠다 하심도 아니요, 난관을 제거해 주겠다 하신 것도 아니다. 단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즉 고난 받는 선지자와 동행해주심으로써 그의 예언 사역을 승리로 이끌어 주신다는 의미이다(새일 성가 14장 ♬ 내가 따라 갈 때에 주님 붙드시도다 주의 손에 붙들린 내가 승리하리라...). 이는 고통을 이기고 나아가는 종에게 왕권을 주시기 위한 모략적 사랑이다. 예레미야는 이제 용기를 얻었을 것이다. 26:14~15절을 보면 죽음 앞에서도 담대하여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적그리스도의 무리와 대적하여 싸울 144,000명이 되려면 하나님이 나서시어 친히 인(印)을 쳐 주시고 담대함을 주셔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서 자신의 어깨와 목에 들어간 힘을 빼고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시편 55:22) 하신 말씀을 의지하여 매일 새벽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님(시편 68:19) 앞에 무릎 꿇자! 내 모든 뜻과 정성을 다 바치고, 내 몸과 마음과 시간을 내어드리자! 기계로만 쓰시옵소서.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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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4장 - 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교회의 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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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제목 : 〈북방환난과 새 시대 회복〉

예언연대 : B.C. 628년∼588년경


성경 : 예레미야 14장

제목 : 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교회의 죄


여호야김 왕 때 임한 극심한 가뭄을 놓고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는 삼중 중보기도를 드리게 된다. 깊은 죄병을 앓고 있던 유다 동포, 재앙을 만나도 회개는커녕 원망과 절규밖에 할 줄 모르는 백성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던 것이다. 뜨거운 동족애가 담긴 예레미야의 중보기도는 유다 백성들의 깊은 죄악상과는 실로 큰 대조를 이루고 있다.


백성을 돌이킬 소망이 없음을 알아차린 예레미야는 주의 거룩한 이름과 신실한 언약에 매달렸다. 참된 기도란 인간적 소망이나 생각을 뒤로하고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신실하신 언약에 근거하여 호소하고 탄원하는 간구이다. 이러한 기도를 올릴 자는 먼저 자신부터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구해야 한다. 그럴 때라야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한재(旱災)의 참상 : 1~6


『 1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


옛날부터 유다 땅에는 한재가 많았다(창세기 12:10, 26:1~, 42:1~2. 신명기 11:10~17, 28:23~24. 룻기 1:1~. 사무엘하 21:1~. 열왕기상 8:37. 학개서 1:9~11). 한재는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죄악을 범할 때 임하던 징벌이다(레위기 26:19. 신명 11:17, 28:23). 구약 때는 모든 것을 육적으로 계시한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우리는 본문의 재앙을 영적, 육적 양면으로 깨달아야 한다. 종말의 교회가 예수의 계시를 무시하면 예배시간에 말씀의 이슬과 성령의 단비가 끊쳐지게 되므로 그 허전함을 달래기 위하여 자기도 모르게 이방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된다(마태복음 24:49. 하박국 2:5). 한재 재앙은 종종 '땅이 슬퍼하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예레미야 4:28, 12:4. 이사야 3:26), 실은 죄통에 빠져있는 백성을 보시는 하나님의 슬픔이며, 작게는 공의의 심판을 당할 때 곤비케 될 백성 자신들의 슬픔이기도 하다.


『 2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곤비하여 땅에 앉아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에 오르도다 』


예레미야서는 현재의 '기독교'를 책망하는 예언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구약백성'의 구원을 목적하여 주신 예언도 아니요, '종말의 불신자'들을 책망하신 내용도 아니다. 애통할 자도 교회요, 한재로 부르짖게 될 자도 종말의 교회임을 계시한 예언이다. 화려한 교회와 그에 딸린 부속건물들! 물량주의와 교세확장이 어느 새 목회성공의 기준이 되어버린 현실! 교회 안에 부자 교인들이 점점 증가하고 세상 성공을 위하여 때마다 모여 예수님께 축복을 간구하는 모습! 세상에서의 출세가 거리낌없이 '간증'이란 이름으로 자랑되어지는 현실! 이러한 모든 모습들은 얼마 안 가서 '애통'과 '부르짖음'으로 변할 것이다. "슬퍼하며... 곤비하여... 애통하니"라는 구절은 육적 한재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묘사해주는 표현이나 종말의 성취 때에는 부패한 교회의 성도들이 당할 3대 화의 고통이 된다. 이렇게 백성이 슬퍼하며 놀랄 재앙을 당할 때 예레미야 선지자의 마음 역시 심히 상하여 슬픔 중에 놀라게 된다(예레미야 8:21). 이런 비참한 상황은 '얼굴이 숯보다 검게 된 것'으로 표현되기도 했다(예레미야애가 4:8~9).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에 오르도다" 재앙으로 인한 부르짖음인데, 회개의 기회를 한없이 제공해 주시며 기다리신 끝에 내려진 재앙이므로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이라 선포한 대로 이 부르짖음은 무시된다(예레미야 11:11). 종말에도 재앙의 장소인 '후 3년 반'에 떨어진 성도들은 아무리 회개해본들 하나님은 그들의 육체를 짐승 칼에 붙여 버리신다.


『 3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길으라 하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 머리를 가리우며 4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 머리를 가리는도다 5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어버리며 6 들나귀들은 자산 위에 서서 시랑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아득하여 하는도다 』


귀인들이 구하여도 "물을 구하지 못하고 빈 그릇으로 돌아오는" 일이나(3절), 밭가는 자가 "부끄러워 머리를 가리움"은(4절) 도움을 원하나 응답받을 수 없는 절망의 상태를 뜻한다. 인간의 죄로 인해 짐승들까지 기갈을 당하며 "헐떡이는 모습", 새끼에 대한 애착심이 여타 동물보다 뛰어난 "암사슴"이 풀을 찾기에 갈급하여 자기의 "새끼를 내어 버리는" 모습은 참상의 정도가 얼마나 극심한가를 뛰어나게 묘사해 준다. "시랑"과 "들나귀"까지도 풀이 없어 헐떡이다가 시력이 쇠한 모습으로 나타남은 생명 가진 피조물 중에 한재의 화가 미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보여주는 육적 시대에 이러하였다면 이 예언이 종말의 영적 이스라엘에게 다시 예언되어 이루어질 때, 그 화가 얼마나 극심한 재앙으로 확대되어 나타나게 될 지 묵상해 보라! 구약 백성에게 임한 한재의 고통이 종말의 기독교 성도들의 코앞에 다가와 있다. 이 비극의 절정이 바로 계시록 13장의 세계이다.


계시록과 모든 선지자가 받은 묵시는 죽지 않고 살아 있어 예수님의 재림 때 전 세계 교회를 배경으로 다시금 성취되도록 작정돼 있다(이사야 46:10).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오른손에 있는 책을 받으신 후 사도 요한에게 계시하셨는데, 요한에게 이 작은 책 계시록을 꿀같이 먹고 전 세계 영적 이스라엘에게 "다시 예언하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계 10:7~11). 종말에는 육체적 한재와 기근이 더 비참한 모양으로 임하되 그에 앞서 먼저 영적 기근이 찾아오리라고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했다.


아모스 8:11~12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때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양식)을 먹지 않던 미련한 자들이 재앙이 임할 기미를 깨닫고 뒤늦게 말씀을 구하러 이리저리 헤매이는 모습이다. 하지만 그 모양 가련할 뿐 그 비틀거림의 끝은 북방 칼에 처절히 쓰러지는 것이다(마태복음 24:45~50). 옛날 유대 민족이 모든 선지자의 예언을 버리고 우상 국가와 타협함으로써 심판 받았듯이, 오늘날의 영적 이스라엘도 다시 예언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한다면 결코 심판을 면할 수 없다. 새 언약(렘 31:31)의 피는 믿으면서, 협상반대와 멸공을 외치며 다가올 천년안식을 준비하라는 새 일 교훈(이사야 42:9, 43:1~19, 48:6~, 예레미야 31:21~22)은 멸시하는 자들이 위와 같은 재앙으로 떨어지게 된다. 새 일 반대가 큰 죄라는 뜻이다. 심판의 대상자인 공산국가와 협상하며 양 떼에게 쑥물을 먹이고 있는 W.C.C.와 K.N.C.C.의 가르침은 오메가적 미혹인데, 많은 양 떼들이 W.C.C.의 쑥물에 '아멘'으로 응답하고 있으므로 쑥물을 먹이는 목자나 무분별하게 받아먹는 양 떼들이나(예레미야 5:30~31) 모두가 대 환난을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계시록 17장. 18장. 19장). 이런 일을 당하지 말라며 '새 일'을 증거하는 제단은 스룹바벨 제단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수인데 교회가 "물이 없는 우물"(3절)이 된 것은 하나님을 떠나 인간 스스로가 웅덩이를 팠기 때문이다(=인본주의). 이런 웅덩이는 곧 물 없는 우물이 되고 만다(예레미야 2:13). 예레미야 2:26절에 웅덩이를 판 지도자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 수치는 영영히 잊지 못할 수욕이라고 예레미야 20:10절에서 밝혀 주셨다.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짐"(4절)은 하늘이 철과 같이 되고 땅이 놋과 같이 되어(레위기 26:19) 땅이 아무런 산물도 내지 못함을 뜻한 표현이다(레위기 26:20). 신명기 28:24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서 필경 너를 멸하리라" 신명기에서는 불순종한 백성의 온 땅은 유황이 되고 만다고 하셨다(신명기 29:23). 인간의 죄로 인해 자연계나 가축까지 고통 받게 되는 것은 이미 창세기 3:17절에서 예언하신 바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한 노아가 저주받은 세상을 뒤엎고 새출발시키시는 데 있어 하나의 의로운 씨가 되었듯이, 예수님 한 사람의 순종으로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을 믿는 것이 종말 기독교의 최후의 소망이다.


