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예수 소개하는 엘리야 (말라기 4:5)

참된 기도의 열매
-마7:1~12-


기도라는 것은 참되신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기도가 아니고는 다 헛된 우상적인 종교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66:3이하를 보면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의 기도는 가증하게 보고 우상과 같이 취급한다고 말씀했다. 오늘에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지만 그 기도가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줄 수 있는 기도가 되느냐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참된 기도가 무엇이냐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


1. 마음에 들보가 없는 기도이다 (1~5)

만일 어떤 사람이 마음에 자기라는 주관을 내세우는 들보가 있다면 하나님과 상대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자기라는 주관이 앞서는 자가 될 때에 자칭 선지라는 교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는 자기라는 자체를 뽑아버리는 희생적인 것이 없다면 도저히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를 가질 수 없다. 자기라는 들보가 없어지고 하나님만으로서 중심에 소유하게 될 때에 밝히 볼 수 있는 영안이 밝아지는 것이다. 인생 자체에는 빛이 없고 밝히 볼 수 있는 빛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신자라 하여도 자기라는 중심에서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완전한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심판에 해당하는 생활이 된다. 그러므로 오직 참된 판단은 하나님께만 있다는 마음에서 남을 판단하는 것보다 먼저 자기가 주 앞에서 판단을 받는 양심적인 회개의 기도 생활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판단을 받는 회개의 생활이 없다면 그 자체가 자동적으로 형식을 따르는 일이 있게 된다.

언제나 자기를 없애 버리는 사람의 기도라면 시간 시간마다 깊은 영계를 체험 할 수 있게 된다.


2. 애써 노력하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 (7~11)

아무리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더라도 사람 편에서 노력하는 것이 없다면 줄 수가 없다. 하나님의 약속은 해산의 수고를 다하여 구하는 자에게 준다는 약속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행하는 신이시니 기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 있는데 하나님께로 받아야 할 인생이 먼저 필요성을 느끼고 구할 때에 두드리면서 찾아오는 심정이 생기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환경에 떨어뜨리는 일이 있는 것이다(사26:16~17). 이것은 하나님의 선한 방법이니 하나님의 약속을 참으로 믿나 의심 하나를 보자는 모략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가 있을 때는 반드시 어려운 환경에 떨어뜨리는 것이 더 큰 것을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모략적인 방법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역사를 보아도 큰 역사를 일으키는 종들에게는 다른 사람보다도 더 어려운 난관이 닥쳐왔던 것이다.

기도라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구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요, 할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이 무소불능의 역사를 일으키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기도가 될 것이다.


3. 남을 대접하기를 목적 둔 기도이다 (12)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택한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어서 남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서 세세 왕권을 누리도록 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큰 뜻이니 누구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마음보다도 남을 대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인간을 초월한 하늘의 것을 주어서 기도의 사람을 통하여 남에게 만족한 것을 얻도록 한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이다. 

모든 선지와 사도들이 다 이러한 신앙 사상에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마땅하게 생각하고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그들은 조금도 사람에게 대접받기를 원한 것은 조금도 없고 하늘에서부터 주는 것 하나만을 목적했던 것이다(빌3:14~15). 그러므로 이러한 인격을 가진 자라야 조물주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에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결 론

가장 어리석은 자는 기도를 하되 헛되이 구하는 자요, 가장 지혜로운 자는 참된 기도를 드리는 자로서 하나님께 더 좋은 것을 받아 길이길이 누리는 자라고 보게 된다.

 

본문 말씀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성경과 신앙 사상 문제
-요5:39~44-



금일에 성경이 세계적으로 번역되어 어느 나라나 그 민족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지킬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큰 축복을 받을 기회라고 보게 된다. 그러나 성경과 읽는 사람의 신앙과 사상이 합치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불행을 가져오는 과오가 있게 될 것이다.