• 창세기 5: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 계시록 5: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이와 같이 죄로 인한 저주의 고통을 완전히 벗어나는 길은 예수 안에 있되 '두 가지' 길로 약속되어 있다.


하나는 새 언약(유월절)으로서, 곧 예수님의 보혈이다(이사야 42:1~4, 53:1~12, 49:8上, 61:1~2上, 예레미야 31:31~34).

다른 하나는 새 일(초막절)로서, 곧 예수님의 피로 산 '하나님의 심판책'이다(다니엘 7:10~, 계시록 5:1~10, 10:7~11, 11:1~12, 22:18~19).


이 책을 꿀같이 먹고 다시 예언하여 증거를 마치는 길만이 영, 육이 살아 저주가 거치운 아름다운 새 시대(에덴)에 들어가는 길이다. 만일 피로 산 책을 가감하고 우상과 타협하면 육체는 노아 때같이 죽고 그 영까지 천년간 옥에 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베드로전서 3:19~20). 구약은 곧 종말이요, 인자의 때는 노아의 때와 같기 때문이다(이사야 46:11. 마태복음 24:37).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양의 피로 제사하던 의로운 셋의 계통이라도 홍수 심판기를 당해 육체가 사망할 때 그 영까지 옥에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종말을 향한 중요한 교훈이다. 오늘날도 영혼구원 얻은 교회가 '중생'으로 말미암은 '천국 시민권'만을 주장하며 교만할 이유가 없다. 새 언약(천국복음)으로 인한 영혼구원은 천년왕국이 지나고 백보좌 심판 때 영생의 부활로 나올 조건일 뿐이요, 환난을 피하여 천년왕국에 들어가 사망 없는 몸으로 천년을 살 조건은 '영원한 복음' 곧 '새 일 교훈'의 순종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로 산 예언의 말씀을 청종하는 일은 인간의 힘과 능으로 되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신의 역사로만 이루어진다 하셨다(스가랴 4:6). 아무리 거듭난 성도라 하더라도 원죄의 타락이 뼛골 속에 박혀 있으므로 피로 산 말씀에 한마디도 순종할 수 없는 것은 사도요한과 다니엘이 재림주 앞에서 쓰러진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다나엘 8:17~18, 10:8~10, 15~18. 계시록 1:17).


2. 예레미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 : 7~12


『 7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8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곤란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같이 하시나이까 9 어찌하여 놀라 벙벙하는 자 같으시며 구원치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 』


한재의 참상으로 인한 선지자의 기도이다.


① 선지자는 백성을 대표하여 죄를 자복할 때 민족적 죄악에 대해 연대적 책임의식을 느끼며 "우리"라는 말을 거듭 사용하며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환난을 당한 민족의 목자가 갖춰야 할 마땅한 태도이다.


② 그는 하나님께 빌기를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하였다(7절). "주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그가 자비롭고 은혜로운 구원자이심에 호소하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재앙으로 벌하신다 하여 그의 이름에 오욕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나, 다만 한없는 긍휼을 다시 한 번 청하여 용서해주실 것을 청하는 죄인의 마음인 것이다. 8절의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곤란한 때의 구원자"란 성호(聖號)가 위 ①번 해석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③ 8~9절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인이신데, 왜 이스라엘에게 "거류하는 자"나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과 같이, 또 "구원치 못하는 용사"같이 방관만 하고 계시느냐고 탄식하며 기도하는 부분이다(8~9). 이 의문점에 대하여는 10절에서 답하셨다.


④ 하나님께 유대 민족은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인시키며 버리지 말아주실 것을 구하고 있다(9절).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란 죄악을 지었어도 이 민족이 하나님의 '친 자식'이 아니냐는 호소이다. 그러나 이 말은 남은 백성 곧 경건한 무리들에게만 해당되는 명칭이다. 선지자는 자기 민족의 죄악을 인정할 때 ① 허물이 주 앞에 심히 많다는 것과(사 59:12) ② 죄악 때문에 넘어진다는 것과(호세아 5:5) ③ 민족적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로 나타남을 고백하였다(호세아 7:10) . 선지자는 주님께 자비를 구하고 있다. ' 우리는 악하나 다만 주의 이름을 인하여 용서하소서'(시편 25:;11)라는 맘으로 말이다. 우리를 용서하시어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시편 115:1)라는 심정으로 심판의 뜻을 돌이켜 주실 것을 간청하고 있다. 자신들의 타락함이 많음을 겸손히 고백하는 것이다. 백성은 이미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없는 상태까지 타락되었으므로 예레미야는 더욱 찢어지는 마음으로 중보하고 있다. 백성의 죄목은

. 푸른 나무 아래서 행음한 것(예레미야 3:6).

. 패역이 심한 것(예레미야 5:6).

. 주의 율법을 거역한 것 등으로 나타났다(느헤미야 9:34).


『 10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아니하므로 나 여호와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를 벌하리라 하시고 』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백성이 하나님께 대하여 지조 있는 충성을 하지 않는다면 주님도 백성에 대한 확실한 보호를 보장치 않으신다. 백성이 여호와 앞에 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우상을 섬기기도 하는 2중적인 태도로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유의지가 주어진 사람들의 행위에 대하여 비례식보응(比例式報應)의 반응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우매한 사람들로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다. 시편 18:25~26절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이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께서는 친 자식(백성들)의 죄악을 확실히 기억하신다(호 8:13. 렘 17:1~4). 또한 원수의 죄악도 잊지 않고 기억하신다(사무엘상 15:2).


『 11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12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


여기서는 유대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보여주신다.


① 선지자더러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고 하심.

② 그들의 "금식" 기도를 듣지 않겠다 하심 - 그들의 금식은 외식이고 겸손한 회개와 자책(自責)이 아니며, 또한 정욕(情慾)을 정복하려는 것이 아니요 다만 금식했다 하는 공로를 세우려 함이니 미신(迷信)적이라는 것이다(스가랴 7:5~14).

③ 그들의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않겠다고 하심(사무엘상 15:22).

④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하심(12).


창조주의 발언이 이러하니 이제 유다는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예레미야 11:11~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이렇게 된 이상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듣지 않으신다. 이사야 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종말을 사는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성경에 나오는 인명, 지명, 국가 등의 모든 재료들은 나를 살리시기 위한 주님의 사랑이라는 점이다. 성경에서 모압은 롯의 딸이 롯과 동침하여 나은 자식, 또는 그의 후손들을 지칭하는 이름이지만, 이것이 예언서에 등장할 때에는 '모압사상'을 가진 이스라엘을 책망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즉 모압의 사상을 가진 자가 하나님 백성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 16:12 "모압 사람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무효하리로다" 불행하게도 현실 기독교회는 모압의 길을 걷고 있다(이사야 16장 참조).


3.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선고: 13~18


『 13 이에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15 그러므로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내 이름으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칼과 기근이 이 땅에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는 선지자들에 대하여 나 여호와가 이같이 이르노라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 16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인하여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입을 것인즉 그들을 장사할 자가 없을 것이요 그 아내와 그 아들과 그 딸도 그렇게 되리니 이는 내가 그들의 악을 그 위에 부음이니라 』


거짓 선지자들은 교만하게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평강을 주시리라"는 거짓말을 민중 속에서 외치고 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의 저 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이 아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시험해 보시려는 하나님의 악한 도구로 쓰이고 있다(신명기 13:1~5, 예레미야 23:15~40). 거짓 선지자들의 존재 이유자체가 공의의 심판을 앞두고 백성을 미혹해보기 위함이므로 거짓 선지자들에게는 처음부터 끝까지 참 말을 주시지 않는다. 언제나 하나님의 감동으로 말미암지 않은 말은 모두가 어두움이다. '복술'도 그러하고 '인간의 마음의 생각'도 그러하다. 거짓 선지자들의 말과는 반대로 하나님은 그들이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15절).


에덴동산 뱀의 사상은 거짓 선지자 계통을 타고 내려와 오늘날 교회와 세계에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사상을 퍼뜨리고 있다. 몇가지 예를 들면 '평화공존', '탈냉전', '전쟁종식', '사랑', '진리는 하나', '대화와 타협'이라는 정치-종교적 타이틀들이다. 성경은 분명히 북방환난을 말씀하고 있다(예레미야 1:13, 4:6~, 6:1~, 에스겔 1:4, 38:1~9). 또한 끝까지 전쟁이 있다는 것이다(다니엘 9:26~27). 그러나 종말의 거짓 선지자들은 평강(평화공존, 교회일치운동)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예레미야 6:14~15). 이런 자들은 새 일로 강하게 때려부수어야 한다. '평강'은 예수님께만 있으므로 그분만이 줄 수 있다(이사야 9:6. 누가복음 24:36. 요한복음 20:19,21,26. 로마서 16:20. 빌립보서 4:7. 골로세서 3:15. 데살로니가전서 5:23. 히브리서 7:2. 계시록 1:5). 그런데도 1,200만 한국교회가 일치-연합 운동과 평화공존으로만 나아가며 북방의 영적 대적들에게 이용당하고만 있으니 사명자들의 마음은 아프다!


『 17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끊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창상을 인하여 망함이라 18 내가 들에 나간즉 칼에 죽은 자요 내가 성에 들어간즉 기근으로 병든 자며 선지자나 제사장이나 다 땅에 두루 다니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도다 』


예레미야는 민족을 위하여 밤낮 울고 있다. 참 선지자는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인격)이 그의 선지자 된 생활에서 증표로 나타난다. 사단은 유다의 멸망을 기뻐하고 원하지만, 참 선지자는 민족을 사랑하기에 심판을 보고 원통히 여긴다.


• 예레미야 8:18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의 중심이 번뇌하도다"

• 예레미야 9: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

• 시편 119:136 "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 예레미야 52:6 "그 사월 구일에 성 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식물이 진하였더라"

• 스가랴 8:1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월의 금식과 오월의 금식과 칠월의 금식과 시월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가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실과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금식에 대하여...

시드기야 11년 4월 9일에 기근이 임하고 성이 함락(예레미야 39:2~).

시드기야 11년 5월 10일에 성이 불탐(예레미야 52:12~).

시드기야 11년 7월 그다랴 총독의 피살(예레미야 41:1~).

시드기야 9년 10월 10일에 성읍이 포위(예레미야 52:4)>.


• 예레미야애가 1:20 "여호와여 돌아보옵소서 내가 환난 중에서 마음이 괴롭고 마음이 번뇌하오니 나의 패역이 심히 큼이니이다 밖으로는 칼의 살륙이 있고 집에는 사망 같은 것이 있나이다"

• 예레미야애가 4:9 "칼에 죽은 자가 주려 죽은 자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이들이 찔림같이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이와 같은 참 선지자의 기도는 계속되고 있었다. 종말에도 이 민족과 세계를 위한 참 선지자들의 호소가 하늘에 쌓이고 있다(새일성가 9장).


4. 백성을 대표한 참 선지자의 애소(哀訴) : 19~22


『 19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받기를 기다려도 놀람을 보나이다 20 여호와여 우리가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21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마옵소서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 22 열방의 허무한 것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가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


선지자의 기도 내용은


①자기 백성의 참상(종말론적으로는 기독교가 당할 일)을 놓고 애소(哀訴)함이며(19절).

②민족(民族)의 죄를 책임지고 자복 기도함이다(19~21). 다니엘 9:3~23 참조.

③또한 자기 민족에게는 의(義)가 없으므로 하나님 자신의 의(義)를 위하여 돌아보아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21절).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 민족을 돌아보아 달라는 것이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구원해 달라는 것이다.


"영광의 위"란 하나님이 나타나기로 하신 성전의 장소를 가리킨다.

• 레위기 26:11 "내가 내 장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하지 아니할 것이며..."

• 예레미야 3:17 "그 때에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열방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치 아니할 것이며..."

• 예레미야 17:12 "영화로우신 보좌여 원시부터 높이 계시며 우리의 성소이시며..."


"언약을 기억하시고" 백성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했다. 선지자가 "언약"을 언급한 것은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을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이상 거기에 해당하는 축복과 약속을 필경 실현하실 것을 전제로 하여 간절히 기도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진실성과 변치 못하는 속성을 붙잡고 늘어지는 배짱있는 기도이다. 백성은 패역하여 주님 말씀을 어겼을 지라도 "이렇게 해주마" 하신 분이 당신이니까 당신 이름 위해서 하나님이 져달라는 것이다. 백성을 보면 축복의 언약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니, 아시고 약속한 당신이 당신 영광 위하여 이루어달라는 것이다.


시편 106:45 "저희를 위하여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많은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백성은 무지하여 범죄하나 선지자는 이렇게 눈물 흘리며 동족의 죄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하였다. 시대적인 대표 종의 사명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하나님이여 유다 민족을 미워하지 마시옵소서"(21절).


위의 말씀들을 볼 때, 유다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고난의 풀무를 통과한 유다를 통하여 예수님의 나라를 건설하시겠다는 것이다(스가랴 13:7~9).


• 22절 : "비를 내리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 예레미야 5:24 "또 너희 마음으로 우리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때를 따라 주시며 우리를 위하여 추수 기한을 정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자 말하지도 아니하니..."

- 예레미야 10:13 "그가 목소리를 발하신즉 하늘에 많은 물이 생기나니 그는 땅 끝에서 구름이 오르게 하시며 비를 위하여 번개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시거늘"

- 신명기 28: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만이 주관하신다. 고로 인간은 복종할 따름이다. 복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복종할 기회를 한 번 더 마련해 보고자 우는 자가 선지자이다. 하지만 이토록 간절한 선지자의 중보도 하나님의 뜻은 돌이킬 수 없었다(15장). 백성의 죄악이 하늘까지 사무쳤기 때문이다. 이같이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이 종말의 기독교에서 발생한다는 것이 예언서의 참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수치와 조롱을 당하는 예레미야의 신앙노선을 택할 것인가? 거짓된 다수의 '평강노선'을 따라갈 것인가?


21세기 대다수의 교회가 '사랑과 평화', '일치와 연합', '용서와 화해'를 말하며 뱀의 후손들에게까지 '하나 되자'며 손을 내밀고 있다. 우리 제단의 사상은 구시대적 발상이며 시대에 역행하며, 하나님의 뜻과도 반대된다며 멸시당하고 있다. 그러나 '평강노선'을 걷는 교회의 백성과 지도자들은 <면할 수 없는 재앙과 벌>로 떨어질 것을 15장에서 예언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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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13장 - 교회의 교만 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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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제목 : 〈북방환난과 새 시대 회복〉

예언연대 : B.C. 628년∼588년경


성경 : 예레미야 13장

제목 : 교회의 교만 죄


1. 썩은 띠(요대)의 비유와 멸망 : 1~11


『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베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 물에 두지 말라 하시기로 2 내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띠를 사서 내 허리에 띠니라 』


예레미야의 손에는 썩어서 아무 짝에도 쓸모 없게 된 "베띠"가 쥐어져 있다. 제사장들이 허리에 띠는 '모시 베띠'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세계 인류 중 유일하게 제사장적 사명을 가진 나라임을 상징해 준다. 이는 영화로운 직분이요, 귀한 사명이었다. 하지만 그 베띠를 이제 유브라데 강물에 던져 버리라 할 것인데, 이는 제사장 직분을 수행해야 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 죄악의 물에 빠져 버렸음을 비유한 것이다.


첫 아담도 선악과를 먹고 이 강가에서 버림을 당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우상숭배가 만연하던 갈대아 우르 땅에서 빼내시고 이 큰 강(유브라데)을 건너오게 하여 복을 주셨건만 그 자손들이 아담에게 물려받은 원죄의 패역으로 말미암아 아담같이 다시 그 강가에 버림을 당하게 되는 형편이 "베띠"의 묵시로 나타난 것이다.


인류 종말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원죄(패역)의 본질을 해결치 못한다면 아담같이 망하되 유대교, 개신교, 가톨릭 할 것 없이 모두 그 육체가 바벨론의 손에 붙여져 죽게 된다(계시록 13장, 18장). 신령하고 은비(隱秘)한 하늘의 하나님의 새 일(민수기 16:30. 이사야 42:9, 43:19, 48:6. 예레미야 31:22) 양식을 버리고 땅의 것만 좇아 살다 보면 반드시 죄악의 땅과 함께 썩어버린다. 6절에 가보니 베띠는 썩어 버렸다. '썩은 베띠'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것으로 '짠 맛을 잃은 소금'과도 같다(마태복음 5:13). '썩은 베띠'가 다시 건져진들 그것이 당할 일은 불에 태워지거나 버려져 짓밟히는 일뿐이다. "베"라는 옷감은 성경에서 '정결함'을 상징하는데(사무엘상 2:18), 거룩한 제사장들의 옷감과 허리 띠, 속옷 등의 재료에는 전부 '베'가 쓰여졌다(출애굽기 28:39,42, 39:27. 레위기 6:10 - 세마포는 베옷이다).


1~2절 본문에서 여호와께서는 "베띠"를 사서 물가에 두지 말고 허리에 띠되 "값을 주고 산 띠"로 하라고 명령하신다. 이 명령에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민 가운데서 구별하여 내실 때에 거저 구원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시되 감히 측량할 수 없는 고귀한 보배피로 그들을 사시고 거룩히 구별하셨음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띠를 사서"라는 표현은 당신 생명으로 '우리'를 사셨다는 것이다(이사야 43:3. 에배소서 1:7.  계시록 5:9~10. 이사야 53:4~10).


선지자에게 그 띠를 "허리에 띠라"고 명하신데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허리는 몸에 부과되는 모든 힘을 받아내는 제1기둥이다. 운동선수를 보라! 여타부위의 부상은 곧잘 극복해내지만, 허리가 상하는 경우에는 선수로서의 생명이 바로 끝장나고 만다. 모든 힘이 허리에서 나오고 있다는 증거이다. 어떤 일에 최선을 다하거나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려나가는 모습을 비유할 때 흔히들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표현을 쓰는 것도 허리의 중요함과 허리띠의 요긴함을 잘 나타내 준다.


"베띠를 허리에 두른다"는 것은 그 띠를 주인이 직접 취해 자기의 몸에 밀착시킴을 의미한다. 즉 띠를 사용하는 자가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취했다'는 자체에서 큰 의미가 발생한다. 몸 아닌 것이 몸에 와 붙어 몸의 일부처럼 쓰여지기 때문이다. 베띠가 주인에게 취해지는 순간부터 주인의 가장 요긴한 부분을 두름과 동시에, 이제 그 띠가 없으면 주인의 옷매무새가 흐트러질 뿐 아니라 힘을 써서 일을 하려할 때도 옹골지게 해낼 수가 없는 점... 이 점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당신과의 관계를 '베띠의 묵시'로 보이신 이유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세상 백성 중에서도 특별히 구별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취하여 자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당신 몸의 일부와 같이 귀히 여겨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허리띠를 졸라메시고 당신의 영광된 구속사업을 성실히 수행하셨던 것이다. 타락된 땅을 재개발하는 건설주가 이 대사업(이사야 58:12~)에서 특별히 유대 민족을 허리띠로 삼은 사실은 그들에게 있어 얼마나 큰 영광인가?