성경을 하나님께로 받아 기록한 사람이 유대인이요, 성경을 많이 읽어본 사람이 유대인이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이 오신 메시야를 오히려 이단시하고 아직까지 메시야 오기를 기다리는 무서운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것은 큰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생을 어떠한 방법으로 구원해 주는가와 동시에 심판을 나리고 새 시대를 이루고자 하는 뜻을 기록한 것인데, 신앙 사상이 그 하나님과 맞지 않으면 아무런 열매가 없는 마른  나무가 되고 말 것이다. 이제 어떠한 신앙 사상이 있어야 성서를 통한 열매가 있겠느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성경을 우상화시키지 말 것이다 (39)

우상화라는 것은 유대인들이 자기 나라 사람이 성경을 기록했으니 자기에게만 영생이 있다는 관념이다. 성경을 순종하는 양심이 아니고,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 큰 과오가 된다. 그들은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전부 자기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 원인은 독선의 교만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성경을 - 목적이 무엇이며 누구를 가리킨 말씀인 것을 분명히 알기 전에 - 함부로 자기 주관에 맞춘다는 것은 성경을 우상화시키는 일이 되게 쉽다.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고 성경대로 행하시는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신앙 사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2. 겸손히 순종하는 것이 있어야 된다 (40~42)

언제나 하나님께 겸손히 순종한다는 마음이 없는 자라면 성경을 읽어도 오히려 마음이 더 강퍅해 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오는) 실천 생활의 순종이 없이는 아무런 체험이 없으므로 성경을 많이 볼 수록 마음이 더 굳어지고 강퍅해질 우려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의 비밀을 모르고 잘못 해석하는 가운데 오히려 남을 판단하는 과오를 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 이 목숨을 바쳐 그 뜻에 순종한다는 맑은 양심에서 읽는 자라야 성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직접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는 자라야 된다 (43~44)

누구든지 사람의 영광을 목적하면 언제나 거짓 선지에게 미혹을 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라는 것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끄는 방침을 가지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는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보다도 인간의 무엇으로 보든지 옳게 보이는 일로 가장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하고 하나님께로만 보이려는 사상이 아니라면 성경의 깊은 비밀을 도저히 알 수가 없고 하나님의 시대적인 비밀을 모르고 오히려 반대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성경은 기록한 선지들이 억울하게 사람에게 멸시를 받고 핍박을 받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려는 생활을 할 때에 그 시대의 사람들이 다 인정하지 않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인정받고 묵시로 받아 기록한 글이니, 이것은 그 뜻을 바로 알자는 성경을 기록하던 선지와 같은 신앙 사상에서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보고 나가는 자라야 하나님의 참된 신의 감화를 받게 되므로 시대의 비밀을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초림의 메시야가 올 때도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는 제사장들과 교법사, 유사, 장로들은 오히려 예수를 이단이라고 판정을 내렸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묵묵히 기도하던 시몬이나 안나 같은 선지들은 어린 예수를 품에 안고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려고 성전에 들어갈 때에 벌써 메시야인줄 알았던 것이다.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에 바리새교인들은 몰랐지만 베드로와 요한과 그 밖의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전도를 받고 메시야를 영접했던 것이다. 재림의 주가 오실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보는 종들 외에는 다 성경의 비밀을 모르고 오히려 성경을 그릇되이 해석하므로 예언을 멸시하다가 멸망을 자취할 것이다.


결 론

성경을 손에 들고 신앙 사상이 잘못된 자 보다도 성경을 알지 못하고 마음이 정직하고 겸손한 자가 있다면 오히려 성경을 들고 잘못 해석하는 자보다는 시대적인 참된 증인의 전도를 받고 축복을 먼저 받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

 

본문 말씀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진노의 날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
-사19:19~25-


기독교는 율법시대를 기하여 모든 선지들이 하나님께로 묵시를 받아 책을 기록할 때에 하나님께 대한 세 가지 역사를 중심하여 기록했다.


첫째는 너그러이 용서하기 위한 하나님의 비밀을 말했고

둘째는 진노의 날에 보호하는 비밀을 말했고

셋째로는 새 땅 축복을 받는 일을 말한 것이 선지서의 3대 요지가 된다.