에덴동산이 얼마나 행복한 장소였던가를 생각해 보자! 하지만 불순종의 죄로 인하여 저주가 에덴을 삼켜 버렸다. 이 저주로 떨어진 동산을 회복시키는데 있어 빛의 도구로 불리움을 받았다면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할 터인데, 유대인은 아담과 같이 뱀의 말을 따라가 또 다시 범죄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때 하나님은 본문의 '베띠 비유'인 70년간의 바벨론 유수(幽囚)를 선언하신 것이다.


지금 이 시대! 피로 산 세계 기독교회를 향해 이 말씀을 다시 예언하라는 것! 이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시다(계시록 10:7~11). 그러나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한탄스런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교단에서 배척받아 더러워진 위치에서도 죽을 자들로 깨달아 살게 하기 위해 목숨바쳐 예언을 증거하는 단체가 '우리'이다. 우리가 외치는 이 예언의 말씀에 끝까지 순종치 않으면 구약 솔로몬성전의 운명처럼, 기독교 종말의 운명도 "썩은 베띠"와 같이 되고 말 것이다. 어떤 이름난 목사가 다음과 같이 설교하는 걸 들어보았다.


"소경이 낭떠러지로 가는 것을 보면서 무관심하다거나 기어 풀린 차가 뒤로 밀려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어린아이를 덮치려 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냥 지나친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다."


맞다! 그건 인간이 아니라 살인자이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일 게다. 본 제단은 살려보려는 마음 하나에서 다시 예언하고 있다. '후 3년 반'이라는 낭떠러지로 달려가는 교회! '북방환난'이라는 기어 풀린 자동차에 치어 죽을 운명의 교회! 이러한 교회들을 향해 생명의 경고를 외치고 있는 것이다. 한 생명이라도 이 책의 말씀을 읽고 깨달아 돌이킨다면 감사하고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다. 계시록 9:14~ 정해진 년, 월, 일, 시에 유브라데 강가에서는 3차 전쟁이 발발할 것이며, 또한 동일한 장소 유브라데 강가에서 최후의 대중선악전쟁인 아마겟돈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계시록 16:12~). "유브라데"는 구약이건 종말이건 '썩을 자'가 모여드는 심판 장소인 것이다.


하나님은 선민에게 거룩한 율법을 주셨으나 백성은 1,000년도 채 못되어 타락하여 북방 칼에 붙여질 수밖에 없었던 구약종말의 형편처럼, 거룩한 성령께서 단장시켜 주시고 신령한 은사를 부어주신 기독교 역시 2,000년이 채 못되어 타락하고 있다. 이제 남은 일은 본문의 예언대로 다시금 북방 칼에 붙여져 심판받는 일뿐이다. 피로 산 백성에게 이와 같이 행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해 보라! 그 심정을 안다면 어찌 다시 예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3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4 너는 사서 네 허리에 띤 띠를 가지고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거기서 그것을 바위 틈에 감추라 하시기로 5 내가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가서 그것을 유브라데 물가에 감추니라 』


선지자가 실제로 "유브라데"로 간 것이 아니다. 13장은 묵시 중에 진행되는 일이다. 베띠를 "바위 틈에 감춤"은 하나의 행동계시(行動啓示)로서 유대 민족이 바벨론에 사로잡혀 갈 비천(卑賤)한 처지를 묘사하고 있다. 본문의 "물가"라는 표현에서 "물"이란 죄악과 사단의 권세가 횡행하는 현 세상을 상징한다. 계시록 12:15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하되..." 이 여자는 해를 입은 촛대교회인데 사단이 아무리 강한 권세로 공격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게 될 것으로 계시되어 있다. 계시록 17:1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17:15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큰 음녀가 앉은 "물"은 '바벨 사상'으로 점령된 말세의 죄악세상을 가리킨다.


사단이 역사적으로 이용하는 강대국들은 7머리 10뿔인데, 하나같이 짐승의 마음을 받은 국가들이다. 그러나 미련하게도 유대민족의 시드기야 정권은 출애굽하여 나온 첫 번째 짐승 '애굽'을 의뢰하다가(에스겔 17장) 셋째 짐승인 '바벨론'에게 눈알이 뽑혀 잡혀가고 말았다(예레미야 39장). 하나님의 교회가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 물"에 거할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준 사건이다. 지금 기독교회는 무엇을,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가? 북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의지하고 있는가? 북핵 문제를 막아보려고 다자간 협상, 즉 중국, 러시아, 일본을 의지하는가? 만일 교회가 세상 정치꾼들과 같이 이러한 노선을 택하여 기도한다면, 그 종국은 시드기야의 운명과 같이 될 것이다.


"바위 틈에 감추라" 기본적으로 바위 위의 갈라진 틈을 가리키나, 여러 바위나 절벽 등에 나 있는 사이공간을 뜻하기도 한다. 바위는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피신할 '피난처'로 쓰였지만, 본문에서는 예레미야의 허리에 띤 띠를 숨겨 둘 장소 이상의 뜻은 없다. 고로 "감추라" 하신 것에는 '보호'의 뜻은 없고, 오직 하나님의 '관계단절'의 의미뿐이다.


『 6 여러 날 후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유브라데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하여 거기 감추게 한 띠를 취하라 하시기로 7 내가 유브라데로 가서 그 감추었던 곳을 파고 띠를 취하니 띠가 썩어서 쓸데없이 되었더라 』


"여러 날 후에" 띠가 "썩어서 쓸데없이 된 것"을 보게 된다. "썩은 것"은 유대민족의 영광이 쇠락했음을 비유한다. 유대인은 "띠"와 같이 하나님께 밀착되어 있었고, 하나님은 그들만의 하나님이셨다(아모스 3:1~2). 그러나 저희가 충성치 않으므로 이렇게 "썩어져 쓸데없는" 꼴이 되고 말았다. 예루살렘 교회가 세속에 물들어 버릴 때 아무리 하나님이 값 주고 산 띠라도 '70년간' 내어버림을 당한다는 뜻이다. 이는 자연스런 결과로서 종말의 우리에게도 귀중한 교훈이 된다. 예레미야의 띠가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벨을 상징하는 '유브라데 강가'에 있었기에 썩는 것은 당연하다(이사야 8:6~8).


교회가 세상 것에 마음을 두면 그 마음이 세상 것에 의해 부패하기 마련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우리 육신이 세상에 거하는데 어찌 세상 물을 초월하랴" 말하지만 그렇지 않다. 바닷물은 짜지만 살아 있는 고기의 살은 결코 소금물에 절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죽은 고기에는 살은 짭잘하게 소금기가 베어든다. 영적으로도 똑같다. 우리 인간은 세상에 속하여 살아도 말씀(생명)과 동행하는 한, 세상 물이 우리를 점령할 수 없는 법이다. 유대민족은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마음에 품어들였다. 또한 주변 물질문명 강대국의 힘(원조)을 동경하며 기웃거렸다. 그 결과 하나님은 떠나시고 유다는 죄악 문명에 물들게 된 것이다.


계시록 18:4 "내 백성아 거기(바벨론)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현재의 세계 교회도 유대 교회의 종말과 같이 썩어짐으로 나아가고 있다. 정치협상, 종교협상의 쑥물을 단물인 줄로 착각하여(이사야 5:20) 북방과 그가 이용하는 거짓 선지의 거짓 평화 앞에 대다수가 쓰러지고 말았다(이사야 51:17~. 예레미야 23:15~. 계시록 9:1~). 세계적으로는 W.C.C.(세계교회협의회), 국내적으로는 K.N.C.C.(한국기독교협의회)가 그러하다. 구약 유대민족은 하나님을 떠난 협상죄로 인하여 70년(예레미야 25:11, 29:10)간 북방에 잡혀가서 모든 육체가 썩어졌다가 70년 후에 스룹바벨 단체가 약 5만명을 이끌고 돌아와서야(에스라 2~3장) 무너진 솔로몬성전 터에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였다(에스라 6:14~15).


이렇게 구약 종말의 선민이 받은 심판이 예레미야 서책을 통하여 21세기의 우리에게까지 전달된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종말을 향해 살아있는 이 교훈을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가 깨달아 예수님 재림 시(時) 예언의 등불을(베드로후서 1:19. 마태복음 25:1~13) 높이 들지 못하면 계시록 13장같은 대 환난에 빠져서 모든 육체가 노아 때와 같이(마태복음 24:37), 롯의 때와 같이(누가복음 17:28~) 심판받아 죽게 된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표면적 바벨론을 치고 나온 구약 스룹바벨의 역사가 인간 종말에도 이면화되어 성취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위하여 예정해 두신 제단이 다리오 왕 2년 9월 24일에 지대 놓은 스룹바벨 제단이다(학개서 2:6~7, 10, 18, 20~23. 스가랴 4:9).


『 8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유다의 교만과 예루살렘의 큰 교만을 이같이 썩게 하리라 10 이 악한 백성이 내 말 듣기를 거절하고 그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그를 섬기며 그에게 절하니 그들이 이 띠의 쓸데 없음같이 되리라 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띠가 사람의 허리에 속함같이 내가 이스라엘 온 집과 유다 온 집으로 내게 속하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이 되게 하며 내 이름과 칭예(稱譽)와 영광이 되게 하려 하였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


이제 하나님께서 "베띠"의 계시를 해석해 주신다. "교만"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영예' 혹은 '아름다운 장식'을 의미한다. 11절의 "이름", "칭예", "영광"이 바로 그 뜻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택함 받으므로 모든 민족 가운데 주님의 자랑거리가 되기로 작정된 민족이다. 하지만 그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영예는 곤두박질 치고 말았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교만을 썩게 하리라" 이렇게 징계하심은 사랑 때문이다(히브리서 12:8~). ① 세력을 인한 교만은 꺽는다 하셨고(레 26:19). ②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 하셨다(잠언 16:18, 야고보서 4:6). 이렇게 유다가 썩어 무익하게 되기까지 '다른 신'을 좇으며 강퍅한 대로 행하게 된 것은 아담 때부터 내려오는 뼛골 속 '원죄' 때문이다.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긍휼을 한 몸에 받던 자라도 이처럼 '원죄'악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원죄 문제 해결책은 예수님의 피로 사신 새 일 교훈 속에 녹아져 고침 받는 길 외에는 없다(이사야 42:9, 이사야 43:1~5). 그러므로 새 언약으로 거듭난 기독교가 지상 천년안식을 앞두고 그곳에 들어가라고 주신 말씀인 '새 일'을 멸시한다는 것은 "썩은 베띠"의 운명을 자초하는 어리석음이다.