그러므로 율법시대의 성전이 은혜시대의 다락방으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은 제사를 받으실 때에 진리를 따라서 그 시대에 말씀을 순종하는 제사라야 받으시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는 기뻐하지 않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남녀가 합심하여 기도하는 장소에 성령의 역사가 불로 임하는 동시에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방언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하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맹렬히 다락방 교회를 박해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락방 교회는 세계를 정복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져 없어지고 만 것이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말씀은 은혜시대가 지나고 진노의 날이 올 때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제단은 어떠한 제단이라는 것을 가르쳤다. 하나님은 언제나 제단이 없이는 역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진노의 날에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이제 어떠한 제단이 되어야 진노의 날에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남은 제단이 되느냐 하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에서 깊이 생각할 문제라고 본다. 만일 이것을 분명히 모르는 자가 된다면 헛된 수고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제 본문에서 어떠한 제단이 되어야 하느냐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1. 진노의 날에 남은 종이 기둥이 된 제단이다 (19)

제단이라는 것은 (건물에 따라서가 아니고) 그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기둥 같이 튼튼히 선 사람이 없이는 여호와를 기쁘게 할 수가 없다.

3년 6개월 가물 때에 엘리야는 흔들리지 않고 담대히 서서 제단을 쌓고 손들어 기도할 때에 800여명 바알 선지를 쳐부수는 승리를 이루었던 것이다. 제단이라는 것은 다수가 모인다고 여호와께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요, 적은 수라도 기둥이 될 때에 하나님은 그 종을 통하여 승리하도록 응답을 나리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담대한 사람이 올리는 제사를 기꺼이 받기 때문이다.


2. 표적과 증거가 된다 (20)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난관을 당할 때에 담대히 부르짖는 제단에 (하나님은) 오셔서 그 시대 사람이 깨닫도록 표적과 증거를 보여준 것이다. 앞으로 남은 교회가 되려 할 때 초자연적인 역사가 표적과 증거로 나타나야만 될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응답하므로만이 사명을 감당하는 제단이 될 것이니 아무리 원수의 압박이 있다 하여도 거기에 굴복지 않고 여호와를 위하여 그 시대적인 말씀을 증거하는 것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보호가 같이 할 것이다. 오늘에 많은 사람이 예배하고 있지만 주님 오실 때까지 강하게 역사하는 교회는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라고 보게 된다.


3. 대 승리를 이루는 제단이다 (21~22)

기독교의 승리라는 것은 개혁을 일으키는데 있는 것이니 이 개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제단을 통하여 응답을 나리므로 큰 변동을 일으키는 열매를 보게 된다. 악한 세상으로 평화로운 새 시대를 이루는 것은 어느 교파를 중심한 데서가 아니고 인간의 어떤 정치나 무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한 제단을 중심하여 세계 통일의 완전한 평화 왕국을 이루도록 역사하시므로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난제 해결은 여호와를 위한 제단이 없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배하는 자체가 목적이 아니요, 그 예배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느냐 않느냐가 더 큰 문제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진노의 날에 남은 제단은 진노의 날에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바로 알아서 그 뜻에 순종하는 제단이 아니고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것이니 난국을 당한 이 때에 여호와를 위한 제단을 바로 쌓는 것이 급선 문제라고 본다.

결 론

어느 나라나 여호와를 위하여 옳은 제단을 쌓던 사람은 다 하나가 되어 새로운 시대를 이루어 원수의 나라가 다 이스라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23~25절까지 가르쳤다. 가장 복 있는 자는 여호와를 위하여 응답 받는 제단을 쌓는 자라고 보게 된다.