이사야 40: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여호와 앞에서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니다. 유다는 열방 어떤 민족보다도 우등한 자리에 있었으나 불순종으로 인하여 가장 비천한 신세(포로민)가 되었다.


2. 포도주의 비유와 장래 고난 : 12~17


『 12 그러므로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 하셨다 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 하리니 13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거민과 다윗의 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


"포도주"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육체가 먹는 포도나무 열매와 포도주가 있고(창세기 9:20~27, 누가복음 22:17~18), 다음으로는 영혼이 먹는 극상품 포도나무와 포도주가 있다(이사야 5:2, 25:6~8, 55:1~. 요한복음 15:1~). 셋째로는 영혼이 먹되 먹고 죽는 사단의 거짓말 곧 진노의 포도주가 있다(예레미야 51:7. 계시록 14:18~20, 17:2, 19:15).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차리라" 여기서는 세 번째 뜻으로 쓰였다. 교회에 죄악이 가득 차게 됨에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 또한 가득 차게 되는 형편을 비유한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되는 것은 끝까지 회개치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죄악 가운데) 내어버려 두셨기 때문이다(로마서 1:24,26,28). 그러나 교만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조롱하기를 "모든 병이 포도주로 찰 줄을 우리가 어찌 알지 못하리요"라고 한다. 불신앙의 무리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평이(平易)한 교훈에 감춰진 신령한 뜻을 깨닫지 못하므로 조롱하게 된다. 말씀을 조롱하는 것은 곧 멸망케 될 자들이 상습적으로 범하는 죄악이다.


예레미야 22: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22 네 목자들은 다 바람에 삼키울 것이요 너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로잡혀 가리니 그 때에 네가 반드시 네 모든 악을 인하여 수치와 욕을 당하리라"


이처럼 말씀이 사람되어 오셨어도 유대인들은 청종치 않았다. 요한복음 7: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그러나 진정 율법을 모르는 자는 이 말을 지껄인 자신들(바리새인)이었다. 진리를 오해하여 발설한 저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갔기에 바리새인은 지옥의 아랫목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요한복음 7:27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천만에... 그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이 안다 하는 대로 예수님이 목수 요셉의 아들이었으면 좋겠거니와... 예수님은 히브리서 7:2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하신 바대로 예수님은 이 세상을 초월한 곳에서 오신 분이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의 교만은 '무지의 강가'에서 제 잘난 줄 알고 물장구치는 어린아이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요한복음 9장에서도 예수님께 고침받은 한 소경이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라는 멋진 신앙고백을 하였지만 유대인들은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며 교권을 행사하여 그를 쫓아내었다. 이렇게 유대교권이 범했던 연속적인 교만의 죄들은 오늘날에도 자칭 정통, 장자 교단이라고 하는 계층에서 반복되고 있는 듯하다. 어쨌든 당대 유대나라는 이처럼 부패했었다. 창조주를 멸시하고 내어쫓는 지경까지 부패하고도 멸망치 않을 나라가 어디 있으랴! 죄악이 관영한 뒤에는 하나님의 벌(심판)이 임하는 법이다. 이와 같은 역사를 상고할 때, 오늘날의 기독교는 겸손한 마음으로 교회 내의 행위들을 살펴야 할 것이다.


『 14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간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관용치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됨" 유대민족이 내란으로 인하여 망할 것을 의미한다. 육체적인 술취함은 시간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깨어나게 되지만 사단의 영적 미혹에 취하면 인간의 힘으로는 깨어날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사야 51:21절에 "그러므로 너 곤고하며 포도주가 아니라도 취한 자여 이 말을 들으라" 하셨으며, 여기서 '이 말'이란 선지서(예언서)의 내용을 뜻한다. 인간종말에 '살 길'은 예언서를 읽고 듣고 지키는 일뿐이다(계시록 1:3). 이렇게 해야할 자는 이방인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피로 거듭난 교회'라는 점을 명심하라! 이제 황충떼의 환난(계시록 9:3~5)이 일어나면 교회 내부에서부터 충돌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일본귀신이 교회를 치고 들어오니 교회 내부로부터 분열이 났고(옥중성도 vs 신사참배), 공산당 귀신이 교회를 치고들어올 때(W.C.C.)도 교회가 두 동강 났었다(에큐메니칼 지향의 진보교단 vs 보수교단). 포도주병에 대한 단순한 진리를 깨닫지 못했던 유대 민족이 결국 70년간의 산 지옥을 경험한 것처럼(예레미야 39:1~11)... 예언의 내용을 읽고도 깨닫지 못하고, 고하고 들려줘도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면 7배나 강한 산 지옥 "후 3년 반"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것이 본문에 담긴 종말의 비밀이다.


『 15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


"들을 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라는 하나님의 부탁이다. 어찌하여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탁하시는가? 살려주고픈 사랑이다. 힘 세신 분이 강권으로 살리면 될 것 아닌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자기의 전 생애를 바쳐 순종하기 전에는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인간 스스로 알 수도 없고, 알아서 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는 주님이 정하신 순서가 있다. 다음과 같은 자세가 준비된 사람에게만 주님의 뜻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7:17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듣고 판단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즉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 칠 때라야 비로소 주의 뜻이 계시된다는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만한 유대교권은 자기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자세가 없음은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예수님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우리에게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였던 것이다. '교만의 극치'이다.


• 마태복음 12:38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 마태복음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 마가복음 8: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이러한 교만 앞에서 예수님은 마음 속 깊이 탄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마가복음 8:12). 그럼에도 표적을 보여달라는 주문은 끊이지를 않았다. 누가복음 11: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본 의미를 상실한 채) 강도의 굴혈이 된 것을 보시고 성전정화를 행하셨을 때에도 교만한 유대인들은 이것이 주께서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시편 69:9. 요한복음 2:19)인 줄을 깨닫지 못하고 요한복음 2:18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라고 말하는 교만함을 보였다. 마귀의 자식들에게는 도무지 각성하는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표적 보는 것 자체'는 영생으로 들어가는 열쇠가 될 수 없다. 이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증명되고 있다.


요한복음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12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이 표적을 행하셨을 때 무리가 보인 최초의 반응은 그럴 듯했다. 요한복음 6: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나 이들은 메시야가 왜,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를 알고픈 마음이 없었다. 단순히 자기들에게 빵 좀 주었다 해서 예수로 그 자리에서 임금을 삼으려 했던 것이다.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한복음 6:15).


빵을 얻어 먹음과 동시에 큰 이적을 체험한 유대인들은 그들의 탁월한 장사꾼적 기질을 발동했을 것이다. 그 누구도 행할 수 없는 능력의 소유자가 자기들의 손 닿는 곳 가까이에 있으니 놓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분께만 붙어 있으면 빵조각은 확보되겠구나라는 계산이 돌아가던 터였을 것이다. 그런 그들이 거기서 그분을 놓칠 수야 없지 않겠는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신 예수를 찾아 하루동안 방황했던 그들은 이튿날 예수를 다시 만나게 되자 '찾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알기나 하냐'는 듯 원망 섞인 탄성을 쏟아낸다.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


그들이 예수를 애타게 찾았던 것은 예수와 함께 진리를 위해 순교하기 위해서였던가? 그것이 아니었음이 예수님의 다음 답변에서 드러나고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이 말을 들은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느냐고 또다시 반문했고, 주님은 이에 이렇게 답하셨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여기서 웃지 못할 희극이 연출된다. 독자인 성도여! 당신이 그 자리에 있었어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을까? 자문해보기 바란다.


요한복음 6: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지금껏 행해졌던 질문중에 가장 우문(愚問)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지금껏 보았던 이적은 다 무엇이던가? 무엇이었기에 또 표적을 찾는 것일까? 돈을 주고 이렇게 질문하라 해도 정상인이면 할 수 없는 질문을 이리도 천연덕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무지(無知)가 오늘날 세계도처에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무지한 백성들을 믿게 하기 위하여 이적과 기사를 보여주신들 무리의 반응이란 이토록 어처구니가 없는 결과뿐 이었으니, 당시 안타까운 예수님의 마음을 어찌 우리가 짐작이나 하겠는가!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아무리 표적을 보여준들 택한 자 외에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정답이다. 주님은 불택자들을 향해 요한복음 6:36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셨고, 이미 요한복음 4:4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하며 책망하신 바가 있다.


표적을 보이라 요구하는 유대인들의 교만한 모습을 신약에서 찾아보았다. 유대인은 지겹도록 요구했고 예수님은 이에 다 응해주셨다. 그러나 결론은 '보고도 믿을 수가 없다'로 귀결되었다. 이렇게 되는 것은 다음 말씀이 응하기 위함이다.


요한복음 12: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38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이사야 53:1~3)


위에서 언급한 유대인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거듭난 우리의 모습임을 그 누가 깨달을까?


『 15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


15절 말씀은 바로 거듭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우리가 구약과 2,000년 전 유대교회를 상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주신 예언서 속에 담겨진 주님의 심정을 더 잘 느끼기 위함이다. 15절 말씀을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음이 곧 교만임을 알 수가 있다. 교만을 떠나려면 먼저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마태복음 18:2~4).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것은 <스스로를 의롭게 여기는 교만>에서 비롯된다(요한복음 9:34. 누가복음 18:11~). 또한 <죄악을 사랑하여 단호히 끊어버리지 못함>도 숨은 교만의 범주에 들어간다(시편 64:6~7. 이사야 5:18~23).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이사야 선지자도 백성을 향하여 주님의 심정을 대언할 때 이사야 46:12 "마음이 완악하여 의에서 멀리 떠난 너희여 나를 들으라" 하였으니 진실한 선지자들을 통해서 우리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다.