 

성경 본문

19:19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20 이것이 애굽 땅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표적과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그 압박하는 자의 연고로 여호와께 부르짖겠고 여호와께서는 한 구원자, 보호자를 보내사 그들을 건지실 것임이라 

21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 날에 애굽인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22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주시리라 

23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

기독교 종말의 완전 역사
-사32:1~4-


기독교의 역사라는 것은 지상 통치의 역사를 완전 역사라 하는 것이다. 이날까지의 역사는 지상 통치를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그리스도의 보혈로 세계적인 민족 중에 택한 자를 찾으시는데 불과한 역사이지만 종말의 완전 역사는 의로 통치하는 시대를 이루는 것을 기독교 종말의 역사라는 것이다. 완전 역사라는 것은 사람을 억지로 구속시키는 것으로서가 아니고 인력으로써 할 수 없는 것을 이루어 주는 것을 뜻한다.

 
1.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는 역사다 (1~2)

아무리 광풍과 폭풍이 불어오고 아무리 메마르고 곤핍한 일이 온다하여도 거기에서 피해를 당치 않고 나가는 역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려운 환경이 오게 하는 것도 택한 자에게 더 좋은 것을 주기 위한 목적이니 좋은 것을 받을 수 있는 자리는 인력으로써 당할 수 없는 일이 올 때라고 본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략적인 방법이니 어려운 풍파가 일어나는 것은 당신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인간이라는 것은 어려운 난관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맛보게 되므로 영원한 왕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이다.

주의 인도하는 길은 어려운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요, 광풍 같이 폭풍같이 불어오는 환란에서 피할 길이 있고, 아무리 메마른 땅에도 만족히 마실 물이 있게 하고, 곤핍한 땅에서도 새로워지게 하는 일이 있으므로 진정한 신의 능력을 체험한 자 만으로 새로운 왕국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2. 보고 듣는 자에게 만족을 준다 (3)

언제나 완전이라는 것은 보고 들을수록 만족함을 준다. 완전치 못한 것은 처음에는 좋게 보이나 자세히 보면 볼 것이 없고 처음에는 듣고 싶으나 자세히 들을수록 더 들을 것이 없는 것이지만, 완전이라는 것은 처음 보는 것 보다 볼 수록 더 볼 것이 있고 들을 수록 더 깨달아 지는 것을 기독교의 종말의 완전한 진리라는 것이다.

금일에 기독교가 소위 선교 국가라는 나라들이 모이는데 힘을 잃고 주일날 낮 예배만 보고는 다시 모이지를 않는다는 것은 강단에서 완전한 진리를 가르치지 못하는 일이 있게 되는 동시에 들으나 마나 하다는 싫증을 낼 때에 소위 세속주의라는 신학까지 나오게 된다. 우리는 이때에 들을 수록 볼 수록 은혜가 되고 만족해지는 역사가 없다면 교회는 이 시대에 필요 없는 기관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에 읽고 듣고 지키는 자는 복 있다는 것은 기독교의 완전 역사를 뜻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시대 사람에게 완전한 것을 주는 것이니 지금 과학 문명을 자랑하는 인간들에게 더욱 만족을 주는 진리 운동이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것이다.

 
3. 조급한 마음에 지식을 준다 (4상반절)

사람이라는 것은 공연히 마음이 조급해질 적에 큰 과오를 범하게 된다. 조급은 마귀 시험을 받는 일에 문을 열어주는 일이다. 에덴 동산의 아담 해와가 타락한 동기가 간교한 뱀의 말을 듣고 마음이 조급해지는 시험을 받아 하나님 앞에 물어본 일도 없이 선악과를 먹게 되므로 인류 타락의 시발점이 되었다. 기독교의 신앙심이라는 것은 무조건 무슨 일이나 급하게 서두르는 것은 언제나 마귀 올무에 걸리는 행동이라고 보게 된다. 

오늘의 기독교가 과학 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할 때에 완전한 진리의 지식이 없는 인간들이 과학 만능을 부르짖는 마귀 소리에 미혹을 받게 된다. 금일에 완전한 신앙 지식을 가진 자라면 이 시대를 바로 분별하는 동시에 시대적인 진리 지식에 입각하여 마음에 조급이 없는 완전한 인격을 소유한 성도의 생활에서 시국 난제를 해결할 지식을 성서에서 완전히 찾게 되는 일을 완전 역사라 하는 것이다.

 
4. 말을 분명히 하는 자가 된다 (4하반절)

오늘에 기독교 강단에서 말을 분명히 하지 못하므로 오히려 혼란을 일으키고 말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역효과를 주는 일이 너무나 많다. 설교가 영을 살리는지 죽이는지를 모르고 무조건 떠든다는 것은 예배를 망치는 설교가 될 것이다. 분명한 말을 못하는 자의 강단 생활은 자신조차 흑암에 빠지는 일이 된다(사8:20).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로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합리적인 변론이 구비된 글이다. 어떤 자들이 하나님 말씀은 아무렇게 각각 해석할 탓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망치는 말이라고 본다. 사45:19을 보면 나는 흑암한 곳에서 은밀히 말하지 않았으며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헛되이 찾으라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나 여호와는 의를 말하고 정직을 고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이 분명히 말할 진리를 주지 않고 무조건 나가서 증거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종이 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분명한 말을 못하면 완전한 인격을 가진 자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금일에 기독교의 완전 역사는 신자로서 분명한 말을 하게 될 때에 마귀의 흑암은 물러가고 천사는 같이하므로 백전 백승의 용사의 걸음을 걷게 될 것이다.

 
결 론

우리 인생의 참된 행복의 세계를 이루는 것은 과학을 초월한 하나님의 완전 역사로만이 완전한 인격을 찾게 되는 동시에 완전한 열매를 이루는 자로서 새로운 의의 통치 시대를 이루는 것을 기독교 종말의 완전 역사라는 것이다.

 

성경 본문

32:1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 

2 또 그 사람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우는 곳 같을 것이며 마른 땅에 냇물 같을 것이며 곤비한 땅에 큰 바위 그늘 같으리니 

3 보는 자의 눈이 감기지 아니할 것이요 듣는 자의 귀가 기울어질 것이며 

4 조급한 자의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어눌한 자의 혀가 민첩하여 말을 분명히 할 것이라

해 돋는 편에서 두려워 할 영광
-사59:18~60:3-


인류 역사상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곳은 아시아라고 보게 된다. 에덴 동산을 창설할 때도 아시아요 인간이 타락하여 생활 개척에 번창의 시발점도 아시아요 무서운 홍수 심판의 방주를 타고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는 노아의 가정도 아시아 사람이라고 보게 된다. 셈과 함과 야벳이 번창할 때에 하나님은 셈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후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 일은 완전한 언약의 말씀이 모든 선지를 통하여 기록된 역사라고 보게 된다. 

왜냐하면 조물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비밀을 인간에게 나타나 보이기도 하고 역사를 보여 주는 동시에 이와 같은 역사가 앞으로 다시 있으므로써 모든 예언은 이루어져 평화의 왕국이 온다는 것이 과거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 일이라고 보게 된다(사46:10). 

모든 예언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장소는 이방의 갈릴리라고 말씀한 대로 갈릴리를 중심하여 이방을 밝히는 빛이 나타났던 것이다(사9:1~2). 그야말로 얼마나 영화로운 일인가! 나사렛 골짜기의 한 목수의 가정으로 자리잡고 자라난 그리스도의 역사는 해변에 나가서 그물 한 채를 들고 있던 갈릴리 벳세다 동네의 어부들이 사도가 되어 세계 열방에 죽은 영들이 살아나는 빛의 종교를 이룬 것이 얼마나 영화로운 일인가. 

이제 더 큰 영광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성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이사야 성경의 목적이 큰 구원을 말한 것인데 이 큰 구원이라는 것은 세계 인류가 전멸되는 재앙에서 남은 자가 되어 눈물 없고 질병 없고 전쟁 없는 새로운 시대에 세세 왕권의 영광을 누리는 일을 목적 둔 것이다. 그러므로 갈릴리에서 시작된 빛이 시작이라면 해 돋는 동방에 나타난 영광은 끝을 맺는 역사라고 본 성경은 가르쳤다.