『 16 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흑암한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흑암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


말씀을 들려주어도 끝끝내 회개치 않는 자의 앞길은 흑암 뿐이다. 흑암은 세 가지 단계를 거치며 점점 극심해진다.


① 1단계는 하나님께서 불순종자에게 "흑암을 일으키는" 단계이다. "흑암"은 재앙을 비유하는데 그것을 "일으키신다" 하심은 하나님께서 회개치 않는 죄인에게 재앙 내리는 일에 착수하시는 단계를 말한다.


② 2단계는 "발이 흑암한 산에 거치는" 단계이다. 회개치 않는 죄인에게 재앙이 첩첩이 계속되므로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헤쳐나갈 수 없는 상태로 치달음을 가리킨다. 이는 마치 밤중에 길 모르는 자가 첩첩산중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꼴과 같다.


③ 3단계는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흑암이 되는" 단계이다. 자기들로서는 "빛"을 바랐던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와 반대로 "사망"에 이르는 "그늘"(재앙)을 조성하신다. 즉 일이 그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치명적(致命的) 상황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이 상태는 하나님의 간섭으로 오는 불가항력(不可抗力)의 앙화(殃禍)이기에 피하려 한들 피해볼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아모스 5:18~27). 이렇게 된 자들을 죽여 버리기 위하여 내보내는 무리가 바로 '북방 짐승 세력'이다. 오늘날에는 '북방 무신론'의 무리라고 할 수 있다(7째 짐승에서 난 '작은 뿔'과 '10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 피할 수 없는 재앙이 오기 전, 즉 기회가 있을 때 어서 돌이켜 회개하라는 것이다. 종말에도 무서운 흑암세계 '후 3년 반'이 오기 전 자기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들만 살아남을 수 있다. 일찍이 이 길을 택한 자들이 바로 144,000명의 기름 예비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이며, 마지막에 가까스로 이 길로 접어드는 자들이 바로 세계적인 '흰 무리'이다.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자들은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 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하신 처지(대환난)로 떨어지게 된다(이사야 8:21~22 = 미련한 다섯 처녀).


『 17 너희가 이를 듣지 아니하면 나의 심령이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여호와의 양무리가 사로잡힘을 인하여 눈물을 흘려 통곡하리라 』


"너희 교만을 인하여 은근히 곡할 것이며" 선지자는 -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동족의 불순종(교만)으로 인하여 - 기도하는 중에 은근히 곡하게 된다. 선지자의 마음 속에는 이처럼 자기 백성을 아끼는 사랑이 흐르고 있다. 내 편을 사랑하는 일은 쉬워도 나를 대적하는 교만한 자를 사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교만'이란 말은 높아짐을 의미하는데(욥기 33:17. 다니엘 4:37), 여기서는 스스로 마음이 높아져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무시하는 교회적인 죄악을 지적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자기 백성이 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회가 남아 있을 때, 유다가 어서 회개하여 살기를 원했고, 다시금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기를 원했던 것이다.


백성을 위하는 뜨거운 사랑이 있었기에 예레미야는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회개를 촉구했던 것이다. 선지자가 눈물을 흘린 까닭은 백성을 회개시키는 일에 있어서 자신의 할 수 있는 능력이 너무도 미약했기 때문이다. 눈물은 진실이다!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거짓말할 자는 마귀밖에 없다. 이렇게 선지자의 눈에서 진실하고 뜨거운 눈물이 떨어져도 백성은 교만하여 듣지 않았고, 그들의 굳은 마음은 풀릴 줄을 몰랐다. 이사야 48:4 "내가 알거니와 너는 완악하며 네 목의 힘줄은 무쇠요 네 이마는 놋이라" 이러한 고집때문에 세 차례에 걸쳐 바벨론에 잡혀간 것이었다(B.C.606, 598, 587). 하나님은 심판하고 싶어 안달나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래도록 참으시며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긍휼 자비가 넘치는 신이시다(베드로후서 3:8~9). 언제나 문제는 기회가 와도 회개치 못하는 인간 편에 있다.


이 시대의 기독교인들 역시 눈물로서 권고하여 다시 예언하는 자들의 촉구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종말의 교회는 5개월 환난(계시록 9:1~12)이 끝날 때까지 회개치 아니하면 '후 3년 반' 대 환난에 떨어져 멸망 당하기로 작정되어 있다. 역사는 주님의 작정대로 흘러갈 수밖에 없음을 70년 포로기간을 통해 확인한 바 있으니(예레미야 25:11, 29:10), 계시록 9~13장까지 기록된 말씀이 주님의 작정인 줄 믿는다면 지금은 결코 잠잘 때가 아니라 계시록 10:7절의 말씀을 깨닫고 11절처럼 전해야 할 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을 진실로 믿는 자라면 자다가도 머리를 들 때가 지금이다!


3. 왕궁에 원수가 침입할 예언 : 18~21


『 18 너는 왕과 왕후에게 고하기를 스스로 낮추어 앉으라 관 곧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졌다 하라 19 남방의 성읍들이 봉쇄되고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 20 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 네가 받았던 떼, 네 아름다운 양 떼는 어디 있느뇨 21 너의 친구 삼았던 자를 그가 네 위에 수령으로 세우실 때에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너의 고통에 잡힘이 구로하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 』


이 부분은 끝끝내 회개치 않다가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가게 될 비참한 광경을 예언한 것이다. 이 예언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솔로몬 성전에 임한 심판은 모두가 '피로 산 은혜 교회'가 받을 심판을 미리 보여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① 왕과 왕후가 높은 자리에서 떨어짐(18절).

② 바벨론 군대의 습격을 당하여 남방 애굽 성읍들로 피난하려고 해본들, 허락되지 않으므로 결국 사로 잡혀감(19절).

③ 유대민족(양 떼)은 북방 끓는 가마솥 세력에 의해 통치를 받게 됨(20~21절).


유대민족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바벨론을 친구로 삼으려 한 적이 있었던 고로(20절), 바벨론 왕을 가리켜 "너의 친구"로 표현한 것이다. 21세기에도 이와 동일한 현상이 영적 유다의 정치와 교회 안에서 발견되고 있다. 교회가 앞장서서 북방 무신론 국가와 손을 잡고 그들의 '거짓평화'에 동조해주고 있다는 것이다(K.N.C.C.계열). 북한과 '한 민족'임을 운운하면서 (뒷전으로) 악한 일을 도모하는 그들을 지원해주고, 이제는 아예 공개적으로 손을 내뻗어 '민족공조'를 이루자는 저들의 말에 맞장구를 치기까지 하는데..., 한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2003년 4월 23일자 연합뉴스 기사 한 편을 소개한다.




북한이 최근 '미국의 대북 선제타격 기도'를 주장하며 <민족 대단결>을 눈에 띄게 강조하고 있다. 미국이 남북 간 화해와 협력을 저해, 남북대결을 고취시키고 있으며 `북침 핵전쟁'을 노리고 있는 만큼 <민족공조>를 통해 이를 타개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북한의 평양방송은 22일 `민족 대단결은 평화와 통일을 위한 절박한 요구' 제하의 보도물을 통해 미국의 대북 선제타격 기도가 실천단계에 들어서고 있다며 "민족의 대단결은 오늘 민족의 자주권과 생존권, 나라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가장 절박한 과업"이라고 강조했다. 평양방송은 이어 "미제가 북침 핵전쟁을 도발하면 그 피해는 북과 남의 우리 민족이 당하게 된다"며 "지금은 사상과 제도, 이념을 논하거나 민족공조를 외면할 때가 아니다"고 말했다.


방송은 또 "조선반도에서 외세와 공조한다는 것은 나라의 평화와 민족의 안전을 돌이킬 수 없는 위험에 빠뜨리는 길"이라고 지적했다. 평양방송은 이에 앞서 지난 20일과 21일 잇달아 미국이 `조국통일의 이정표'인 6.15공동선언의 이행을 가로막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북 `핵전쟁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조선반도에서의 대결구도는 북과 남의 조선민족 대 미국"이라고 규정했다.


특히 북한방송은 17일 동족끼리 싸우면 어부지리를 얻는 것은 외세 뿐이라며 `우리 민족끼리'의 이념을 지켜 나갈 것을 촉구한 데 이어 18일에는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지배정책에 민족 공동으로 맞서야 한다고 강조, '민족 대단결'을 요구했다.


북한이 '민족 대단결'을 줄기차게 강조하는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민족 대단결 5대 방침' 제시 5주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 국방위원장은 지난 98년 4월 18일 `남북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50주년 기념 중앙토론회에 서한을 보내 민족자주 원칙 견지, 남북관계 개선, 외세의 지배와 반 통일세력 반대 등을 골자로 하는 `민족 대단결 5대 방침'을 제시했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베이징에서 열리는 `북핵 3자회담'에 북한측이 남측의 참여를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가운데 남북장관급회담 개최를 앞두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북측은 오는 27일부터 평양에서 제10차 남북 장관급 회담을 개최할 것을 제의하는 전화통지문에서 <민족공조>로 우리 민족끼리 남북관계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 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 출처 : 서울=연합뉴스, 2003. 4. 23 >




'한 겨레'이니 '한 민족'이니 하는 말의 이면에는 진정한 동포애와 통일을 위한 염원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 그들이 말하는 '평화', '한 민족', '통일'의 개념은 남한 백성의 그것과는 판이하다. 뱀은 원래 혓바닥이 두 개이며, 뱀이 들어쓰는 공산주의자들은 '용어혼란전술'의 천재들이다. 북한과 남한 내의 좌익세력들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의 실체'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다. 예언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남한이 친구 삼은 자 북한 및 좌익들의 용어 개념

변혁(變革)

개혁(改革)

북한 조선말사전 :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낳게 하는 급격한 변화나 전화를 일으키는 것' (고로 그들이 변혁, 개혁하자고 하는 것은 '혁명'하자는 것의 또다른 표현일 뿐이다).