이제 해 돋는 편에 나타날 두려운 영광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성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1. 재림의 주를 영접하는 영광이다 (19~20)

인류 역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가 많이 있지만 주 재림시에 남아 있는 자가 볼 영광을 목적 두고 선지와 사도와 성도들은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했던 것이다(약5:7~10, 롬8:18). 그러면 이미 죽은 자들도 이것을 바라보고 싸웠다면 살아서 주님을 맞이할 자들의 영광을 가르쳐서 해 돋는 편에서 그 영광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재림의 주를 맞이할 변화성도에게 나타날 큰 역사는 해 돋는 편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계시록 7장에도 해 돋는 데서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나온다고 했으니 재림의 주를 맞이할 종들이 이마에 인맞는 역사가 무엇이라는 것을 계시록 10장과 11장에 분명히 가르쳤다. 그러므로 이 영광은 원수를 갚는 날에 남은 종이 받을 영광이다(19).

 
2. 동방 사람에게 마지막 역사가 임하는 일이다 (21)

역사적으로 모든 선지를 통하여 보여준 묵시의 말씀이 다 이루어지는 영광의 새 나라에 들어갈 백성들에게 전할 말씀이 해 돋는 편에 있는 사람에게 입에 임하여서 그 역사로 완전히 끝을 맺는 일이다. 이제 이러한 역사가 없이는 기독교 종말에 나타날 영광을 누릴 진리 운동을 사람으로서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직접으로 입에 말씀을 주어서 바로 증거하도록 하는 역사가 동방의 역사라는 것이다(사41:1~2, 24:14~15, 46:11). 이것은 두려워할 일이 된다. 왜냐하면 심판 권세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역사 중에 가장 큰 역사는 새 시대가 이루어지는 종말의 동방 역사이다.

 
3. 열방을 통치하는 영광이다 (60:1~3)

이 영광은 세계가 흑암이 덮이는 무서운 재앙 속에서 세계 인류를 구원해 주는 역사이니 새 시대의 왕국이 이루어지는 역사의 본부는 동방 해 돋는 편이라는 것이다. 잃었던 백성을 찾는 역사는 아시아 서편 지중해 옆 유대 나라요 하나님께로 돌아온 백성을 보호하여 새 시대로 인도하는 역사는 예루살렘에서 획선을 그어서 동쪽으로 나가면 우리 대한민국이 된다.

현재에 극동에 모든 제단이 다 황폐화되고 한국만이 남아서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 라는 우렁찬 애국가를 부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 나라에 나타나 보호하는 일이 있을 것을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이러한 노래를 부르게 하신 것이라고 믿어진다. 기독교의 진리가 이것인 것을 모른다면 기독교는 지금부터 흑암에 떨어지는 비참을 보게 될 것이다.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대한 민국에 나타날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에 목적을 둔 일이 지상 평화 왕국인데 이것을 이루는 진리가 햇빛 같이 말씀으로 새일수도원 강단에 임했다는 것은 만민 앞에 자랑할 영광이 될 것이다. 경솔한 인간들은 공연히 남의 말에 끌려 이 나라에 나타난 진리를 비소하지만 그들도 눈물 흘리며 회개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이 나라에 모든 문제는 이 민족 위에 나타난 진리 이것으로 해결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사야 60장 전체를 읽어보아서 알 수 있다.


결 론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과거가 아니요, 이제부터 기독교에 나타날 것이니 이것을 바로 알려주는 일이 새 일을 고하는 일이다(사42:9 이하). 만일 누구든지 이 역사를 반대하는 자는 전멸을 당한다는 것이니 가장 두려운 일이다(사60:12).