민주(民主)

'민족해방 민중 민주주의 혁명론'을 지지하는 남한 NL계열 운동권학생들은 한국사회의 구조를 ① 미제국주의와 결탁한 지주, 매판 자본가, 반동 관료들을 한 축,  ② 노동자, 농민, 도시 부르주아, 청년, 학생, 지식인, 민족자본가를 또 다른 한 축으로 분류한다. 따라서 저들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국가'란 ②의 세력이 ①의 세력을 몰아내고 백성이 된 '사회주의 국가'임을 알아야 한다. 저들은 남한 정부가 미제국주의와 그 앞잡이들에 의해 유지되는 식민지적 사회 정체제도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전제한다. 이 구조는 오직 혁명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민주''民' 곧 백성이란 위의 ②번의 '붉은 세력'과 그 친화세력들로 제한된 표현임을 알고 속지 말아야 하는데, 이미 때는 늦었다. '친일파 청산'을 사회 이슈화시키고 '친북좌익활동'을 정당화하며 배고픈 북한 백성의 인권문제에 대해서 나몰라라 하는 정책을 쓰는 자들이 모두 저 출신들이다.


참고로, 'NL'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며 북한의 대남혁명론인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 혁명'에 입각하여 한국사회를 공산화하려는 세력이다. 이들의 명칭은 다양한데, NLPDR파, NL(민족해방)파, '주사파', '친북운동세력' 등으로 불려지며 국내 좌익권 중에서도 가장 큰 세력을 이루고 있다. 이 출신들이 정치권에 포진하여 2004.4.15 총선에 대거 진출하고 있다. 저들이 국회장악에 성공하면 우선 '국가보안법철폐''주한미군완전철수'부터 진행시킬 것이며, 남한 민중과 교회 성도들은 저들이 장악한 매스컴의 영향력과 빛을 가장한 궤휼에 속아 더욱더 타락케 될 것이다.

민중(民衆)

민주(民主)

민족(民族)

북한 공산당은 남한의 정치기구를 송두리째 전복시키기 위한, 소위 <민중, 민주, 민족 혁명운동>이라는 것을 한다. 그런데 이것이 남한 내 자생적 공산주의자들과 친북세력들에 의해 '한국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어 부드러우면서도 마치 '자유민주주의의 한 노선'인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어 이미 용어혼란전술에 성공하고 있다. 거물간첩 송두율이 '민주화 투사'로   초대되는 것이나, 좌익들의 일체행위가 이미 '민주화 운동'으로 각인되어 있는 실정이다.


저들은 이들은 모든 기업체의 노동자에게 현실적으로 가장 구미가 당기는 '임금인상 슬로건'을 내세워 선동함으로써 노사분규를 일으키게 한 주체세력이며, 5공에서 6공으로 전환되는 시기의 취약점을 이용하여, 노사분규를 극대화시키며 분신자살을 사주한 세력인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당시 순진한 대학생들이 마귀미혹에 속아 줄줄이 분신하던 사건은 생각하기도 싫다. 무신론 공산주의 사상은 사람의 생명을 도구화하는 잔인한 사상으로 마귀에게 속한 사상이다(요한복음 8:44). 이들은 말단 세포적인 방침으로 청와대서부터 남한 사회 어느 곳이든 다 주둔해 있다.


이 운동을 하는 자들은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계급을 <매판독점자본가, 신중산계급, 중소상공업자, 부농, 노동자, 빈농, 영세상인 및 도시 빈민>의 7계급으로 나누며 지배계급은 <매판독점자본가, 신중산계급, 중소상공업자, 부농계급>이며, 나머지 <노동자계급, 빈농, 영세상인 및 도시빈민>을 피지배계급으로 본다. 혁명적 민중은 '노동자, 빈농, 영세상인 및 도시빈민'의 3계급이지만, 실천적으로는 여기서 다시 '상층노동자' 계급을 제외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즉 '가지지 못한 자'를 '민중'으로 보며, 한국사회를 크게 2계급으로 나누어 하부층이 상부층을 타도하는 것을 '혁명'으로 본다. 따라서 진보계열 신문이나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무리들이 즐겨쓰는 '민주, 민중, 민족'이라는 용어에는 이 붉은 무리의 철학이 상당히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학생때부터 전경에게 쫓겨다니며 감옥에 드나들며 다져진 사상은 정치판에 들어가건 노동판에 들어가건 강하게 살아 있는 법이다. 방송도 믿지 말고, '평화'나 '민주'와 같은 단어도 듣지 말아야 할 시대이다. 성경이 아니고서는 한치 앞도 분별할 수 없이 속고마는 '혼란'의 시대가 지금이다.


본 선교회를 찾아온 한 탈북자의 진술을 들어보면 북한은 지도층이나 백성이나 '머지 않아 전쟁은 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국가발전'이나 '민생안정' 따위에는 큰 관심이 없다고 한다. "전쟁 나면 다 같이 파괴될 것인데, 국가발전에 더 많이 발전(투자)한 쪽이 어리석은 것 아니냐"는 생각이 당과 백성 사이에 만연해 있다 한다.


남한은 전쟁이 나면 피해가 큰 쪽은 이쪽이니 어찌하든 전쟁만은 막아보자는 쪽에서 통일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반면, 북한은 타락한 자본주의 체제를 까부수고 위대한 수령동지의 염원인 <남조선 인민의 해방>을 위한 통일을 이루어보자는 취지에서 움직이고 있으니, 남북한의 교류가 옳은 열매를 맺을 확률은 0% 인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모르면 전쟁이 두려워 그들(독사)의 협박에 순순히 응할 수밖에 없고, '남북통일축구'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운동을 통해서라도 긴장을 완화해 보려는 인본주의가 꽃피게 된다. 2002년 9월 7일에 열린 남북통일축구 경기장에는 태극기 반입이 철저히 저지됐다. '민족화합'이라는 속임수 이벤트를 위해 '민족의 얼' 태극기를 희생시킨 사건이다. 북한은 태극기를 분단의 상징으로 보고 있고, 민족화합의 걸림돌로 인식하고 있다. 저들 사상에 우리가 동조해준 꼴이 된 우습고 하심한 사건이었다. 북한이 굳이 ‘태극기가 있는 곳에서는 경기를 할 수 없다’고 고집하는 이유를 우리는 새겨볼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평양경기장에 인공기가 걸렸다고 해서 우리 측이 경기를 포기하겠는가? 남한은 절대 그렇게 못한다. 우리는 못하는 것들을 저들은 자신있게 한다. 북쪽의 사상은 철같이 강하며, 남한의 사상은 진흙같이 무르다는 뜻이다.


'한 민족', '한 핏줄'을 운운하며 '민족공조'를 외치는 것은 감정(민중선동)에 호소하는 북측 전술 중 하나임을 소개했다. '핏줄'을 논하자면 우리 모두가 노아의 후손으로서 인류 모두가 다 '한 핏줄' 아닌가? 400만이 살상된 6.25를 일으켜 놓고도 회개치 않는 그들이 무슨 '핏줄'을 알겠는가? 다 뱀의 소리일 뿐이다. 무신론 '짐승사상'이 망하고 예수의 나라가 오기로 작정된 이 마당에 '단일민족'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한 핏줄'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두가 마귀의 언어혼란전술에 불과한 것인데, 정치나 교회가 이를 분별 못하고 있으니 큰 일이다.


북방에 일곱째 머리 소련이 등장하면서부터는 이미 세계는 심판기로 접어든 것이다. 북한 역시 본질적으로 저들의 무신론-마르크스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고 출발한 나라로서 자본주의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하나님'이란 단어는 입에만 올려도 당장 총살형에 처해진다고 한다(2004년 현재 탈북자 ХХХ씨 증언). '한 겨레', '한 민족'을 운운하는 북한 지도부는 '한 민족', '한 겨레'의 목에 총칼을 들이 대고 피비린내를 풍긴 1950. 6. 25 동란을 아직까지 회개하지 않고 있다. 여전히 땅굴을 파고 있다. 400만을 희생시킨 전쟁을 벌여놓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그들은 결코 '한 민족', '한 겨레'가 아니다. 더구나 "신이 없다"는 그들의 사상은 영락없이 뱀의 사상이니 이 사상에 교회는 절대로 손을 잡아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에덴동산에 '뱀 한 마리'가 등장할 때 하나님이 6일간 아름답게 창조하신 에덴이 황무지로 변하였음을 기억하자. 오늘 저 북방의 무신론 정권은 그 뱀의 마지막 후손인데 어찌 그 입에서 나오는 평화공존(1958. 3. 18)과 민족공조라는 말이 참말일 수 있겠는가? 다니엘 9:26절 이하에는 장차 '한 왕'이 일어나서 끝까지 전쟁을 일으키다가 멸망할 것이 예언돼 있다. 또한 본문 13:21절에 "너의 친구 삼았던 자를 그가 네 위에 수령으로 세우실 때에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하셨다. 예언대로 구약 예루살렘 성전을 치러 '북방 군대'가 내려왔던 것처럼 이제 21세기의 타락한 기독교를 치러 '북방 군대'가 다시 한 번 내려올 것이다. 이것이 구약 종말을 통하여 인류 종말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모략과 오묘이다(이사야 46:10).