 

성경 본문

59:18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19 서방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돋는 편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기독교의 혼란을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 사 28:6~13 -

기독교는 진리 하나를 바로 전하기 위하여 세상에 교회의 확장을 이루게 한 것이요 또는 진리 하나를 위하여 싸워 승리하기 위한 데서 하나님의 종들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금일에 기독교가 세계적인 대종교를 이루어 놓은 것만은 누구나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기독교는 어떠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냐 하는 것을 누구나 다 주목하는 바이다. 이와 같은 난국을 당하여 “아름다운 소식” 이라는 월간지를 세상에 내 놓게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의가 있다.


1. 성서 본문주의로 깊이 들어가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완전한 신이신데 목적을 두고 완전한 언약을 하셨고 언약을 따라 역사하는 진리의 신이시다. 만일 기독교가 십자가의 도로써 세계 인류의 죽은 영을 살려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얻게 하는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가르쳐 주는 교회가 못된다면 큰 목적을 달성할 수 없고 오히려 불행을 가져오는 교회가 될 위기에 놓여있는 현실이라고 보게 된다. 성경이라는 자체는 하나님의 법이 인간에게 나타나되 그 시대 시대에 따라 타락한 인류를 어떠한 방법으로 인도하고 다스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것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이날까지에 기독교의 진리 운동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다 이루어지는 역사에서 진리 운동을 한 것이 아니고 성경대로 십자가에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 진리를 사도들에게 성경을 깨닫게 하는 영을 주어 바로 증거하도록 하신 것이다(눅24:44~49). 이 은혜를 받은 사도들은 선지서를 읽을 때에 십자가의 도가 정확히 깨달아지는데서 완전 변론을 하되 율법과 은혜라는 제목 하에서 율법주의의 잘못된 바리새교인들과 피 흘리기까지 싸웠던 것이다.

그 때는 신약 전서를 손에 들고 싸운 것이 아니고 율법과 선지서의 글을 가지고 예수의 행적을 전하며 또는 십자가의 도를 믿는 신자들에게 율법을 초월한 성도 생활에 지침이 되는 편지를 써서 보냈던 것이다. 이것은 깨닫는 영을 받은 사도들이 성경이 이루어진 사실을 바로 가르치며 모든 일에 완전한 열매를 맺어야 되는 성신의 도리를 기록했던 것이다. 그 때에 성도들은 예수 행적과 사도행전과 편지서를 사도들에게 받아 가지고 이 글을 읽어가면서 교회를 세우는 동시에 가르치는 일을 했던 것이다. 

지도자의 양성을 필요로 느낀 성도들은 교회 확장에 따라 그것을 가르치는 성서학원 신학원을 설립하게 되어 내려오던 중 금일에 와서 신학대학이라는 명칭까지 가지게 된 것이 기독교 종교 교육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금일에 이 신학으로만이 성경을 다 가르치는 일에는 불가능함으로 사28:7같이 되는 일이 있게되는 것은 사람이 억지로 선지서를 해석해 보는 과오가 시작되어 이것은 오히려 기독교에 혼란을 일으키는 현실을 이루게 된 것이다. 

사도의 사명은 선지서의 목적을 다 이루는 데가 한계가 아니요  초림의 주가 오시어 신성과 인성을 가진 동정녀 잉태로부터 십자가 부활 승천, 성신 강림의 역사로 죄와 사망에 깊이 빠진 영들을 이끌어 내주는 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행적을 쓰는 사도들이 선지서를 이용하여 자기의 사명을 하기 위한 목적에서 주님의 가르쳐 준 교훈에 의하여 신약 전서에 대강 기록한 것 뿐이다. 이사야서를 본다면 사7:14, 9:1~2, 11:1, 28:16, 40:1~6, 42:1~8, 49:8상반절, 53:4~10, 61:1, 65:1을 증거한 것 뿐이다. 그 밖에 이사야서 전체는 환란과 재앙 속에서 변화성도로 눈물 흘려 다시 예언할 복음이 된다(계10:7).