『 20 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 네가 받았던 떼, 네 아름다운 양 떼는 어디 있느뇨 21 너의 친구 삼았던 자를 그가 네 위에 수령으로 세우실 때에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너의 고통에 잡힘이 구로하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


회개치 않는 교만한 교회가 당할 '확실한 멸망'에 대한 예언이다. 이것을 뒤에서 다시 '구스인''표범'의 예로 설명하셨다. 구스인과 표범이 그 피부와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악에 익숙해져 있는 유다도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23절). 이유는 원죄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오랜 죄악의 관습에 물들어 타락하고 썩어져 이제는 '회개'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선과 악도 구별치 못하는 취한 백성이 된 것이다(이사야 5:20). 이같이 영적으로 취한 유다에게 다가올 일은 '멸망'뿐이다. 하나님이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초개처럼 유다 백성을 유랑자로 끌고 가시겠다는 것은 '멸망'시키겠다는 의미이다(24절).


멸망의 원인은 늘상 '한 가지'! 조상적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시편 51:5) 곧 패역뿐이다. 유다의 확실한 멸망을 말씀하실 때 한 번 더 유다의 죄악을 지적해 주시면서 그 멸망이 유다인에게는 아주 당연한 것임을 "분깃"이라는 표현으로 알리셨다.


다시 말하지만 멸망의 원인은 원죄(패역) 때문이며, 이 원죄로 말미암아 마땅히 의지해야 할 하나님보다 강대국가를 의지한 것이 멸망케 될 화를 자초한 것이다. 참 선지자가 외치는 진리의 말씀은 제 마음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버리고, 있지도 않는 '평강'을 외쳐대는 거짓 선지자들의 달콤한 유혹을 힘써 의지한 모습! 그 결과가 멸망이라는 것을 종말의 교회는 깨닫고 배우라는 것이다. 북방에서 오는 자들이야 제 욕심 이루려고 치러 오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유대인을 징계할 심문권을 맡겨 내려보내신 것이다.


에스겔 23:24 "그들이 병기와 병거와 수레와 크고 작은 방패를 이끌고 투구 쓴 군대를 거느리고 치러 와서 너를 에워쌀지라 내가 심문권을 그들에게 맡긴즉 그들이 그 심문권대로 너를 심문하리라"


독자들이여! 세계지도를 펴놓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저 북방의 무신론 공산국가들을 살펴보라! 주님이 그들에게 맡기신 심문권이 보이는가?


보인다면 당신은 말세종이요,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들의 심문을 피할 수 없는 자이다. 셈의 장막을 보라. 러시아, 카자흐스탄, 몽골, 중국, 북한... 모두가 사회주의(공산주의)가 휩쓸고 지나간 나라들뿐이다. 20세기 종말에 공산당이 나온 것은 '교회심문' 그 목적밖에 없다. 이제 심문당할 일만 남아 있다. 이 때 교회를 살려 보려는 마음을 가진 자라면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겔 편이요(왕권), 이 말에 감동을 받는 자들은 흰무리요(백성), 이도 저도 아닌 자들은 패역한 구약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대언자들을 배척하는 일에 동참했다가 멸망할 자들이다.


종말에 세계 교회를 향해 다시 예언하게 되는 144,000명은 예레미야서를 먹지 않을 수 없다. 먹지 않으면 순교자의 동무종으로서 길을 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1,260일은 선지자로서 슬픈 경고의 예언을 하고, 3일 반 동안은 제사장으로서 자기 생명을 바쳐 의로운 제물이 되었다가, 공중재림시 들림받아 '후 3년 반'이 지나면 만왕의 왕 예수님과 함께 지상에 강림함으로써 왕 노릇을 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대선지자, 대제사장, 만왕의 왕 삼직분을 완성하신 것같이,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던 종들(144,000)도 그의 가지로서 이 삼직분에 동참케 되는 것이다. 할렐루야!


4. 재난의 원인은 범죄에 있음 : 22~27


구스인의 피부색과 표범의 반점이 변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죄악도 주님께서 새 일로 고쳐주시는 그날까지 '패역'이라는 이름으로 계속될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 22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는고 하겠으나 네 죄악이 크므로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 23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


유대민족이 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가게 될 원인을 진술하고 있다. 원인은 그들의 죄악이 너무 크고 완고하다는 데 있다. 그들은 "악에 익숙"하여 강퍅하고 회개할 수 없는 정도의 상태로 접어 들었다 한다. 교회의 죄악상이 이쯤 되면 남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는 일뿐이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은 북방의 침략전 앞에 패전(敗戰)하여 나라가 당하게 될 모든 능욕이다. "발뒤꿈치가 상한다" 함은 신발이 없어서 발뒤꿈치가 드러남이니, 곧 맨발로 도망함과 잡혀감을 뜻한 표현이다(이사야 20:4~). 교회가 우상을 섬긴 죄(협상)와 회개 없는 예배(새일 멸시)로 인하여 육체 심판을 받게 되는데 있어서


먼저는 성도의 하체가 드러날 것이며

이사야 3:17~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성도의 볼기도 드러날 것이다.

이사야 20:4~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 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


성도의 부끄러운 것까지 보일 것이다.

이사야 47:2~3 "맷돌을 취하여 가루를 갈라 면박을 벗으며 치마를 걷어 다리를 드러내고 강을 건너라 네 살이 드러나고 네 부끄러운 것이 보일 것이라 내가 보수하되 사람을 아끼지 아니하리라"


『 24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초개같이 흩으리로다 2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네 응득(應得)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연고라 26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27 내가 너의 간음과 사특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행한 네 음행의 비루하고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뇨 』


유대민족이 비참하게 사로 잡혀가도 그들의 죄 때문인 고로 당연하다는 것을 두 차례나 강조하셨다. ① 그들이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초개같이 흩어질 것"과 ② "치마를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하신 이 두 가지 말씀은 "간음과 사특한 소리 곧 비루하고 가증한 음행" 때문에 당하는 "응득이요, 분깃이라" 하신다. 이러한 보응을 받는 것은 아담 후손 속에 역사하는 원죄의 패역을 이기지 못하여 뱀이 꾀일 때 창조자를 버리고 "거짓을 신뢰한 연고"이다. 원죄에 물든 인간은 하나님이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사단의 공격 앞에 백전백패하고 만다. 원죄 때문에 사람마다 우준하고 무식하게 되어 우상을 섬기는 것이며(예레미야 10:14), 원죄 때문에 눈이 가리워져 거짓 것으로 피난처를 삼고 허위 아래 자기 몸을 숨기는 것이다(이사야 28:15). 원죄가 역사하니 정치가와 판사 같은 두령들이 돈을 밝히는 것이며, 원죄가 역사하므로 선지자는 돈을 위해 점치면서 '평강'을 외치는 것이다(미가서 3:11).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2,600년 전에 드러내었던 수치를 오늘날 다시 드러내시겠다는 뜻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원죄에 물든 인간의 사회는 그 모습 그대로이다. 새로 발견되는 악이 없으며, 더 나아지는 점도 없다. 예수님께서 정결케 하신 교회만은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선지서는 바로 교회 안의 백성이 그러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예레미야애가 1:8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하므로 불결한 자같이 되니 전에 높이던 모든 자가 그 적신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저가 탄식하며 물러가도다" 교회가 이방인들 앞에 수치당할 것을 에스겔 16:37, 23:29절에서도 예언하셨다. 원인은 한결같으니 음행! 곧 우상숭배 때문이다.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예루살렘에 화를 선포하는 것은 렘 4:13절을 다시 예언함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네 마음의 악을 씻어 버리라" 하셨는데, 패역으로 인하여 무시하고 듣지 않으므로 결국 바벨론이 성을 포위하여 식량이 끊겨, 연약한 부녀(婦女)가 자기 자녀를 잡아먹게 되는 비참지경의 화를 당하였다(예레미야애가 4:10). 인간이 짐승같이 되어버리는 '화'를 당한 원인은 "피 흘린 성읍, 곧 예루살렘의 죄악"에 있다(에스겔 24:6).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뇨 한국의 기독교회여!(K.N.C.C.), 세계의 기독교회여!(W.C.C.)" 네가 어찌 말하기를 나는 더럽히지 아니하였다 바알들을 좇지 아니하였다 하겠느냐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 한국교회는 일본우상과 행음한 사실을 교단적, 민족적으로 회개해야 한다. 세계교회는 붉은 말이 위장하여 나온 청황색말이 장악한 W.C.C.로부터 어서 빠져 나와야 한다. 한국 교회가 과거 신사참배 골짜기 속에 새겨져 있는 자신의 발자국을 하나님 앞에 인정하여 회개치 못할 때, 더욱 큰 우상소굴인 W.C.C. 골짜기로 기어 들어가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현재 K.N.C.C.에는 대한민국 8개교단이 가입하고 있다).


예레미야 4:30 "멸망을 당한 자여 네가 어떻게 하려느냐 네가 붉은 옷을 입고 금장식으로 단장하고 눈을 그려 꾸밀지라도 너의 화장한 것이 헛된 일이라 연인들이 너를 멸시하여 네 생명을 찾느니라 31 내가 소리를 들은즉 여인의 해산하는 소리 같고 초산하는 자의 고통하는 소리 같으니 이는 딸 시온의 소리라 그가 헐떡이며 그 손을 펴고 이르기를 내게 화 있도다 살육하는 자를 인하여 나의 심령이 피곤하도다 하는도다"


한국 교회는 위와 같은 비극을 당하기 이전에, 즉 10일 환난을 당하기 전까지(세계교회는 5개월 환난이 일어나기 전까지) 회개할 기회가 있다. 그 안에 다시 예언하는 말씀 앞에 굴복하고 회개하면 살려니와, 끝까지 완고하면 "내가 너의 간음과 사특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행한 네 음행의 비루하고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하신 말씀에 그대로 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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