금일에 기독교는 선지서의 전체를 본문대로 들어가서 그의 경고를 우리가 나가서 전할 말씀이며 우리가 살아서 남은 종이 되고 남은 백성이 될 자들이 걸어 나갈 신앙 노선이 된다. 죄인을 부르는 은혜시대와 죄인을 없애 버리는 진노의 날이 있고 새 시대가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활성도의 성서적인 활동과 변화성도의 성서적인 활동이 그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2. 사명의 획선을 바로 찾자는 것이다

사명은 사도적인 사명의 획선도 있고 선지적인 사명의 획선도 있으니 사도는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것만이 그의 획선이다. 행1:21~22의 사명은 속죄 구령의 사명이다. 이것이 금일까지에 기독교 강단에서 가르치는 사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재림의 주를 맞이할 생존성도는 다시 예언의 사명을 하는 선지의 역할을 하게 된다(계11:3~12, 22:6, 17~19).

왜냐하면 여호와의 말씀인 선지서는 목적이 심판과 새 시대를 목적했다. 이스라엘 말기에 극도로 선지국가인 다윗 왕국이 부패하여 바벨론에게 망하게 될 때에 그들은 눈물 흘려서 말씀을 예언했지만 부패한 정부가 거짓선지와 합작이 되어 참된 선지를 축출하고 학살시킬 때 하나님의 묵시가 피 흘리는 선지들에게 피 값을 갚아주는 일이 있을 것과 새로운 시대의 왕국이 올 것을 묵시로 보여 주었다. 그들은 묵시 가운데서 여호와의 말씀을 받아쓸 적에 심판의 다림줄을 세밀히 변론적으로 하나님께 받아 쓰게된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 구령의 도리는 쓰지 않고 심판과 새 시대를 쓸 적에 그리스도의 탄생이 있을 것과 세계적인 평화의 복음이 전파 될 것과 인류 종말의 재앙이 북방으로 올 것과 환란과 재앙 속에서 남은 자가 있게 될 것을 말할 때에 고레스의 역사로 바벨론에서 남은 자가 예루살렘을 복구한 사실을 들어서 인류 종말에 북방 환란에서 남은 자가 되어서 새 시대 갈 자는 동방에서 일어나는 역사로 말미암아 완전한 다윗 왕국이 세계를 통일하는 새 시대가 올 것을 말할 때에 이사야 24장에 세계를 뒤집어엎는 진노의 날이 하나님께로 오는데는 동방 바다 옆에서부터 외치는 소리가 나온다고 24:14에 말했고 땅 끝에서부터 의로우신 자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는 노래를 부른다고 16절에 말했고 그 노래의 뜻을 설명할 때 25장에 설명했고 27장과 같이 심판이 오고 새 시대가 오는데는 심판의 대상자는 28장과 같이 주의 종들이 이상을 그릇 풀고 재판할 때 실수하는 죄가 많으므로 하나님은 11절과 같이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고 하였다. 이것은 안식에 대한 말이라고 12절에 말했고 이것을 듣지 않을 때는 반드시 환란에서 망할 것을 13절 이하에 가르쳤다.

금일에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월간지가 나오게 되는 것은 새일수도원 원장이 강단에서 설교하던 중 위로부터 서책을 받아쓰라는 명령이 있어서 수도를 받던 종들이 붓을 들 때에 입에서 말씀이 나리기 시작하여 아무런 서책을 보지도 않고 말씀이 나오는 대로 기록한 것이 조직신학 강의, 선지서 강의, 계시록 강의, 요한一서 강의, 인간론, 새일 성가집 등의 서책이 나오게 되었다.  금일에 와서 이제는 입에 말씀이 임하는 대로 써서 아름다운 소식이라는 월간지를 발행하라는 지시에 의하여 1970. 6. 17일부터 기록하기 시작했으니 이 글을 읽어보면 누구든지 분명히 혼선된 진리가 없도록 목회 할 수 있게 되며 신앙 노선에 큰 발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본문

28:6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신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 마는 

7 이 유다 사람들도 포도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인하여 옆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인하여 비틀거리며 이상을 그릇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8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9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뉘게 지식을 가르치며 뉘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10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11 그러므로 생소한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12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13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로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잡히게 하시리라